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에서 실현으로

『기사단장 죽이기』 1, 2권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by 데미안에너지

『기사단장 죽이기』통합 리뷰 내용, 6컷으로 미리보기!

기사단장죽이기-6컷.jpg “AI생성 이미지입니다.”

1권 『기사단장 죽이기-현현하는 이데아』

2권 『기사단장 죽이기-전이하는 메타포』


‘재현’의 삶에서 ‘실현’의 삶으로 성장하는 소설


보통은 소설을 읽을 때, 읽는 동시에 리뷰나 에세이 개요를 머릿속으로 정리할 수 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주제를 찾고 개요를 수정한 후 글로 옮긴다.(이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잘난 척 아니고,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읽으면서 정신이 없었다. 읽고 나서도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이데아라는 단어에 묶여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일단 이데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데아를 작품과 연결해서 구조적인 흐름을 알아차려야 한다. 메타포라는 단어 때문에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시간을 들여 플롯을 정리하면서 작품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이 작품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를 이데아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작품을 읽으면서 자각하고 깨닫고 발견한 내면의 변화는 새로운 이데아를 탄생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작품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즉 이 작품은 이데아를 ‘재현’의 관점으로 보느냐 ‘실현’의 관점으로 보느냐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재현’의 삶에서 ‘실현’의 삶으로 성장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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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재현과 실현 사이에서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마주하는 용기와 분투기


먼저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이다. 둘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데아 이론이다. 두 철학자의 이데아를 지금 설명하다가는 책 한 권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플라톤은 이미 존재하는 이데아를 찾아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서 경험으로 이데아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플라톤의 이데아는 ‘재현’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데아는 ‘실현’을 의미한다.

한 가지 더, 이데아는 완벽한 세계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림자를 이데아라고 여기며 살아간다고 했다. 그림자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철학자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작품에서 이데아가 ‘재현’될 때 그림자는 악을 대표할 수도 있고, 거짓된 삶이나 공포, 어둠 등 부정적인 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데아와 그림자는 이분법으로 존재한다. 반면 이데아가 ‘실현’될 때 그림자는 같은 맥락이지만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한다. 이데아와 그림자가 함께 존재하지만 올바른 지점을 선택하고 나아가는 것이며, 그때는 ‘바로 지금’ 밖에 없다.


작가가 1권의 제목을 『현현하는 이데아』로 정한 것은 재현의 이데아를 설명하는 것이다. ‘나’가 살아온 인생인 이데아가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하고 서서히 자각의 단계를 거치게 하는 목적이 있다. 2권의 제목이 『전이하는 메타포』라는 점은 실현의 이데아를 성찰과 연결해 플롯을 진행한다.

작품에서 ‘나’는 재현되는 이데아(초상화, 타인의 욕망, 과거의 고통)를 넘어, 자율적으로 의미를 구성하고 자기 삶의 그림을 새롭게 그려가는 능동적 자아로 변모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철학적 용어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각자가 살아온 삶을 반복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의미를 만들며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나’의 정서로 읽어도 무리는 없다. 즉 우리 인생을 재현과 실현 사이에서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마주하는 용기와 분투기로 읽어도 좋다. 작가가 선택한 제목에 현혹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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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기사단장 죽이기>의 의미


작가는 ‘나’가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발견하면서 이데아를 자각하게 만든다. 아마다 도모히코가 그린 <기사단장 죽이기>를 통해 ‘나’는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지만 외면하고 차단해 버린 분노와 상처, 슬픔을 느끼기 시작한다. ‘나’가 자신의 현재를 자각하고 마주하게 되는 과정이 소설의 주된 흐름이다.


작품에서 <기사단장 죽이기>는 아마다 도모히코가 그린 그림인 동시에 그가 실현코자 했으나 이데아의 좌절 버전이다. 모차르트의 작품 <돈 조반니>를 차용해서 그렸지만 바닥 뚜껑을 열고 상황을 훔쳐보고 있는 ‘긴 얼굴’의 사내가 추가되었다.

‘나’는 아마다 도모히코의 삶과 <기사단장 죽이기> 속 상징들을 차례차례 마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상황을 맞닥뜨린다. 초상화를 그리며 살아가던 ‘나’가 자유롭게 자신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그렇게 멘시키의 초상화를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그리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멘시키의 접근은 계산된 것이었고, 그의 딸이라고 믿는 아키가와 마리에에게 접근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나’는 간파한다. ‘나’는 멘시키에게서 아키가와 마리에를 보호하게 되고, 실종된 아키가와 마리에를 구출한다. 그 과정에서 기사단장의 모습을 한 이데아가 나타나고 <기사단장 죽이기>는 현실에서 완벽하게 재현된다. ‘나’는 기사단장을 죽이고 ‘긴 얼굴’을 불러냈으며, 바닥 뚜껑 아래로 들어가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

‘나’가 아마다 도모히코의 집에 살면서 겪은 모든 일은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재현하고, ‘나’의 내면을 마주하는 과정을 위한 밑거름이었다.

멘시키는 ‘나’의 내면 깊은 곳을 자극하는 촉매자이자 시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림자와 공포, 욕망을 의인화한 존재일 수도 있다. 그림자를 마주해야만 ‘나’는 실현의 삶(자기 자신만의 이데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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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로 나아가는 길


‘나’는 초상화가로서 관찰력이 뛰어났으며 시각적 능력이 남들보다 월등했다. 타인을 마주하고 타인의 내면과 본질을 깨닫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자기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지는 못했다. 그 변곡점이 바로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이었다.

아키가와 마리에를 구하면서 ‘나’는 과거의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고, 현실의 고통을 마주한다. 유즈를 만나 진심을 말하고 재현이 아닌 실현의 삶을 향한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집에서 살았던 기간에 겪은 모든 일이 유즈의 딸인 무로(실)를 선물로 만나게 되는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현실의 이데아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성숙한 철학자가 된다. 그래서 과거에 초상화가로 일했던 자신과 모든 과정을 겪고 난 현재의 초상화가인 ‘나’는 같지만 다른 사람이다. 성찰한 사람은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성찰로 나아가는 방법은 하나의 세계(내면의 밑바닥을 마주해야 한다.)를 죽여야만 한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 변화는 새로운 행성이나 우주를 만나게 된 것과 같다. 자기 자신의 본질을 마주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삶도 자유롭지 못하고 행복할 수 없다. 그림자가 자신을 좀 먹게 놔둘 수는 없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공포(그림자라 해도 무방할 듯)가 자신을 잡아먹게 하면 안 된다.

‘나’는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 멘시키, 아키가와 마리에, 유즈를 통해서 자신의 밑바닥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형상화된 기사단장의 희생과 ‘나’의 시련을 극복하고서.

일련의 여정을 통해 ‘나’는 과거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앞으로의 두려움을 받아들이게 된다. 즉 재현에서 실현으로,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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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이데아를 실현하기 위해


‘나’가 유즈와 재결합하고 무로를 자신의 딸로 받아들여 사랑으로 기르는 삶을 선택한 마지막 장면은 작가가 주제를 제시하는 부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작품들은 열린 결말이기 때문에 생각거리가 많아지는데, 이 작품은 상처와 상실을 넘어 재생과 소속감을 얻는 과정을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통해 이끌어갔다.

몇 년 후, 마리에와 ‘나’는 통화를 하면서 둘만의 비밀로 남은 경험을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리에는 그 경험을 옛날 일로 여기며 살지만 ‘나’는 생생한 자각으로 여기며 산다. 따라서 마리에는 ‘나’와 연결된 이데아가 아니라 자신만의 이데아를 실현하며 시련을 극복하고 성장해야 하는 과제가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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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이데아를 탄생시킨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인생은 선물이라는 진리와 모든 것은 실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데아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 밖에는 없으며, 자기 자신과 연결된 모든 것은 실처럼 팽팽한 균형을 잡고 나아간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일상의 소중함과 자유를 깨달은 삶을 살 수 있다. 상처와 상실에서 치유와 소속감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작가는 이토록 현학적이고 은유적으로 작품에 드러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이 작가가 만든 이데아고, 나는 독자로서 『기사단장 죽이기』를 넘어 나의 새로운 이데아를 실현할 용기와 현재를 생생하게 살아갈 힘을 통해 나만의 이데아를 탄생시켜 나가야 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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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점도 있었다.

방울이나 펭귄 인형, 사시미칼이 사라지고 제자리에 나타난 개연성이 부족했다. 은유적 효과를 위한 장치일 수도 있겠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해석해야 할 양이 늘어나기 때문에 논리성에서 결핍을 느꼈다.

기사단장의 등장과 그림이 재현되어야만 하는 개연성도 명확하지는 않았다. 이데아로 설명하며 스윽 넘어간 것은 작가의 필력에 기댄 채 끝났다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작품에서 기사단장은 그림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 잠재된 미해결 감정과 고통을 형상화하고 있다. 기사단장의 등장과 그림의 재현이 ‘나’가 그림자를 마주하기 위한 내적 의식을 상징하기 때문에 상징적 장치가 아닌 서사의 내적 필연으로 개연성을 이어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소설들보다는 에세이를 더 좋아한다. 에세이에서 보여준 유머와 문장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나’는 서른여섯 살이지만 왠지 멘시키보다(54세) 더 노인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젊은 무라카미 하루키 같달까.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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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연재 – 영화 《브루탈리스트》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