냉소적 세계관 속에서 발견한
최소한의 천국

영화 《시라트》 리뷰 | 감독 올리버 라세

by 데미안에너지

영화 《시라트》는 정보 없이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스포일러가 담겨 있으니, 영화를 먼저 감상한 후 리뷰를 읽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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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라트》 리뷰 내용, 4컷으로 미리보기!

시라트-4컷.jpg “AI생성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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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의 의미: 지도는 주지만 길은 알려주지 않는다


감독은 영화 시작에 제목 ‘시라트’의 뜻을 자막으로 제시한다.

천국과 지옥을 잇는 다리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칼날보다 날카로워 오직 의로운 자만이 건널 수 있다.

아랍어인 ‘시라트’는 일상적으로 ‘길, 방식’이라는 뜻이지만, 영화는 이슬람 종교에서 최후의 심판 때 사용하는 언어로 제목을 확정한다.

감독은 관객에게 논리적인 답을 주지 않고 제목으로 말한다.

“어디가 천국이고 어디가 지옥인지 잘 봐라. 우리는 그사이에 있다.”

‘그사이’가 바로 이 영화의 시작점이다. 영화는 나를 경계선에 올려놓고 이해가 아닌 위태로운 선택을 하게 한다. 시각과 청각 그리고 공포의 공감각으로.

감독은 도로와 철길을 쉬지 않고 보여주고, 클럽 음악처럼 묵직한 저음을 관객들의 온몸에 주입한다. 발바닥부터 올라오는 진동이 계속해서 관객을 끌고 간다. 음악과 이미지가 아슬아슬하게 흐른다.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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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의 설계: 의식의 실패➞의식의 설득➞의식의 파괴


영화의 첫 장면은 사막에 스피커를 쌓아 올리는 모습이다. 곧이어 사막에서 열리는 레이브 파티, 사람들이 춤추는 장면이 길게 이어진다. 나는 이 장면을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영화는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베이스는 끊기지 않고 무의식적 배경음처럼 관객의 몸에 달라붙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것은 유흥이 아니라, 어떤 원형적 의식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서서히 생긴다.

레이브 파티는 게릴라성 무허가 파티라고 한다. 춤추는 사람들은 무아지경에 가깝고, 등장한 군대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통제한다. 탱크와 총, 그리고 세계적 충돌을 암시하는 라디오 방송. 여기서 영화는 관객과 인물 모두를 선택의 순간 앞에 세운다.

딸을 찾기 위해 이곳에 온 루이스 일행(아들 에스테반, 강아지 피파)은 레이버들 중에서 스페인 사람들과 만난다. 루이스는 그들과 함께 다른 길을 택한다. 그 길이 천국인지 지옥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이들이 이미 시라트 위에 올라섰다는 것뿐이다.

처음에 레이버들은 루이스 일행을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동이 길어질수록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고 돕는다. 스페인 레이버 집단인 비기, 스테프, 조시, 토닌, 제이드는 내면 깊이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팔과 다리가 잘린 사람, 온몸에 문신과 피어싱을 한 사람, 담배와 약물로 버티는 사람. 이들의 춤은 유흥이나 멋이 아니라 생존의 몸부림처럼 보인다.

왜 그들이 사막으로 도망치듯 파티를 여는지 영화는 자세히 말해 주지 않는다. 다만 주유소와 난민의 이미지 같은 파편으로, 보이지 않는 폭력이 계속 진행 중임을 암시할 뿐이다.

그들은 군대를 따돌리고 또 다른 레이브 파티로 향한다. 모래바람을 견디고 서로를 붙들며 최소한의 온정을 만들던 순간, 영화는 갑자기 지옥의 문을 연다.

루이스의 아들 에스테반과 강아지 피파를 태운 차가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모래와 바람뿐이다. 겨우 만난 목동은 그들을 피하고, 빈 마을엔 신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에서 흘러나온다. 군대도 신도, 온기를 가진 어떤 사람도 에스테반의 시신을 찾도록 도와주는 존재는 없다.

절망에 빠진 루이스는 홀린 듯 사막 한가운데로 걸어가 절규하다 쓰러진다. 레이버들이 달려와 루이스를 위로한다. 다음 날 스피커를 꺼내 음악을 튼 레이버들은 춤을 춘다. 루이스는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던 그 파티를, 이제는 몸으로 이해하게 된다. 아들을 잃은 고통이 몸을 통해 반응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춤은 고통을 견디기 위한 자기최면 의식이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볼륨을 더 높여서 날려버리라고 말한 제이드가 지뢰를 밟아 폭발한다. 제이드를 도우러 간 토닌도 잇달아 사망한다. 사막 속에 지뢰밭이라니, 인생의 고통스런 순간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나는 이 영화가 감각적이지만 냉소적이라고 느꼈다. 영화가 춤에 대해 관객을 겨우 설득해 놓고, 그 설득의 발판을 직접 폭발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감독은 고통을 견디는 의식조차 관대하게 허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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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통과이고 통과는 시험이다


에스테반의 죽음 이후부터 루이스는 딸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이버들이 말하던 다음 파티도 없을 것이다. 또한 이들에게 안전한 곳은 끝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루이스의 아들 에스테반의 죽음은 이들의 여정을 지옥으로 바꾸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영화 중반부터 나는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던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의 모습이 떠올랐다.(『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지음) 구원은 오지 않지만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 영화 속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희망을 붙잡을수록 더 부조리해지는 삶.

끝없는 사막과 낭떠러지 길, 위태롭게 지나가는 버스들. 이들의 이동은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강요된 통과에 가깝다. 선택지가 없는 경계선을 건너는 상태. 그게 바로 이 영화가 말하는 시라트다.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은 죽음뿐이다. 삶을 위한 희망과 구원 같은 것은 없다, 바로 지금 자기가 통과하고 있는 그 길이 바로 삶이다. 그 극단을 영화는 지뢰밭 장면으로 보여준다.

루이스가 지뢰밭을 건너는 방법은 기술이 아니라 상태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

삶과 죽음의 저울이 붕괴된 지점에서, 오히려 몸이 길을 찾아간다는 역설.

텅 빈 마을 텔레비전에서 나온 기도 화면은 거대한 담론을 무너뜨린다. 큰 의미, 큰 구원, 거대한 진리 같은 것들은 지금 여기에서 이 사람들을 살려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시킨다.

인생은 무언가를 통과하는 시험과 같다. 그곳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목적지에 닿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르고 통과해야만 한다. 하지만 영화는 목적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연쇄 폭발처럼 이어지는 시험대만 보여준다. 위태롭지만 함께 그 경계선을 통과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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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완전한 허무로 끝나지 않는 지점


그럼에도 영화가 ‘모든 게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에스테반은 루이스가 숨겨둔 초콜릿을 레이버들과 나눠 먹자고 한다. 레이버들은 작은 강을 건널 때 루이스 일행을 도와준다. 함께 음식을 나누고,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돕는 과정에서 그들은 아주 잠깐 웃음과 안전을 되찾는다. 그 순간이 영화가 허락하는 유일한 낙원이라는 생각을 했다. 천국이라는 목적지는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서로를 붙잡는 행위가 천국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전해지는 냉소는 비웃음이 아니라 무심함에 가깝다.

큰 구원은 거짓일 수 있다. 하지만 작은 윤리는 진짜일 수 있다. 감독은 영웅도 설정하지 않고 어떤 설교도 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의 몸에 감각을 집어넣고, 무엇을 붙잡을 것인지 묻는다.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다. 온몸으로 느끼고 깨닫는 것뿐이다. 영화 《시라트》는 그 방식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리고 낙원은 없다. 현실만 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면, 견디고 또 살아내야 한다. 그게 우리가 건너는 시라트의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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