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승의 《아무튼, 연필》
책을 읽을 때, 연필을 쓰는 편이다. 평소의 습관대로 연필을 쥐었을 뿐인데 《아무튼, 연필》이 앞에 놓여있으니, 의식한 것 같아 멋쩍었다. 연필은 책에 밑줄을 치고 감상을 적기에 제격인 필기구라 생각한다. 자고로 책이란 것은 쓰는 이의 이야기를 종이에 지워지지 않도록 새긴 것이 아닌가. 그런 책에 감히 또 다른 지워지지 않는 것으로 밑줄을 긋는다는 것이 못내 부적절한 기분이 든다. 밑줄은 그렇다 쳐도, 내 생각을 덧붙이기라도 하면 활자를 침범하지 않고 메모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단 말인가. 행간은 글줄이 잘 읽히도록 도와주는 공간이기에 책의 감상을 적기에는 비좁다. 게다가 고쳐 써야 한다면? 포토샵에서 이미지를 만들 때, 언제든 편집이 쉽도록 레이어 작업이 필요하듯 책을 읽을 때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적은 문장도 수정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연필로 쓰면, 수정이 가능한 레이어가 하나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책을 읽을 때 연필이 필요한 이유다.
"아무튼, 연필"을 쥐고 책장을 하나 둘 넘겼다. 으레 누구나 그렇듯 마음이 가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나는 연필에 대한 정보 값이 거의 0에 수렴하기에(연필에 대한 관심보다 김지승의 글이라는 이유로 고른 책이었다.) 새로이 알게 된 연필에 대한 지식은 모조리 밑줄을 치기로 했다. 밑줄을 취소할 여지를 두면서 말이다. 그런 마음으로 연필을 대하는 것을 아는 듯 어느 한 구절이 등장했다.
주로 여성이었던 비서는 연필을 들고 무언가를 '임시로', '예비로' 쓴다. 마지막 결정, 명령, 실행은 대부분 남성 상사의 결재로 이루어지며 공공의 의미 체계를 획득하는 결재란의 그 표식은 연필이 아닌 볼펜이나 만년필로 남겨졌다.
김지승의 《아무튼, 연필》 중에서
언제나 지워지고 대체될 수 있는 연필. 그 처지에 여성의 모습을 겹쳐볼 수 있다는 것을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다. 자율적으로 어느 사안 하나 결정 내릴 수 없고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나타나면 내주어야만 하는 입장. 그것은 연필이지만, 여성이기도 하다. 연필과 여성은 이렇게 연결되고 있었다. (아, 펜슬 스커트는 덤으로.) 반면, 문서의 공적인 효력이 발생하려면 연필이어서는 안 된다. 영구성을 지닌 펜이 필요하며, 어느 상황에서도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대게 그것을 쥐는 자는 남성이다.
지워지지 않는 연필, 그렇지 않은 펜. 이제껏 필기구의 특징에 따라 구분했다고 한다면,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쓰임에 따른 입장을 헤아리게 된 셈이다. 다시, 내 손에 쥐어진 연필을 바라본다. 난 너의 그런 점이 좋아 쓰는 건데... 미처 알지 못해서 미안해. 별안간 연필에게 사과를 하며 동시에 펜을 쓰기를 열망했던 때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남동생만 있는 나는 언니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손위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사촌 중에 오빠도 몇 있었지만, 언니가 아닌 그들은 나의 갈망을 채워줄 수 없었다. 오빠는 오빠였지만, 언니란 말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한 것처럼 언니는 언니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경우가 많았다.
방과 후, 친구가 언니와 놀러 가는 모습을 볼 때면, 어쩐지 쓸쓸했다. 집에 돌아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동생을 기다리는 내 모습과 무척 대조적이었다. 동생의 숙제를 같이 해주고 배가 고프다고 하면 엄마가 미리 만들어놓은 음식을 차려 먹이는 일이 자연스레 일과로 자리 잡았던 그 시절의 나. 가끔 동생이 학교에서 속상한 일이 있어 울고 들어오면 달래주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내 처지가 성가시게 느껴질 때마다 친구의 손을 잡고 하교를 하던 언니의 듬직한 뒷모습이 떠올랐다. 기댈 수 있는 언니란 존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매일 밤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며 잠에 들고는 했다.
내가 아는 언니는 하나같이 멋이 있었다. 그래 봤자 또래이지만, 아무래도 어릴 때는 같은 연배여도 한두 살이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아이들은 금방 자라기 때문에 한 해만 지나도 키가 한 뼘 이상 차이가 나고 쓰는 힘도 다르기 마련이니까. 나보다 훨씬 커 보이는 언니들이 두꺼운 책이 들어있는 가방을 거뜬히 메는 것을 보면 그게 그렇게 대단해 보였다. 어쩌다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 언니들과 마주치는 날이면 내 환상은 더욱 짙어졌다.
교복의 언니를 만난 그날은 샤프심을 사러 동네 문구점을 들린 어느 오후였다. 나름 고학년이 되었다고 연필에서 샤프로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샤프 사용법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자꾸만 심을 부러뜨려 동이 나 버린 것이었다. 필기구가 진열된 한 편에 서서 고심하며 샤프심을 고르고 있는데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교복을 입은 언니가 들어왔다. 문구점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와 근처에 있는 중학교 사이에 있다 보니 교복을 입은 학생을 보는 일이 잦았다. 그 언니는 나와 거리를 두고 펜을 고르고 있었다. 빨간색부터 보라색까지 일곱 빛 무지개 색을 너머 가짓수가 다양한 펜을 하나씩 뽑아 들며 언니는 앞에 붙어 있는 '여기에 써보세요' 종이에 쓱쓱 펜을 그었다. 그것을 몇 번을 반복하더니 언니는 금세 자기의 것을 찾아 계산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언젠가 친구가 자신의 언니는 교과서에 펜으로 필기를 한다며 따라 하다가 선생님께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아마 우리 교실에서 펜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시험지에 채점을 하는 선생님뿐이었을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 시행착오가 많을 초등학생에게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연필을 쓰게 하려는 선생님의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섬세한 생각을 알리가 없는 나는 당당히 펜을 사 가던 교복의 언니를 마냥 동경했다. 나도 어서 교복을 입을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럼 선생님께 혼날 일 없이 펜도 맘껏 쓸 수 있겠지. 펜은 연필과 다르게 색깔 종류도 정말 많던데.(대신 연필은 진하기가 다양하다는 걸 그때는 잘 인지하지 못했다.) 지워지지 않는 문장을 쓰는 것에 어떤 자격과 책임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스스로 원하는 펜을 콕 집어 골라낼 수 있는 언니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연필 뒤꽁무니를 잘근잘근 씹으며 펜을 든 '언니'가 된 내 모습을 상상했다. 어쩌면 필기구는 성별로 구분되기도 하지만, 나이로 상징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펜을 쓰는 언니를 꿈꾸던 그때의 나는 펜을 잘 다루는 어엿한 서른의 중반이 되었다. 책을 읽을 때는 여전히 연필을 쓰지만, 이것은 '특별히' 쓰는 경우에 속한다. '주로' 쓰는 필기구는 역시 펜이다. 회사에서 업무를 볼 때나 간단히 메모를 하거나 친구에게 편지를 쓸 때 그러니까 대부분의 경우, 펜을 집어 든다. 펜을 일상으로 쓰다 보니 자연스레 선호하는 펜이 생겼다. 바로, 연필을 닮은 회색 펜이다. 요즘 애용하는 회색 펜은 스테들러 트리플러스 화인라이너(STAEDTLER triplus fineliner)다. 특정 브랜드의 회색 펜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글씨를 작게 쓰는 버릇이 있어, 그저 잘 번지지 않고 얇게 써지는 회색 펜이면 투정 없이 쓰는 편이다. 회색 펜을 의외로 취급하지 않는 문구점이 많기 때문에 어쩌다 발견하게 되면 되도록 사두려고 한다.
다시 회색 펜을 쓰는 이유로 돌아가 보자. 그러고 보니, 회색 펜을 애용하는 이유가 참 아이러니하다. 연필을 일상적으로 쓰진 않지만, 연필 같은 것을 좋아한다니? 게다가 나는 펜을 제법 잘 쓰는 편이다. 굳이 수정을 할 필요 없이 단번에 깨끗하게 쓴다. 글씨를 잘 쓴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손으로 무언가를 쓰는 것에 무척 자신 있다. 종종 대필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런 내게 연필처럼 지워질 ‘여지’가 있는 필기구가 필요한 이유는 잘못 쓴 문장을 교정하기 위함이 아닌 달라진 내 생각을 언제든 유연하게 반영하기 위해서다.
무엇이든 계획 없이 일을 시작하는 법이 없는 나는 손으로 써서 일정표를 만드는데 익숙하다. 이 습관은 무려 고등학생 때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노트에 달력처럼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한자로 日, 月, 火, 水, 木, 金, 土를 일렬로 쓰고 그 아래 날짜를 일일이 쓴다. 여기까지는 검은색처럼 진한 펜으로 쓴다. 그다음 출전하는 선수는 회색 펜이다. 그 펜으로 해당 일자에 무엇을 할 것인지 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색으로 쓴 일정은 그 계획이 언제든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일을 진행하다 보면 계획대로 풀리지 않다는 것을 이 습관이 생길 때부터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나중에 고려하면 된다고 여겼던 것이 당장 필요할 수 있고, 순서를 바꿔 처리하면 더 수월한 일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고집스럽게 계획대로 할 필요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기 위한 최면 같은 것이다. 회색으로 썼으니, 언제든 바뀔 수 있어!
그렇다면, 수정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바로, 회색 펜으로 쓴 문장 위에 회색보다 진한 색 펜으로 덮어쓰면 된다. 밝은 회색은 진한 색 잉크가 흘러나온 길 아래로 그 존재를 거뜬히 숨길 수 있다.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 아닌 이 행위는 처음에 세운 그 계획이 무용지물은 아니었음을 뜻한다. 의미 있는 고민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두면서 과거보다 나은 현재를 발견했을 때 ‘지금’에 무게를 싣는 것일 뿐이다. 즉, 그 흔적이 지금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마치 지우개로 지워도 남아있는 연필 자국처럼. 연필이든 회색 펜이든 지워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것은 결코 쉽게 사라지는 가벼움이 아니다. 지금을 있게 한 유연함이다. 회색 펜은 연필의 유연함을 꼭 닮았다.
누군가는 연필과 펜 사이에서 내 태도가 모호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연필보다는 펜을 선호하지만, 연필 같은 펜으로 쓰는 것은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 어디선가 둘 다 취하고 싶은 것이냐며 핀잔이 들려오는 것 같다. 듣고 보니 그렇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을까? 연필이 지닌 유연함과 펜이 지닌 대체할 수 없는 힘, 이 두 가지를 모두 갖고 싶다. 한 가지만 택하기에는 둘 다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렇다면, 별 수 없다. 비겁하게 나는 어느 하나 확실하게 취하지 않고 양쪽에 발을 걸쳐놓기로 한다. 더욱 욕심을 내서.
오늘도 어김없이 회색 펜을 쥐어 본다. 돌아오는 일요일에는 독서모임이 있으니, 모임의 멤버와 나누고 싶은 문장을 노트에 써보기로 한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려면 평소보다 더 유연해져야 한다. 상대방과 나의 생각이 잘 어우러질 수 있게. 역시, 회색 펜이 아주 제격이다.
아, 그런데 그날 내가 만났던 교복의 언니는 지금 어떤 펜을 쓰고 있을까? 가끔 연필을 드는 일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