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 리뷰 | 카이 버드&마틴 셔윈 지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를 보기 전 원작을 읽고 싶었다. 2010년에 출간된 책인데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오펜하이머의 다른 평전이나 전기들은 읽어 보지 않았지만, 이 책은 제목부터 확실한 상징을 가지고 있다. 두 명의 저자는 오펜하이머의 1954년 청문회를 중요하게 다룬다. 청문회를 향해 가는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어린 시절부터 죽음까지 연결시킨다.
어린 시절 오펜하이머의 삶이 청문회 때 어떻게 작용하는지, 대학 시절의 삶, 대학원 시절의 삶, 여성과의 관계, 결혼 등이 그의 청문회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하나의 실로 연결하고 있다.
그래서 소설이 아닌데도 긴장감이 생겨서 금방 읽었다. 한 호흡에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어서 4일이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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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삶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토지』를 읽어야 하는 것처럼 1920년~1960년까지 미국과 세계 정세, 특히 과학(물리학)을 알고 싶다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읽으면 된다.
『토지』가 서희라는 양반집 여성의 삶을 통해 일제강점기를 심도 있게 그린 소설이라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실존 인물인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삶을 통해 20세기의 명암을 자세히 보여준다. 하지만 이 책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이 책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과 철학적 고민을 안겨준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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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게 된 이유는 물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 때문이다. 그리고 독서를 하면서 저자들이 오펜하이머의 삶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사상과 심리, 행동까지 연결해서 청문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구성이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의 ‘유년기, 청년기, 전성기, 청문회, 말년’이 중심 구조다. 저자들은 이 생애의 흐름을 ‘청문회’라는 무대로 집약한다.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소설이나 영화처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책의 저자들과 다른 시각으로 오펜하이머를 영화 속에 그려낼 것이라고 믿는다. 무엇보다 킬리언 머피의 연기가 기대된다는 점도 이 영화를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다. 원작과 영화의 내용을 비교하면 흥미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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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여기에 요약하는 건 글만 길어지고 의미가 없을 듯하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상징하는 바와 이 책을 통해 고민해야 하는 철학적 질문들을 톺아보고 싶다.
프로메테우스가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신들의 눈을 피해 인간에게 불을 선물한 프로메테우스는 그 벌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는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을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되는 벌을 받게 된다. 오펜하이머는 핵무기를 만든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당시 정부와 대립한다. 프로메테우스와 오펜하이머는 불과 핵이라는 양면의 칼을 인류에 등장시켰다. 불과 핵은 일장일단이 있다. 하지만 잘못 사용할 확률이 높다.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 과정을 살펴봤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본다면 더더욱)
프로메테우스가 받은 형벌이나 오펜하이머가 받은 유죄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저자들은 생각하는 듯하다. 우리나라에는 오펜하이머 같은 희생자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분노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으로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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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는 오펜하이머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펜하이머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남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핵무기를 만든 이후의 삶이 그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게 하는지 결정했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는 혼자 과학적 이론을 증명하기 힘들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이다. 인문학은 혼자서 연구할 수 있는 요소들이 꽤 있다. 하지만 과학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국가(당시 미국은 강력한 군부가 되겠다.)가 지원한 핵무기 사업을 비판하기 시작한 오펜하이머를 국가는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사회는 자본이 과학자들을 지원하기 때문에 과학자가 자본가를 비판하기 힘들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자본이 인간성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인본주의를 앞세우며 나타났던 르네상스 때 과학이 급격하게 지원을 받았는데, 이제 과학은 자본에 묶이게 되었다. 그건 예술도 마찬가지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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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 실험에 성공한 후 실험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고 했을 때, 모든 것을 투명하게 해야 한다고 했을 때 국가(미국)는(은) 반대했다. 동시에 매카시즘이 불어닥쳤다.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유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나치를 몰아내고 미국 젊은이들의 생명이 희생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이미 패색이 짙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투하했다. 그들은 군수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을 선정했고 민간인을 살상했다. 그리고 그곳에 군수 노동자로 있었던 사람은 일본인들이 아니라 조선인이 더 많았다.
따라서 핵무기가 조선을 해방시킨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일본은 핵무기가 아니어도 세계 흐름상 이미 패망하게 되어 있었다. 물론 조선에 대한 이야기는 나올 수 없다. 그들도 제국주의 국가였으니까. 나는 다른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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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는 ‘인간성 없는 과학’을 일곱 가지 악덕에 포함시켰다. 오펜하이머는 인간성 없는 핵무기 사용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다. 자신의 권력과 힘을 사용해 막으려고 했다. (이 책에는 오펜하이머가 권력에 취해 있었다는 표현으로 나온다.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의 발언권 자유를 위해서도 싸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가나 자본 없이 연구하기 어려운 과학자들이 자유로운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면 그들은 노예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면 인간성 없는 과학이 되어 악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자본에는 인간성이 없기 때문이다.
과학자와 정부 부처들은 과학이 인간성을 잃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과학이 죄가 되는 순간이 드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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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적이고 과잉보호를 받으며 모순적인 성격을 가진 어린아이가 사회성이 없는 대학 생활을 지나며 세상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촉망받는 젊은 물리학자를 지나 맨해튼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그는 카리스마와 온화함을 겸비한 지도자로 태어나고 행정가의 역할을 매력적으로 해내며 정치적 인물이 되어 간다. 청문회 이후에는 철학자의 역할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오펜하이머는 다재다능해서 행운과 불행을 동시에 경험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을 겪었고, 유럽에는 히틀러가 등장해 전쟁이 일어나고 공산주의가 등장하면서 세계사는 폭풍처럼 흘러갔다. 오펜하이머는 그 시대의 중심을 살게 되었다. 전쟁 속에서 과학의 발달은 필연적인 부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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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은 매카시즘이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대통령도 매카시 의원을 막을 수 없었던 시절이라고 했다. 하지만 젊은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는 그런 미국을 걱정했을 것이고 그 중심에 오펜하이머가 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그 시절에 출간되었고 엄청난 인기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시인 로버트 로월은 당시 미국을 “진정제를 맞은 50년대”라고 불렀다. 안정과 평화를 바라던 미국 시민들은 침묵했다. 그런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진정제를 맞은 미국 사회는 오펜하이머를 ‘제2의 갈릴레이 갈릴레오’처럼 만들어버렸다. 이 모습은 한국의 70~80년대 모습과 비슷하다. 물론 현재도 종북이나 빨갱이가 통하고 있기는 하지만 상당 부분 진정제를 거부하고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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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리석고 실수하고 관계에 서툴다. 미성숙하고 열등감에 휩싸여 타인을 공격하는 존재 또한 인간이다. 스트라우스 때문에(덕분에?) 오펜하이머는 과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유명 인사가 되었고, 지금까지 그의 책임감과 인간성이 주목을 받고 있으며 그는 살아 있다. 역사는 프로메테우스와 오펜하이머를 인류의 편으로 남게 했고 기억하게 했고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 숨 쉬게 했다. 반면 스트라우스는 매카시와 함께 역사의 심판을 끊임없이 받게 되었다.
인간은 미숙한 존재다. 신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 내린 결정이 역사에서 악덕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고민하고 성찰하고 소중한 인문학적 가치를 가슴에 품고 물질을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물질과 이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과학만 옳은 것도 아니고 인문학만 옳은 것도 아니다. 옳고 그름은 시대마다 달라진다. 물질이 존재한다면 보이지 않는 세계도 존재할 것이다. 인간의 시각은 왜곡과 착각의 산물을 많이 본다. 그러니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에 더해 현재 인간이 저지르고 있는 행동들을 멈추고 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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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없이는 의미 있는 책임감도 있을 수 없지요. 우리는 스스로 행하는 행동에 대해서만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지식, 부, 여가는 모두 우리가 책임감을 가져야만 하는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책임감에 관한 한, 우리는 기아선상에 놓인 사람들의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나는 이 말이 오펜하이머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남기는 유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가 끼치는 고통에 무관심한 것은……끔찍하고 영구적인 형태의 잔인함이라는 것이다. 무관심하기는커녕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타인들에게 끼친 고통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라고 썼다. 나는 우리가 하는 행동이 타인에게 끼치게 될 영향을 고려하는 성찰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오펜하이머의 동생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인류가 가진 지식은 소수의 이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권력과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라는 평등주의 사상에 기반한 것이다.”
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말들이 가슴으로 들어와 박혔다.
“당신은 내가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자문 위원회에서 사임함으로써 고발 내용의 본격적인 조사를 피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그 선택은 내가 지난 12년 동안 맡아 왔던 각종 공직을 수행하기에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나를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토록 하찮은 사람이었다면, 나는 내가 했던 것처럼 조국에 봉사할 수 없었을 것이고,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소장직도 맡지 못했을 것이며, 그동안 여러 차례 그러했듯이 과학과 조국의 이름으로 발언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청문회에 참석할 것을 결심한 오펜하이머가 스트라우스에게 보낸 글이다. 오펜하이머는 청문회가 자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는 질 줄 알고도 끝까지 싸우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 이후 자신의 고통까지 받아들였고 감당했으며 책임졌다. 이 책의 마지막 사진과 함께 나를 한동안 잡아두었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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