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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23. 2020

박영순, 5.18 마지막 방송 진행자

1980년 5월, 그때 그 사람들

박영순


1. 평범했던 삶을 뒤흔든 '그날'


 1980년 5월 '그날' 이전까지 박영순은 광주의 다른 모든 시민들과 동일하게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살아왔다. 그해, 박영순은 송원대학교 유아교육과에 다니던 대학생이었다. 유아교육과라는 전공에 걸맞게 그의 꿈은 교사였다. 박영순은 대학 수업이 없는 날이면 특기적성 교사로서 고등학생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쳤다. 당시 예체능을 선택한 호남 지역 고등학생들의 목표는 매년 5월에 열리는 호남예술제에서 입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해에는 정치 상황이 급변해 호남예술제가 무기한 연기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연습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그날'도 박영순은 오전 10시부터 전남여고 학생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쳤다. 아름다운 선율이 교정에 울려 퍼졌다. 한동안 이어진 연습이 끝나고, 학생들이 영순에게 말했다.


 "선생님 오늘은 오후에 차가 끊기니까 연습을 조금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에 영순은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남겨진 가야금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가야금은 연주 후에 반드시 손질을 해주어야 하는 악기다. 가야금 손질은 점심 무렵 끝이 났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전남여고는 구 전남도청 바로 옆에 위치했다. 그날 박영순이 학교를 빠져나온 시각은 아마 오후 1시 전후였을 것이다. 그가 학교를 나와 노동청 앞 도로를 건너는데, 느닷없이 총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큰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박영순은 노동청 건물에 몸을 기댄 채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50m 앞에 학생 한 명이 쓰러져있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학생의 다리에 새빨간 피가 고여있었다. 주변 시민들이 학생을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박영순은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고, 이내 그날 그 도시의 여느 시민들이 그러했듯,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트럭에 스피커를 부착해온 시민군이 박영순에게 가두방송을 진행해달라고 부탁했다. 박영순은 '그날'부터 5·18 기간 내내 가두방송을 했다. 역사는 개인들의 삶을 집어삼킬 듯 밀려와 행동을 요구했다.


 '그날'은 1980년 5월 21일이었다.


2. 도청을 지킨 마지막 새벽 방송


 그날 이후, 박영순은 매일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며 가두방송을 진행했다. 당시 광주에는 가두방송을 진행하는 차량이 여럿 있었다. 당시 방송 진행자로는 박영순, 전옥주, 차명숙 등이 알려져 있다. 집단발포 직후에는 주로 헌혈을 호소하는 방송이 진행되었다. "광주 시민 여러분 피가 부족합니다. 병원으로 오셔서 헌혈에 동참해주세요!"와 같은 내용이었다. 헌혈 방송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이후에는 '소수 군부의 반인륜적 학살'을 규탄하며 광주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방송을 했다. 트럭을 운전했던 시민이 매일 박영순을 집에 데려다주었고, 아침 일찍 데리러 왔다.


 1980년 5월 26일, 그날도 박영순은 트럭에서 가두방송을 했다. 오후가 되자 모든 차량들이 속속 전남도청으로 모여들었다. 곧 다음날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진입하다는 발표가 있었다. 많은 시민들이 고민에 빠졌다. 도청에 남는 것은 선명한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영순은 도청에 남았다. 5월 21일 노동청 앞에서 보았던 학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날 도청에 남은 시민들은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곧 새벽이 찾아왔다. 박영순은 도청 1층 방송실에 있었다. 그곳에는 다른 대학생 2명이 함께였다. 세 사람은 삶은 계란을 나누어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 땅의 역사에서 가장 긴 밤이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3시, 방송실 문이 덜컥 열렸다. 도청항쟁지도부의 김종배가 찾아왔다. 그는 박영순에게 "마지막으로 방송을 진행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곳에 있던 대학생 중 1명이 충장로에서 DJ로 일했던 경험이 있어 도청 방송실에 있는 스피커 사용을 준비했다. 5·18 당시 마지막 방송에 쓰인 스피커는 전남도청 본청에서 동서남북을 향해 설치되어 있던 대형 스피커 4개였다. 마이크를 잡은 박영순이 5·18 마지막 방송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도청 안에 있는 시민 학생들이 죽어갑니다. 광주시민 여러분이 나오셔서 학생들을 살려주세요. 광주시민 여러분.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광주 시민들에게 마지막 방송의 애절한 호소는 극한의 슬픔으로 남았다. 방송은 광주 전역에 울려 퍼졌다. 새벽 3시라는 적막의 시간, 민방위 훈련 때 사용하는 대형 스피커, 그리고 모든 시민들이 함께 겪었던 5월 항쟁의 경험. 이것들은 방송을 들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참지 못하도록 했다. 잠들 수 없는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던 시민들은 그저 방송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방송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설처럼 널리 알려졌다. 몇몇 시민들은 도청 스피커를 활용하여 방송을 진행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5.18 직후 광주에 "한 여성이 트럭을 타고 다니며 밤새 방송을 했다. 법원 쪽에서 군인들에게 걸려서 모두 죽었다더라"라는 식의 소문이 확산되었고, 이것이 거의 정설인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이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통해 재생산되기도 했으나, 5·18 마지막 방송은 도청 1층 방송실에서 진행되었다.


3. 30년간 이어진 고난의 시절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마지막 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이양현 기획위원이 도청 전기를 내렸다. 모든 불이 꺼졌다. 도청은 이미 계엄군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불이 꺼진 직후 3공수여단 군인들이 후문을 통해 도청으로 진입했다. 그들은 가장 먼저 방송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방송실에 있던 박영순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바닥에 엎드리자 그 위로 무수한 총탄들이 날아들었다. 너무 큰 소리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박영순이 큰 소리로 "여학생이에요. 살려주세요"라고 외치자 발포를 멈춘 군인이 기어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문쪽으로 기어 나온 박영순을 개머리판과 군홧발로 쉴 새 없이 때렸다. 머리를 너무 많이 맞아 의식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도청 앞으로 끌려 나온 후 정신을 차리자 군인들이 총을 앞으로 내밀며 체포된 사람들에게 물었다.


 "어떤 년이 방송했어. 옷을 벗겨서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린다" 


 박영순은 그 말을 듣고 다시 기절했다. 그는 이후 어떤 과정을 통해 상무대까지 끌려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총을 내밀며 군인이 했던 그 말을, 박영순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상무대로 끌려간 박영순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때리고, 밟고, 각목을 다리에 끼워서 때리고, 물고문을 하고, 거꾸로 매단 채로 얼굴에 고춧가루 섞인 물을 뿌렸다. 5·18 당시 상황을 계속 쓰게 하고 조금이라도 틀리면 이와 같은 고문이 반복되었다. 수사관은 매일 사형시키겠다고 위협했다. 한 달이 지나자, 건강이 악화되어 식사조차 할 수 없었다. 박영순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건강 악화에 따른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가족들은 그가 죽은 줄 알았다. 아무런 연락도 없었기 때문이다. 박영순은 시신을 찾기 위해 망월동을 헤매고 있던 가족들과 재회했다. 그날 이후 트라우마가 그를 괴롭혔다. 그래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숨어 살았다. 그는 얼마 후 대학 시절 알고 지냈던 남성과 재회했고, 바로 그와 결혼하여 광주를 떠났다. 이후에도 시아버지가 매일 병원에 데려가야 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았다.


 그날 이후 5월 광주를 지켰던 많은 사람들이 그 후유증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단식으로 총상으로 자상으로 자살로 알코올 중독으로 PTSD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제명을 다하지 못했다. 박영순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그날 겪었던 일들을 증언할 수 있었다. 2015년 6월, 박영순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광주로 돌아온 박영순은 지금도 평범한 시민으로서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 글이 쓰이기까지.

 지난 2016년, 5·18 당사자분들의 생생한 증언을 전하는 팟캐스트 방송 '오.광.팟 (오늘의 광주 팟캐스트)'이 송출되었다. 방송 진행자로는 필자와 함께 안종철 전 5·18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단장과 5·18 당시 전남대 학생운동가 지병주 선생이 참여했다. 당시 방송은 20회까지 진행되었으며, 정현애(5.18 당시 녹두서점 활동), 안성례(5·18 당시 기독병원 간호감독), 박남선(5·18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 전용호('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저자), 박영순(5·18 마지막 방송 진행자), 이윤정(5·18 당시 YWCA 간사), 김태찬(시민군 기동타격대 7조 조장) 등이 출연자로 참여하여 5·18 당시 직접 겪었던 생생한 경험들을 증언했다.


 얼마 전, 필자는 다시 한번 해당 방송들을 청취해봤다. 당사자분들의 살아있는 증언에는 여전히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러나 4년이라는 시간과 '음성 매체'라는 한계가 맞물려, 이제는 해당 방송에 접근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에 필자는 방송 내용을 '텍스트'로 옮기는 작업을 통해 구글링만으로 그분들의 증언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이 자리를 통해 오.광.팟 진행에 도움을 주신 여러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특히 출연자 섭외에 힘쓰셨던 존경하는 안종철 박사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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