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 아닌 동행으로

영화 《세계의 주인》 리뷰 | 윤가은 감독

by 데미안에너지

*리뷰에는 결말도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영화를 감상하신 후 리뷰를 읽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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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계의 주인》 리뷰 내용, 4컷으로 미리보기!

“AI생성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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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은 취향이 아니라 시대의 증거다

사유의 지점이 깊게 들어오는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의 장르를 가리지는 않는데, 나를 영화관으로 이끄는 작품은 대부분 독립예술영화였다. 나는 불편해야 할 것들을 ‘그냥 지나가자’고 말하는 사회가 더 무섭기 때문에, 그런 지점을 말하는 영화를 찾는다.

우리는 불편을 ‘예민함’으로 돌리고, 폭력을 ‘사람 사이의 문제’로 축소한다. 영화 《세계의 주인》은 그 축소를 끝까지 거부한다는 점에서 나에게 특별하다. 그 거부는 사건이 아니라 말의 방식에서 시작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불편함은 자극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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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다층성 : ‘주인’이라는 말의 오염


‘주인’은 주인공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각자 인생의 주인’이라는 뜻을 갖는다. 영화는 두 가지 의미를 쉽게 풀어주지 않는다. ‘세계에서 주인이 된다’는 것과 ‘주인이가 세계가 된다’는 말―둘 다 익숙한 문장인데 영화 안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서늘해진다.

‘주인’이라는 말에는 자율과 결정권, 존엄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주인답게 행동하라’는 명령으로 바뀌는 순간 모든 것이 뒤집힌다. 자유의 언어가 책임 전가의 언어로, 존엄을 말하는 문장이 태도를 검열하는 문장으로 오염되는 지점이 생긴다.

서명지를 돌리는 교실에서 ‘다 같이’라는 공기가 옳고 그름을 대신할 때, ‘주인’이라는 말은 어느 순간 명령문으로 변한다. 여기서 ‘세계에서 주인이 된다’는 권리가 아니라 처벌의 형식으로, 자유가 아니라 감당해야 할 의무로 바뀐다. 그래서 영화 제목은 따뜻하기보다 서늘하다.

‘주인이가 세계가 된다’는 영화 안에서 더 크게 작동한다. 세계(교실의 공기, 여론, 소문, 판결, 시선)가 주인이에게 들어와 버리고, 주인이는 그 세계를 대표하는 사람처럼 변한다. 그러는 사이 주인이는 낯선 사람이 되어가고, 타인이 자기 판단을 주인이에게 투사한다.

누군가 주인이를 부르는 순간, 이름은 곧 규범이 된다. 주인이는 한 개인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대상으로 바뀌고, 그때부터 사람은 지워진다. 영화 내내 불리는 주인이라는 이름은 존중의 호명이라기보다, 서명을 위한 호출에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이가 자기의 세계를 지켜내면서도, 세계에 잡아먹히지 않고 오롯이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작은 힘을 보여준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의 울림은 크다. 익명의 쪽지가 처음에는 비난의 통로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 여러 목소리가 겹쳐 들릴 때 그것은 한 사람에게 세계의 문제를 떠넘기는 구조에 작은 균열을 낸다. 개인을 세계로 만들어 버리려고 할 때도, 누군가는 그 세계를 같이 나눠 들 수 있다고, 용기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그 균열을 내는 작은 통로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영화 제목 ‘세계의 주인’은 결국 나에겐 이렇게 남았다.

‘주인이는 자기 세계를 지키면서도 세계 밖으로 도망치지 않고 그 안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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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유의 절차 : ‘다 같이’가 생각을 대신할 때

모두가 빠르게 정답을 택하는 사회에서 생각은 사라지고 절차만 남았다. ‘다 같이’라는 말이 가장 편리한 면죄부가 된 세상에서 우리는 자신의 사유를 너무 쉽게 타인의 표준에 맞춰버린다.

영화에는 확실한 악이 전면에 오래 남지 않는다. 물론 성폭력 가해자는 악인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주인이가 세계와 갈등을 빚는 지점은, 두렷한 악인이 아니라 오히려 선함 속에 숨어 있는―악의 없이 굴러가는 시스템에서 발생한다. 서명지의 문구에서 주인이가 동의하지 않는 문장을 나 또한 ‘선한 일이니까’라고 지나쳐버릴 수 없었다.

주인이의 서명 거부는 선한 일이니까 그냥 해야 한다는 무사유에 대한 환기장치다. 선한든 악하든 깊은 사유 없는 행동은 폭력을 가져온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영화에서 주인이에게 전해지는 쪽지는 공격과 낙인의 통로로만 남지 않아서 좋았다. 다양한 목소리가 들릴 때, 그것은 “용기 내”라는 말이 아니라 “나도 여기 있어”라는 증언에 가깝게 들렸다. 한 사람의 이야기였던 것이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확장되는 순간,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강력한 힘을 준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던 시선이 무너지고, 살아남은 방식의 언어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위로의 문장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주인이의 엄마가 말없이 세차장을 도는 것과 휴지를 건네는 것.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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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머무는 자리가 늘어나는 쪽으로

나는 이 영화를 ‘위로’가 아닌 ‘동행’으로 기억하고 싶다. 세상은 자꾸 말, 입장, 태도를 요구한다. 그런데 그 요구는 종종 “설명해 봐”, “증명해 봐”로 바뀌면서 사람을 더 고립시킨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쉽게 말한다. 그 말로 누군가를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정말 필요한 순간에 사람을 살리는 것은 완벽한 문장이 아니라, 옆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이다. 영화에서 오래 남는 장면들도 말이 없다.

주인이의 서명 거부가 끝까지 붙들었던 것도 정답이 아니라 자기 세계의 경계였고, 마지막에 들려오는 여러 목소리는 그 경계를 혼자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였다. 주인이는 세계가 요구하는 문장들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감각을 지켜냈다. 조용한 행동은 해결이 아니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만든다. 나는 그 자리가 늘어나는 쪽으로 세상이 조금이라도 기울기를 바란다. 나에겐 이 영화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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