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11일 호남신학대학교에서 한 목회자를 순직자로 인정하고 추모하는 예배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문용동,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던 목회자였다. 그는 잘 알려진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이름 없이 죽어갔다. 무엇이 신학대학 4학년으로 졸업을 앞두고 있던 청년을 죽게 했을까?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새벽 권력에 눈이 먼 소수 군부는 기어코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그 직후 전국 각지에 군대가 파견됐다. 광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인들은 전남대와 조선대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구타하고 운동장으로 끌어내 기합을 줬다. 이날 오전 9시에는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들과 군인들의 충돌이 있었다. 학생들이 군인들의 곤봉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도저히 정문을 돌파할 수 없었던 학생들은 금남로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그 시각 문용동 전도사는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 누구도 '피의 일요일'이 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문용동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계엄군이 사람들을 구타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군인들이 학생들을 때리자 한 노인이 군인을 만류했다. 군인은 그 노인도 주저 없이 때렸다. 문용동은 함께 매를 맞고 다친 분을 병원에 데려다 드렸다. 그리고 으레 그날의 광주시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위에 합류했다.
군인들의 무차별적인 폭력을 마주한 시민들은 분노했다. 5월 19일부터 시위는 급속도로 확대되기 시작한다. 5월 20일이 되자 십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이날 밤, 계엄군이 광주역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시민들은 어젯밤 계엄군의 발포에 의해 희생된 두 사람의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모였다. 동료시민이 군인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은 더 많은 시민들을 거리로 이끌어냈다.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이 거리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시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그들은 그제야 일시적으로 광주를 빠져나갔고 광주는 해방 상태를 맞는다. 문용동 역시 여느 광주시민들처럼 매일 시위에 나왔었다. 그는 다음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합류한다.
당시 그의 심정은 그가 쓴 일기에 고스란히 담겼다.
고 문용동 전도사
"1980년 5월 22일 목요일
이 엄청난 피의 대가는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가. 도청 앞 분수대 위의 시체 서른두 구.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가한 그네들.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악한 명령을 내린 장본인,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
문용동은 5월 22일부터 도청 지하의 무기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그는 무기고를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도청 지하 무기고에 무서운 폭발력을 지닌 'TNT'가 쌓여있었다. 만약 이 TNT가 폭발하게 된다면, 전남도청을 비롯한 광주시내 일대는 완전히 소멸해버릴 수도 있었다. 그것은 또한 수많은 생명의 상실을 의미했다. 그는 결단을 해야만 했다.
5월 23일 문용동은 TNT 하나를 챙겨 군인들을 만났다. 그는 이를 근거로 전교사 김기석 부사령관에게 도청 지하에 있는 TNT를 제거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문용동은 5월 25일 탄약 전문가 배승일과 함께 도청에 잠입하여 뇌관을 전부 제거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전남도청 지하에 있던 TNT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배승일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이들이 해체한 TNT 뇌관은 2,10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안기부 측 기록도 비슷하다. 그러나 사건 당시 검찰 측 기록에 따르면 도청 지하의 TNT는 10여 상자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어느 쪽 주장을 따르건, 도청 지하에 상당한 양의 폭약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5.18로부터 불과 3년 전인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가 있었다. 화약을 싣고 가던 열차가 이리역(현 전라북도 익산역)에서 폭발한 것이다. 이 사건 사상자는 무려 1,158명(사망자 59명)에 달했다. 이리역 사건 당시의 폭발 규모는 폭약 약 40톤 규모로 추정된다. 불과 3년 전 이와 같은 참사가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인명 피해를 막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이것은 5.18 항쟁을 완성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 만약 5월 항쟁의 결말이 TNT 폭발로 인한 모든 것의 소멸이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5.18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민들의 눈물겨운 최후의 항전은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지 모른다. 문용동이 있어 광주는 더 빛날 수 있었다.
문용동은 뇌관 제거 작업 후에도 최후까지 항쟁에 참여했다. 그와 함께 뇌관을 제거한 작업한 사람들은 그를 만류했지만, 문용동은 그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5월 27일 새벽의 도청에 남았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문용동은 뜬 눈으로 도청의 밤을 보냈다. 새벽 4시 도청항쟁지도부 이양현 기획위원이 도청의 전기를 내리자 총소리가 밤의 적막을 깨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총칼을 앞세워 도청으로 난입했다. 문용동은 가슴에 총탄을 3발이나 맞고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스스로를 온전히 바쳤다. 이것은 사랑이었고 또한 기적이었다. 그 누구도 쉽게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용동은 죽음 이후 상당히 엇갈린 평가를 받아왔다. 군부는 문용동을 '부화 뇌동자'로 기록했다. 자신들의 작전에 참여한 요원에 불과하다는 서술이었다. 일부 시민들 역시 그의 TNT 제거를 납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점차 그가 많은 시민들의 생명을 지켰으며 그로 인해 항쟁이 최악의 결말로 치닫지 않을 수 있었다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특히 뇌관 제거 후에도 도청에 끝까지 남아 죽음으로써 항쟁을 완성한 그는 5.18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2020년 현재 문용동은 국립 5·18 민주묘역에 잠들어 있다.
2017년 5월 11일 문용동은 순직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의 순교 인정은 아직 과제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그의 순교는 반드시 인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