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을 건넨 이에게 보내는 편지

김지승의 《아무튼, 연필》

by 은영

해진 언니에게.


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2년 하고도 반년 전이네요. 그때 언니의 둘째는 아직 뱃속에 있을 때였는데 요즘 인스타그램으로 보며 역시 아이는 금방 자라는구나, 했답니다. 그간 어떻게 지냈어요, 언니?


언니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생각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언니가 선물해주었던 만년필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1년 전부터 친구들과 온실의 시선이라는 이름의 독서모임을 하고 있어요. 매달 한 권의 책을 선정해서 친구들과 함께 읽습니다. 지난달에 제가 고른 책은 김지승 작가의 아무튼, 연필이었어요. 작가가 자신의 최애 필기구인 연필에 대한 애정과 지식을 담은 이 책을 무척 즐겁게 읽었습니다. 친구들에게 특별한 추억과 사연이 있는 필기구가 있다면, 말해보자며 운을 띄웠지요.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는 친구들에게 나누고 싶은 제 이야기가 주저 없이 차올랐습니다. 바로, 언니에게 받은 만년필을 말이에요.


지금은 언니의 반려자인 유선배를 오래전 저의 지인과 함께 언니에게 소개를 했죠. 언니는 저에게 청첩장을 건네던 날, 고맙다며 정성스레 포장을 한 만년필을 주었습니다. 전에는 그런 것을 받아본 적이 없었어요. 내 영문 이름 'Michelle'이 금색의 펜 클립에 새겨진, 와인색 바디의 카베코(Kaweco) 만년필. 길이가 손바닥을 넘지 않아 가지고 다니기에도 무척 편안했습니다. 언니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그 만년필을 쓰라고 했어요. 언니다운 사려 깊음에 그만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해진 언니에게 받은 카베코(Kaweco) 만년필


저는 이 만년필의 처음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무척 고민이 많았어요. 만년필을 건네던 언니의 조심스러운 마음 때문에요. 중요한 일에 쓰라는 언니의 당부는 잉크가 처음으로 흘러나오는 순간을 고심하게 한 겁니다. 그래서 그 처음이 무엇이었냐고요?


언니, 언니가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우리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해요? 언니에게 제가 손글씨로 전한 문장을 기억하나요?



차이를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사랑이란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느끼며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이해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자신과 닮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는 대립하여 살고 있는 사람에게 기쁨의 다리를 건네는 것이 사랑이다.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언니는 제게 결혼식 축사를 부탁하였지요. 어떤 축하의 글을 써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언니가 유선배에게 받은 편지에 적혀있던 니체의 문장이라며 제게 말해준 것이 떠올랐어요. 이 문장이야 말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미래를 약속하는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축사의 끝에 이 문장을 넣었고, 11월의 어느 날 언니와 유선배를 축하하러 온 사람들이 자리한 가운데 두 분을 바라보며 글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혹여나 언니가 눈물을 보일까, 노심초사하며 축사를 읽는 내내 저는 미소를 지어야 했어요. 말미에는 야심 차게 니체의 문장을 읽으며 힐끗 유선배를 보았습니다. 언니에게 선물한 문장을 다시 선물 받은 유선배의 얼굴에는 가벼운 놀라움이 머물다 사라졌습니다. 두 사람이 쓰는 새로운 시작에 제가 함께 할 수 있어 정말 기뻤습니다.


얼마 후, 저는 니체의 문장을 종이에 옮겼습니다. 그 만년필로요. 만년필의 시작은 역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것을 언니에게 건넸고 그 문장은 또 한 번 두 분께 전해졌습니다.


아쉽게도 저는 그 후로 중요한 일을 그다지 만나지 못했습니다. 만년필의 의미를 십분 발휘할 만한 일을요. 처음에는 주변 지인들에게 자랑한답시고 몇 번 들고 다니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애지중지하다 만년필을 쓸만한 일을 계속 거르고야 말았습니다. 그 탓에 만년필을 오래 방치했고, 잉크가 모조리 굳어버렸는지 지금은 필기구로써 전혀 역할을 못하게 되어버렸어요. 참, 바보 같죠?


잉크가 단 한 방울도 새어 나오지 못하는 만년필을 애꿎게 흰 종이에 긁어대면서 언니가 만년필을 건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안목을 키우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중요한 일이 아닐 거라고 넘겨짚어 만년필을 써볼 기회를 놓친 일도 돌이켜 보면 나름 의미 있는 일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고 보니, 중요한 일은 마냥 기다려야 오는 것이 아닌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요, 언니. 만년필을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어요. 만년필을 분리해 미지근한 물에 담가서 말라붙은 잉크가 녹아 나오도록 해두었습니다. 3ml의 주사기에 물을 채워 카트리지와 만년필 닙 곳곳을 청소하며 아주 작은 이물질도 모두 빼놓으려고요. 그리고 원하는 잉크로 충전을 해야겠지요. 이왕이면, 언니가 처음 선물했을 때 주었던 파란색 잉크라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언니가 제게 만년필을 건넨 의미가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될까요? 중요한 일을 놓치지 않고 그렇지 않은 것도 중요하게 만들어가는 제가 될 수 있게 말이에요.


누군가에게 건네받은 무언가가 삶을 대하는데 중요한 태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 가슴 벅찬 일인 것 같습니다. 언니, 저에게 그런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언니의 선물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이제 편지를 마칠까 합니다. 요즘 여름 날씨는 정말 짓궂은 것 같아요. 날이 맑다가도 금세 흐려지고 비가 쏟아지곤 해서 종 잡을 수가 없네요. 변덕스러운 날일수록 마음이 뒤숭숭한 저는 언제나 평온함을 잃지 않던 언니가 그립습니다. 그런 언니를 이 더위가 가시기 전에 꼭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럼, 그때까지 우리 건강히 지내기로 해요. 고맙습니다.


은영 드림.




추신.

이 편지를 쓰며, 언니의 이름을 밝혀도 되는 것일까, 많이 고민했습니다. 언니의 이름 해진은 같은 발음이지만 훨씬 많이 쓰이는 혜진이 아닌 바다를 닮은 이름이라 어딘가 모르게 늘 특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언니의 이름을 남 모르게 아꼈던 마음을 담아 이름을 밝히며 편지를 부칩니다. 언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편지가 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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