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정직한 소멸

김지승의 《아무튼, 연필》

by 은영

'연필을 아낀다'를 연필 쓰는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면 '연필을 즐겁게 자주 쓴다'이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몽당연필이 되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소멸을 돕는 방식으로의 아낌이다. 연필들은 천천히 사라진다.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의 손에서.


김지승의 아무튼, 연필중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연필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톰보우 모노 4B(TOMBOW MONO 4B) 연필일 것이다. 어린 시절, 가나다를 쓰기 전부터 미술학원을 드나들었던 나에게 가장 친숙한 연필이다. 연필은 종이에 무언가를 쓰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보다 그리기 위한 도구로 익숙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림을 그릴 때, 연필을 사용하는 것은 대게 두 가지의 경우로 나뉘는 듯하다. 하나는 그림을 구상하거나 밑 작업을 위한 스케치의 일환으로 쓰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흑연의 변화무쌍한 변주만으로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일반적으로 소묘라고 부른다. 본래 소묘는 채색을 하지 않고 선으로만 그리는 회화표현을 뜻하는 것으로 연필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나, 나는 연필 소묘와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던 겨울이었다. 무거워진 새 교과서를 받아온 그날 오후, 내게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술학원으로 '돌아가야' 겠다고 다짐했다. 여섯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릴 때부터 알아서 커야 했던 나는 스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금방 찾아내는 능력이 생겼다. 그림을 아주 오래전부터 그려왔던 나는 그리기를 좋아하고 잘했다. 학교에서 나갈 수 있는 시·도 단위의 대회가 생기면 담임 선생님은 늘 나를 찾았고, 나가서 곧잘 상을 받아오고는 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그리지 않는 삶이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내게는 ‘그림 그리는 나’는 무척 자연스러운 나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할 무렵, 한 번쯤은 거론될 법도 한 미술이라는 단어는 좀처럼 그 누구의 입에도 오르내리지 않았다. 엄마도, 나도. 아니, 나의 경우는 하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자신의 욕망을 잘 아는 아이지만, 동시에 금방 철이 든 아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특히, 돈 문제에 대해서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일단 알아나 보자는 심정으로 동네에서 스쳐 지나가며 눈여겨본 미술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미술학원을 등록하고 싶은데요."

"어떤 과정이요?"

"석고 소묘를 하고 싶어요. 이제 중3 올라가요."

"예고 입시 준비하시게요?"

"그건 아니고요. 그 친구들이랑 같이 배웠으면 좋겠어요."

"아, 그래요? 음... 그럼 언제 상담받으러 오실 수 있어요?"


학원 상담실로 가니 며칠 전 전화를 받았던 예고 입시를 담당하는 나와 열 살 터울의 젊은 선생님이 있었다. 나는 그를 안쌤이라고 불렀다. 안쌤은 입시를 준비하는 것은 아니니 취미반처럼 원하는 요일에 와서 수업을 들으면 되겠다고 했다. 학원비도 입시반 비용을 내지 않도록 원장 선생님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도와줬다.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 하며 미술학원에 나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마치 가벼운 마음으로 그림을 대하는 것처럼 굴었으나, 실은 나중에 미대에 가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뒤처질까 싶어 같은 나이의 친구들 수업을 틈틈이 엿볼 작정이었다. 입시미술이 뭐라고, 그때는 어떤 관문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필요한 통행증처럼 꼭 배워야 할 것만 같아서 조급했던 것이다. 엄마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더니 그저 알겠다고만 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늘 돈이 부족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엄마였지만, 내가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어 하는 마음만은 외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연필 사 왔어?"

안쌤은 톰보우 모노 4B 연필 한 타를 사 오게 했다. 같은 브랜드의 미술용 지우개도 함께.

"앞으로 석고 소묘하는 동안 이거만 쓴다고 생각하면 돼. 이제 연필을 깎는 법을 알려줄게. 그림을 잘 그리려면 연필을 잘 깎아야 되거든. 저기 언니들 쥐고 있는 연필 보이지?" 몇 개월 뒤면 이 미술학원을 떠나 예고생이 될 언니들을 안쌤이 가리켰다. "저렇게 연필심을 길게 깎아야 돼. 자, 봐봐."

안쌤은 칼심을 길게 빼고 그만큼 연필도 길게 쥐더니 회를 뜨듯 흑연을 감싸고 있는 나무 몸체를 길고 얇게 벗겨냈다. 연필 밥이 그대로 소리 없이 화실 바닥에 떨어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안쌤은 능숙하게 시계 반대방향으로 쥐고 있는 연필을 돌려가며 쓱쓱 마저 깎아냈고, 이내 까맣고 단단한 흑연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안쌤은 흑연 역시 나무를 깎아냈던 같은 각도로 칼을 쥐었다. 그렇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재단하듯이 칼을 섬세하고 예리하게 썼다. 나는 흑연이 부러질까 싶어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숨 죽이며 칼 끝을 바라봤다. 마침내 안쌤의 손에 쥐어져 있던 연필의 끝은 송곳처럼 뾰족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연필심을 길게 깎아야 선을 다양하게 쓸 수 있어. 그래서 연필깎이를 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안쌤은 그 연필을 깍지에 끼우더니 깨끗한 화지가 고정된 이젤 앞에 앉았다. "이렇게 연필을 길게 잡고 눕혀서... 자, 어깨를 이용해서 선을 길게 길게 그으면 이렇게 가지런하지만 두터운 선이 모여서 면이 돼. 처음에는 톤을 빠르게 쌓는 것이 중요해서 눕혀서 길게 길게 쓰는 것이 중요하거든. 이렇게 직선으로. 어깨를 안 쓰고 팔꿈치나 손목을 쓰면 선이 휘어진다? 봐, 그렇지? 다시, 최대한 톤을 쌓고 쌓아서 더 이상 쌓을 수 없을 때까지 쌓는 거야. 그러고 나서 묘사를 하고 싶을 때, 연필을 세워서 얇은 선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거야. 뭐, 이건 네가 당장 할 일은 없을 테지만. 미리 설명하자면, 얇은 선으로 묘사를 할 때는 연필을 짧게 쥐고 손목으로 그리면 되고." 안쌤은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살피려는 듯 나를 한번 쓱 돌아봤다. "어쨌든 길고 거친 선에서 짧고 예리한 선까지 모두 표현해야 하니까, 연필은 앞으로 이렇게 깎으면 돼. 알겠지?"


안쌤은 당분간 선 연습에 충실히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4절지를 위에서 아래까지 가로로 선을 촘촘히 채우고 나면,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로로 선을 채웠다. 그게 끝인 줄 알았더니 안쌤은 이 녀석아, 대각선으로도 해야지! 했다. 잠시 원망의 눈빛으로 안쌤을 슬쩍 쳐다봤다가 별 수 있겠나, 하며 시선을 거두어 정면에 있는 종이를 바라봤다. 저리는 오른쪽 어깨를 왼손으로 부여잡고서 양 팔로 선 연습을 했다. 한편으로 연필 깎는 것도 연습해야 하는 숙제처럼 느껴졌지만, 사서 하는 걱정일 뿐이었다. 종이가 흑연으로 까맣게 채워지는 것만큼 연필을 깎는 횟수도 자연스레 많아졌다. 안쌤이나 언니들처럼 빠르고 정확하게(연필을 깎는데 정확도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들은 나보다 정확하게 깎는 듯했다.) 깎지는 못했어도 깎을 때마다 묘하게 전문가용 연필이 정말 전문가용으로 점점 그럴듯한 태가 났다. 연필을 잘 깎는 것도 칭찬해주시려나? 내심 기대했지만, 안쌤은 그저 요령 피우지 않고 선 연습을 충실히 하고 있는지 살필 뿐이었다.

"다했어? 이번에는..." 드디어 석고소묘를 하는 것인가, 기대에 가득 찼는데 "이거 많이 봤지? 구, 육면체, 원뿔, 원기둥... 기본 도형을 그릴 거야. 빛과 그림자를 이해하려면..."

아, 김이 세고 말았다.


기본기 다지기를 계속 이어가던 어느 날, 안쌤은 별안간 아그리파를 정면으로 세워놓고 내게 무작정 그려보고라고 했다.

"안 가르쳐줘요?"

"응. 일단 그려봐."

긴가민가하면서 안쌤 말대로 일단 그렸다. 몇 날 며칠 동안 안쌤은 나를 재촉하지 않고 스스로 완성이라고 여길 때까지 그리게 뒀다.

"괜찮은데?"

한 언니가 지나가며 말을 붙였다. 그 말에 언니 몇몇이 내 이젤 앞으로 모여들었다. 안도한 나는 오늘 안에는 이 그림을 무조건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업이 끝나기 십여분 전, 아무런 간섭을 일절 하지 않는 안쌤에게 무언의 사인을 보냈다.

'아,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요.'

그 사인을 알아챘다는 듯 안쌤이 웃으며 말했다.

"너 그냥 취미로 그리는 애 아니지?" 나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지를 않았다. "미술학원만 다니지 않았을 뿐이지, 그림 계속 그려온 거 같은데... 맞아?"

그제야 나는 할 말을 찾았다.

"아... 네."

"처음 그려본 석고상일 텐데, 몇 가지 이론만 이해하면 금방 잘하겠다."

안쌤은 더 이상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저, 석고상을 그리기 위해 이해해야 할 인체의 비례와 근육 같은 것을 읊어주었다. 미간에는 눈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간격을, 코의 길이와 귀의 길이는 일반적으로 같다는 것을, 입 주변을 감싸고 있는 근육이 어떻게 생겼는 지를. 그런 것으로 인물의 인상과 표정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해하며 선은 어느 방향으로 그어져야 하고, 톤은 얼마큼 쌓여야 하며, 그림자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함께 익혔다. 4B 연필 단 하나만으로 평면에 입체를 표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언니들은 예정대로 예고에 진학하며 학원을 떠났고, 그 자리는 동갑내기 친구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와 같은 수순으로 안쌤에게 교육을 받았고 어쩌다 보니 나는 그 반에서 가장 오래 자리를 지키는 학생이 되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내 사물함에는 4B 몽당연필이 눈에 띄게 쌓여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고에 진학하려는 친구들이었기에 그들은 매일 방과 후 학원에 출석했다. 검은 4B 연필과 씨름하는 친구들과 매일 섞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엄마에게 할 말을 고르지 못해 나는 격일로 미술학원에 나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22_7 pencil.png 키가 작아진 4B 연필


입시가 몇 달 남지 않은 여름이었다. 안쌤은 시간 내 석고상을 그려야 하는 예고 입시 시험에 익숙해져야 한다며 친구들에게 종종 모의시험을 시키고는 했다. 이번에는 나에게도 시험을 보라고 권했다. 예고 진학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제한 시간 동안 얼마나 그려낼 수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이다. 시험은 세 시간가량 진행됐다. 우리는 뽑기를 했고, 자신이 뽑은 숫자의 자리에 앉아 그 각도에서 보이는 아그리파를 그렸다. 나는 학원을 다닌 후로 틈이 나면 교과서, 연습장, 심지어 책상에도 아그리파를 그려댔었다. 맨날 그렇게 똑같은 사람의 얼굴만 그리는 것인데도 질리지 않고 그렸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무언가에 빠져 들기 위해서는 얼마나 좋아하느냐 보다 얼마나 싫증 내지 않고 할 수 있느냐를 따져보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막힘없이 그려냈고 정해진 시간 안에 그림을 완성시켰다. 사실, 매일 그토록 그렸던 아그리파를 세 시간 안에 그려내지 못했다면 그게 더 말이 안 될 일이었다. 내가 그릴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아그리파가 하얀 종이를 배경으로 내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취미로 그리는 애보다 뒤처지면 어쩌냐."

그러나, 안쌤의 말은 내가 스스로 기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자연스레 다른 친구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경각심을 불어넣어 주기 위한 것이라 해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이었다.


"너무 아깝다."

자리를 정리하고 집에 가려는데 안쌤이 날 불렀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예고 진학을 고려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집에 가면 엄마하고 꼭 이야기해보라며 안쌤은 성적도 좋은 편이니 서울에 있는 예고도 충분히 갈 수 있다고 나를 설득했다. 안쌤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거라며 짐작했지만, 누구보다도 그 시나리오를 가장 많이 생각해보고 생각해본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런데 늘 생각의 끝은 이렇게 끝났다.

'내가 어떻게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해.'




"저... 상담을 하고 싶은데요."

학교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의 지지가 있다면, 엄마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내가 기대하는 답을 주지 않았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서 미대를 준비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어. 그때 가서 진로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 너는 공부를 잘하니까 그 편이 더 좋을 거 같아. 예고를 가면 다른 선택을 하기가 어려우니까, 우선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는 게 어떨까? 선생님이 네 집 사정도 알고 있고."


"나는 그냥 너 취미로 시킬 생각이었어."

학교 선생님에게 연락을 받았는지 집으로 돌아온 내게 엄마는 말했다.

"어릴 때, 유치원도 가기 전부터 미술학원을 보내줬잖아."

"그때도 취미 정도로 생각한 거였어. 네가 하도 좋아하니까."

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으로 채우게 해 놓고서 이제 와서 취미 정도로 시킬 생각이었다는 엄마의 말이 야속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시작도 못하게 하지. 나를 그림 없이 안될 사람으로 만들어놓고서. 왜, 이제 와서.

"그림은 커서 네가 돈을 벌고 스스로 그걸 감당할 수 있을 때, 그때 취미로 해도 늦지 않아."

엄마는 끝까지 내가 그림을 대하는 마음을 취미로 매듭지었다.




다음날이었다. 내가 어떤 기분인지 모르는 안쌤은 내 앞에 줄리앙을 놓더니, 어딘가 모르게 신이 난 투로 아그리파는 잘 그리니 앞으로 이것을 그려보자고 했다. 안쌤의 설명을 모두 듣고 나서 나는 연필을 가지러 사물함으로 갔다. 사물함에 수북이 쌓인 몽당연필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인가를 행할 때, 연필처럼 성실함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사라지는 방식으로 최선을 다 했음을 증명하는 것이 다름 아닌 연필이었다. 자신의 몸을 깎아내며 생의 의미를 더해가는 것. 이토록 정직한 소멸이라니. 왠지 모르게 아득해졌다.


새 연필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검은색 봉투를 씌운 커다란 파란 쓰레기 통 앞에 서서 칼날을 길게 빼 연필을 깎았다. 언젠가부터 고루해진 연필 깎는 일이 새삼스레 어떠한 의식처럼 여겨졌다.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을 체감하는 행위 속에서 아무 대가 없이 제 살을 깎아내는 듯 사는 엄마의 모습이 언뜻 보이다 사라졌다. 엄마가 내 꿈을 두고 서운한 말을 해도 내가 끝내 한마디 더 얹지를 못하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삼 남매를 키우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치열한 희생이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엄마의 삶으로 나는 연필을 사고 그 연필을 깎아낸다. 결국, 엄마를 깎아낸 결과로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인가. 생각이 더 나아가지 못한 결론은 쓰레기통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흑연 냄새처럼 매캐했다. 몹쓸 소멸의 순환을 무력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엄마의 삶을 사라지게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숭고한 연필 깎는 일을 마치고 다시 이젤 앞에 앉았을 때, 그 어느 석고상보다 음영이 뚜렷한 줄리앙이 뭉개져 보였다. 나는 눈에 고인 물기 어린 시선을 닦아내고 하얀 종이의 중앙에 중심선을 연필 자국이 남지 않도록 그었다. 연필의 흑연이 잘게 부서지며 가늘고 옅은 자취를 만들어냈다. 그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어 그 소멸에 충실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 되기보다 무엇 되지 않기를 바라는 꿈도 있을 것이다. 보존하지 않고 소멸시킴으로써 아끼는 마음이 있듯이.


김지승의 아무튼, 연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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