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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May 03. 2024

얼떨결에 대학생

대구에서 , 알고 지내던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녀와 나는 닮은 점이 많다. 아이이 엄마이자 주부이고 또한 같은 병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언제나 나보다 훨씬 즐겁고 활기가 다. 그녀는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인정하고 받아들여 집안에 숨지 않고 밖으로 다니며 자신의 꿈을 계속해서 펼친다. 최근 들어서는 매일 볼링장에서 같은 시각장애인들과 선수활동을 하며 오후에는 함께 점심먹으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고 했다.


언니와 통화를 할 때면 과연 시각장애가 정말 나에게 장애가 되는 게 맞는가 싶은 의문이 든다. 언제까지 장애를 핑계로 집안에서 멍하게 있을지 나 자신에게 물어보기도 여러 번... 답은 내 안에 있었다. 내가 나를 장애인이라 생각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길수록 다른 사람도 나를 그렇게만 볼 것이었다. 나를 밖으로 이끌 사람도 바로 나였다.


멈춰버린 시계는 쓸모가 없다. 그러나 건전지만 넣어주면 언제나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을 향해 끊임없이 이동한다. 나에게도 그런 건전지가 필요해졌다.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었다. 동시에 나를 찾고 싶었다. 신체장애는 내가 바꿀 수 없겠지만 마음만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은가. 한 발짝 한 발짝씩 떼다 보면 언젠가는 나를 찾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본다.


스마트폰으로 지역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스포츠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볼링, 쇼다운, 텐덤사이클 등 의외로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는 운동이 많았다. 볼링부터 차례로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지역 형편상 제대로 운영이 되지 않거나 내가 사는 곳과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크고 높은 나무 꼭대기에 있는 탐스런 사과를 어떻게 따야 할지 캄캄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가입했던 인터넷카페에서 사이버대학교 신입생 모집광고를 보았다. 마감까지는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이것이 나에게 찾아온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남편에게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걱정과는 달리 남편은 흔쾌히 서류를 준비해 주고 접수까지 마쳤다. 나는 그렇게 마흔이 넘어 대학생이 되었다.


며칠 전 첫째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는 엄마를 본받을 거야. 엄마는 눈도 안 보이는데 이렇게 공부도 하고 열심히 살잖아."


그동안 나는 결혼을 하고 타지에서 지하철이 없다는 핑계로, 아이들이 어리다는 핑계로, 장애를 핑계로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동안 그 모든 것이 당연해지고 익숙해졌다. 익숙함을 깨고 싶지 않음과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가 아닌 나 자신을 찾고 싶은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이들은 쑥쑥 자랐고 이제 나만큼 키가 컸다. 시계에 종착지가 없듯이 나에게도 종착지는 없다.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그 자체만으로도 시계의 역할은 충분하다. 영원히 멈추지 않는 시계를 꿈꾸며 나는 오늘도 강의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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