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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n Oct 05. 2018

여행의 목적

새로움을 찾아 떠나는 일상 이동

어떤 사람이 여행을 시작했다.

그 사람이 잠시 머물던 곳은 문명이 되었고,

길을 잃었던 곳은 신대륙이 되었고,

갈림길의 초입에서 지도를 펴보니

2017년 오늘이었다.


꽤나 거창하지만, 인류는 여행 중이다.

어제도 오늘도 우리는

제각각의 지도를 들고 부지런히 모험한다.


그런데 대체 무얼 찾아 나서는 걸까?






역마살[驛馬煞]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에게 역마(사람과 물자 수송을 위해 기르는 말)의 나쁜 기운이 씌웠다는 의미인데, 한 자리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사람에게 사용하는 부정적인 표현이다. ‘이동성’은 다리 달린 동물 모두가 가진 본성이자 능력인데, 과거에는 ‘자유로운 영혼’을 오히려 해악으로 삼았던 걸까.

주관적인 느낌인지 모르겠으나 ‘터줏대감’, ‘토박이’라는 단어와 ‘뜨내기’라는 단어에서는 그 의미 차이 못지않게 긍정과 부정의 뉘앙스 차이도 느껴진다. 그 정서적 차이를 추측해 보건대, 우리는 ‘정착을 매우 중시한 민족’인 것 같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2016년 해외여행을 떠난 국내 여행자 수는 2,200만 명으로, 지난 한 해 동안 국민 5명 중 2명이 해외여행을 다녀온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국내 출입국자 수를 집계하기 시작한 1975년 이래 가장 큰 규모이자, 최근 10년 전에 비해서도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라고 한다. 여행 인구의 증가는 비단 해외여행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2016년 제주 공항을 이용한 여행자 수는 2,900만 명으로 전년 대비 13%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제주 공항 이용자 수는 최근 5년간 통계만 봐도 매년 10% 이상 증가하는 추세이다.

국민의 절반이 여행하는 시대라니. 어느 날 문득 ‘정착 문화’에 갑갑함이라도 느껴진 걸까?


국내 여행 출국자 수의 변화  <한국관광공사 출국통계, 2016>



우리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여행은 여름철 휴가 시즌에 집중된 것 같다. 조금 이르게는 옷차림이 가벼워지는 늦봄부터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가을까지, 전국의 산과 바다에는 수학여행과 대학 MT와 휴가를 맞은 수많은 인파가 몰리지 않는가.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나, 여행자를 맞이하는 사람이나 이 한 시즌을 위해 일 년을 기다리고 준비한다고 생각했다.


국내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추이를 분석한 빅데이터 자료에 의하면, 일 평균 기온이 20도가 되는 5월 중순부터 여름 휴가와 관련된 검색어가 본격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여름 휴가를 떠올리고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우리의 심리 장치가 체감온도와 연결되어 있던 것이다. 흥미로운 이 내용은 사실, 5년 전에 들은 이야기이다.


돌이켜보면, 그 5년 사이에 우리는 휴가 시즌의 구분이 점차 무색해지는 변화를 겪고 있다. 한국관광공사 자료에 의하면, 2013년 이후로 1월의 해외 여행인구가 전통적 성수기인 8월의 여행 인구를 앞섰다. (2008년을 제외하고 매년 8월은 연중 가장 많은 여행자 규모를 기록해왔다) 월별 여행 인구 분포 또한 과거에 비해 균등해졌는데, 이를 해석해보면, 우리는 더이상 성수기에만 여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성수기와 비수기의 경계 자체가 모호해졌다고 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대한항공은 ‘당신에게 주어진 118개의 휴일’을 컨셉으로 마케팅을 진행했다. 직장인의 휴가 구상이 빨간 날을 기준으로 세워진다고 할 때, 이 아이디어는 꽤 유익하고 '적절'하다.


여행 인구가 증가했다거나 여행 행태가 변화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이미 많은 매체를 통해 익숙해지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으로 국제 유가 하락이나 저가 항공사 간의 경쟁을 언급하기도 하고, 환율이나 소비자 물가 차이를 그 요인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외부 환경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결국은 우리 스스로가 여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 변화가 생겼다고 하고 싶다. 각자가 체감하는 ‘여행의 기회비용’이나, ‘여행의 접근장벽’이 낮아졌다고 할 수도 있고, ‘여행 욕구’나 ‘여행의 경험 가치’가 증가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행, 새로운 경험의 의미


SNS에는 연중 쉬지 않고 세계 곳곳의 여행 사진들이 올라온다. 부러움을 견뎌내기에 힘들었던- 지인 한 명의 여행이 이제야 끝나가나 싶더니, 다른 한 친구가 바통을 이어받고 비행기 창문 너머의 하늘 사진을 보내온다. 이렇게 빈틈없이 누군가를 부러워할 수도 있는 걸까.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와 같은 드라마틱한 슬로건보다, 무심한 듯 찍어 올린 보딩패스 사진 몇 장이 가슴에 더 깊게 파고 들어온다. 딱히 여행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당장 여행을 떠날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도 이런 사진 몇 장은 파급력이 상당해 보인다. 그러니 주변 누군가가 뜬금없이 여행 적금을 든다거나 항공권 가격 비교를 시작했다면 한 번쯤 물어보자. 왜 갑자기 여행 타령이냐고.


언젠가는 인스타그램이 여행 상품을 출시할지도 모른다. <인스타그램>


SNS에서 본 누군가의 ‘여행 경험’은 또 다른 사람의 ‘여행 욕구’로 쉽게 전이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영향이 실제 소비로까지 이어지는 이유는 우리가 여행을 구매하는 방식이 변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관적 경험과 가치를 중시하는 최근의 소비자들은 여행사가 재단해 놓은 일정표, 상품 가격표대로 여행을 구매하는 대신,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흩어진 정보를 찾고 조합한 뒤 구매하고 있다.


여행을 구매하는 방식의 변화는, 정보의 접근 장벽을 낮춰준 인터넷의 수훈이 가장 크기도 하지만, 소비자들 스스로가 부지런히 정보를 공유하고 생산한 덕택이기도 하다. 소비자들이 곳곳에 펼쳐놓은 ‘수평적 정보’들이 일상에서 여행을 구매하는 과정 -정보를 수집하고, 분별하고, 선택하는 일련의 소비 과정-을 선형적 프로세스에서 입체적 프로세스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는 ATL, BTL 접점에 의존했던 여행사들의 마케팅이 한계를 맞은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이러한 변화는 소비자 경험 차원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본인 스스로가 여행의 ‘설계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스스로 설계한 ‘여행의 경험’은 기존과는 다른 만족감과 몰입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과거에 비해 더 많은 사람들이 여행한다고 하지만, 또 조금 더 쉽게 여행을 떠난다고 하지만, 여행 자체가 누구에게나 동일한 기회비용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짧은 여행일지라도, 누군가에겐 오랫동안 꿈꿔온 시간일 수도, 많은 노력 끝에 얻어낸 값비싼 기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여행이 결코 같지 않고, 각각의 여행은 서로에게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그래서 각자의 여행은 각자의 ‘Personality’ (침해불가능한 대상 -최저가보다 조금 비싼 항공권을 구매했다고 해서, 늦잠을 자느라 꼭 들러야 할 명소를 놓쳤다고 해서 그 누구도 여행을 실패로 평가하지 않는-)를 갖는다.



여행은 자신의 호기심을 최대로 반영하는 ‘경험 창작 행위’이다.





여행, 새로운 경험의 깊이


오늘도 수많은 ‘경험설계자’들이 새로운 목적지를 찾아 짐을 꾸리고 있다. 누군가는 지구 반대편 미지의 장소로 여행하고, 누군가는 옆 도시의 숨겨진 시간으로 여행하려 한다. 여행자들이 쌓아 올린 경험의 총량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어제보다 더 커져 버렸다.

이 시대의 인류는 분명 가장 넓은 지역에서 여행하고 있지만, 최근의 여행 트렌드는 아무래도 ‘경험의 깊이’가 아닐까 싶다. 여기에 여행의 ‘경험 깊이’를 한층 더 두툼하게 만들어 주는 몇가지 인사이트를 소개한다.


첫 번째 사례는 에어비앤비이다. 일반 가정의 잉여 공간을 숙박 비즈니스로 연결한 에어비앤비는, 최근 현지인과 함께하는 일상이라는 개념의 새로운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트립’이라는 이름의 이 프로그램은, Cooking, Dancing, Biking 등 다양한 활동 테마를 가진 호스트가 여행자를 대상으로 운영하는 참여형 프로그램이다. 우리나라의 오프라인 소셜라이징 서비스 ‘집밥’과 비슷한 형태이지만, ‘트립’은 여행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과 현지인의 일상을 콘텐츠로 활용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여행은 살아보는 것’이라는 모토를 내세웠던 그간의 브랜드 메시지처럼, ‘트립’ 또한 현지인의 일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기존의 여행자에게 허용된 ‘여행자의 경험 문턱’을 자연스럽게 넘어서도록 한다는 점에서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론칭 초기이지만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기엔 성공한 것 같다. 테마를 가진 액티비티가 주를 이루며, 네트워킹의 기회 또한 강조하고 있다. <에어비앤비의 ‘트립’ 서비스>


두 번째 사례는 여행하는 숟가락*이다. 에어비앤비에 비해 조금 생소한 이 기업은, 여행자들이 세계 곳곳의 현지인으로부터 직접 요리를 배울 수 있는 수업을 제공하고 있다. 이미 20개국, 47개 도시에서 요리 수업이 운영되고 있으며, 주부와 함께 시장을 돌며 식재료를 구하고, 함께 요리하는 코스부터 ‘집밥’을 함께 먹는 코스까지 선택 가능하다. 식문화는 여행 경험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만국 공통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현지 음식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인 경험으로 다가오며, 음식이라는 테마로 여행의 경험이 확장된다는 데에서도 좋은 의미로 다가온다.


새로운 식문화를 경험하는 것 또한, 여행의 백미(白眉)이다. <여행하는 숟가락 Traveling Spoon>


이들 사례가 제공하는 새로운 여행 경험은, 우리가 겪어왔던 일반적인 여행 경험 (랜드마크 위주의 투어나 단발적인 콘텐츠 체험)과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 여행자의 경험 범위가 ‘현지인의 일상’으로 확장된다는 점과 여행자가 이 서비스들의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이 여행자의 ‘경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콘텐츠는 -천혜의 자연경관도, 건축 유산도, 특산품도 아닌- ‘당신이 경험하지 않았던 새로운 일상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여행, 새로운 경험의 소비


우리나라의 많은 도시들이 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모든 도시들이 각자의 특색을 강조하며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생산해 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들도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의문을 제기하곤 한다. 동일한 관점이라면, 우리나라 대부분의 도시는 좋은 여행지로서의 경쟁력이 없다. 그곳에는 모두 비슷한 풍경과 특별할 것 없는 콘텐츠만 눈에 띌 뿐이다.

우리는 똑같은 관점으로 여행을 바라보고 있다.


여행자는 모든 낯섦을 새로움으로 소비하고자 한다. 그들에겐 모든 여행지가 ‘새로운 경험의 소비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도시건 여행지로서의 매력이 부족한 이유, 여행지로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이유를 부족한 볼거리 탓으로도, 특색있는 문화가 없는 탓으로도 돌리지 않았으면 한다.

경험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여행의 장소가 된다.

새로움을 탐색하는 모든 여행자들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새로운 일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그들을 환영하는 눈과 귀와 마음을 열어두자.



여행의 진정한 목적은 낯선 풍경을 눈에 담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매몰되어 무뎌진 감각을 깨우는 것이다.



'여행'이라는 단어는 모두를 설레게 한다.
그 설렘을 간직하고 싶었던, 가까워지고 싶었던 우리는
사진기를 들고, 노트를 들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기도 했었다.
매번 제자리로 돌아와서야 깨닫는다.
모두 담을 수도, 가질 수도 없었으므로 곧 다시 떠나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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