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을 이어가게 해 준 사람들

박서련의 《더 셜리 클럽》

by 은영

몇 해 전부터 계절에 상관없이 여유가 생기는 날이면 달리기를 한다. 지루한 운동을 끈기 있게 하지 못하는 나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도심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달리는 것이 제법 잘 맞는 편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한강공원인 동작대교에서 반포 한강공원까지 이어지는 코스를 주로 찾는데 반포대교 아래로 뻗어진 잠수교까지 왕복으로 달리면 5킬로미터를 족히 완주한다. 그러나, 혼자 뛰는 일은 추진력을 쉽게 잃기 마련이다. 바로 하루 전날만 해도 무리 없이 세빛섬에 닿았던 내 두발이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으니 말이다. 그때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내 앞에서 달리고 있는 사람이다. 그를 일일 달리기 파트너 삼아 방해가 되지 않는 거리감을 유지한 채 서로를 인지하며 뛰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목표 지점보다 바로 눈앞에 있는 움직이는 목표 지점을 쫓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반포대교 아래를 지나게 된다. 그가 잠시 서행하는 틈을 타 내가 다시 추월하게 되면, 아마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뛰기를 강행할 것이다. 우연히 만난 서로가 서로에게 페이스 메이커(Pacemaker)가 되어 각자의 목표에 닿게 한다. 단지 오늘 함께 이 길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러나, 우연히 만난 페이스 메이커는 달리기 코스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 홀로 떠난 여행에서 페이스 메이커를 만난 이야기, 박서련의 소설더 셜리 클럽이 있다. 설희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보내며 만난 S를 사랑하게 된다. 설희가 그 감정을 알아챘을 무렵, 안타깝게도 S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때, S를 찾기 위해 떠나겠다며 눈물을 쏟는 설희에게 손을 내민 이들이 있었다. 설희와 같은 영어 이름으로 불리는 셜리들, "더 셜리 클럽"이다. 설희 혼자라면 결코 닿지 못했을 울루루와 퍼스를 셜리 해먼드, 셜리 아케인, 셜리 넬슨 그리고 수많은 셜리가 함께 했다.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설희가 추진의 힘을 잃지 않도록 우연히 연결된 그들이 길 앞에 있었다. 단지 셜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이유에서다.



더 셜리 클럽에 셜리보다 중요한 건 없어요. 우리는 모두 셜리고, 우리는 모두 셜리를 아끼죠. 부담 느끼지 말아요. 우리가 도울게요. 셜리를 돕는 게 우리를 돕는 거니까.


박서련의 더 셜리 클럽중에서



나 역시 난관에 부딪힌 여행에서 페이스 메이커를 만난 경험이 있다. 우리의 만남 역시 필연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이 나와 같은 기차 칸을 탔다는 사소함에서 출발했으니 말이다.





016АА-13-014

(순서대로 기차 번호-칸 번호-좌석번호)


"무르만스크?"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며,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종점일 거라 막연히 예상했던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플랫폼의 전광판에 표시된 기차 번호 016АА의 노선은 이 기차의 종점이 무르만스크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무르만스크라니,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이었다. 프로보드니차(러시아어의 승무원)가 어서 기차에 오르라며 눈치를 주는 바람에 전광판에서 시선을 바삐 거두고 13번 기차 칸에 올랐다. 내 자리는 이층 베드인 014번. 이제는 요령을 터득해 이층에 오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일층 침대의 끝을 딛고서 반동을 이용해 상체를 침대 위로 걸치면 어렵지 않게 자리할 수 있다. 다행인 것인지 처음으로 오른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이층 베드를 차지한 터라 감지덕지로 노하우를 금세 터득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이층에 오르는 일은 성가신 일이라 웬만하면 피하려고 예약을 서둘렀건만, 머무는 도시마다 사랑에 빠지듯 허우적거리며 여행하다가 아차차! 하며 다음 기차표를 사는 일을 반복하고 만 것이다. 그 덕에 늘 남아있는 자리는 짝수인 이층 베드뿐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기차의 내 자리가 이층 베드인 이유 역시 그랬다.


가방 속에 밀어 넣어뒀던 론니플래닛을 꺼냈다. 이 책에서도 도무지 무르만스크라는 도시명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거의 론니플래닛의 신봉자나 다름없었기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갈 수 있는 웬만한 곳을 모조리 설명해놓은 책이라고 굳게 믿어온 이 책에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역시 구글이지, 하며 디지털 시대에 완벽히 적응한 아날로그형 인간인 나는 스마트폰으로 구글맵을 켰다. 'Murmansk'라고 영문으로 검색을 하니 러시아의 북쪽으로 화면이 순식간에 이동했다. 4.7인치 스크린으로 확인한 무르만스크는 북극해가 닿아 있는 러시아의 최북단에 있는 도시였다. 서쪽에 위치한 핀란드가 눈에 들어왔다. 몇 해 전 다녀왔던 나의 첫 북극권 도시인 로바니에미에 수없이 많은 노란 별이 찍혀 있었다. 로바니에미의 한기를 기억해내며 그곳보다 한참 위에 위치한 무르만스크의 겨울을 상상했다. 이 기차로 무르만스크까지 갈 수 있다고? 그렇지 않아도 기차에 오를 때 각종 레저 용품을 짊어진 사내들을 보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저런 것을 누릴 곳이 있을까 싶어 어리둥절했던 참이었다. 그들이 바리바리 싸온 것은 분명 무르만스크에 인접한 북극해를 위한 것이 분명했다. 아마 근처에 베이스캠프가 있겠지, 엄청 난데? 나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처음 만나 간헐적 여행 메이트가 된 희 언니에게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언니와 방금 전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서 다음 만나는 도시에서 또 보자며 작별 인사를 한 터였다.

- 언니, 시베리아 횡단열차 종점이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니었어요. 무르만스크라는 곳이 진짜 종점이에요. 기차 더 탈거죠? 안 간단 소리는 하지 마요.




022ЧА-06-002


- 진짜 가는 거예요?

- 그럼요, 제가 말뿐인 말 하는 거 봤어요? 저는 하겠다고 말한 건 무조건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것만 말한다고 했잖아요.

비로비잔에서 이르쿠츠크로 가는 기차에서 만났던 원은 SNS에 내가 올린 티켓 사진을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4박을 보내고 예정에 없던 종점인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기차 022ЧА에 올랐다. 뭐든지 계획에 의해 움직이는 나는 이상하게도 여행길에 오르면 말랑말랑한 상태가 된다. 음, 솔직하게 말하면 여행 중 무계획을 계획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용인되는 것이다! 재미있어 보이는 건 어떤 계획보다도 우선한다는 원칙하에.


06번 기차 칸에 올라 이번에도 짝수로 끝나는 002 이층 베드에 가뿐히 양팔의 힘을 이용해서 몸을 안착시켰다. 여름의 무르만스크는 가장 기온이 높을 때도 영상 1도를 웃돌지 못하기에 겨울 옷이 필요했다. 검색을 해보니 놀랍게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니클로가 있었다. 우연히 페테르고프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행 메이트가 된 아냐와 함께 경량 패딩을 사러 갔다.

"뭐가 좋은 거 같아?"

몇 가지 색을 골라 아냐에게 물었는데, 아냐는 어두운 핑크색을 가리켰다. 나는 군소리 없이 바로 계산했다. 아냐는 유니클로를 처음 와 본다고 했다. 사실, 이런 브랜드가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와 일본의 외교 관계를 생각해보면 유니클로가 여기에 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여기는 일본인이 자유여행을 올 수 없는 곳이니까. 그런 곳에 유니클로가 상트페테르부르크 갤러리아 백화점의 두 층에 걸쳐 떡하니 들어서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경량 패딩을 베드의 한쪽에 깔아놓고 아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아냐, 나 이제 출발해. 무르만스크에 도착해서 소식 전할게.

재학 중인 대학교가 있는 모스크바로 돌아간 아냐는 무르만스크의 사진을 기대하겠다며 답 메시지를 보내왔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달리는 중에 통신이 완전 두절된다. 요즘에는 통신이 두절된다고 하면 대게 무선 인터넷을 쓰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비롯해 모든 연락이 두절된다는 뜻이다. 휴대전화마저 스마트해져 그것만 쥐고 있으면 만사형통한 시대에 어쩌면 참을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먹통이니 자연스레 기차 안에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MBTI 성격유형으로 상황을 묘사하자면, 하나같이 I처럼 조용히 있다가 기차가 출발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이 지닌 E를 한껏 끌어올려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기차는 서로에게 더 몰입할 수 있는 묘한 시공간을 만들어준다. 요즘과 같이 손 안의 스크린만 바라보는 세상에서 예외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어김없이 이번에도 022ЧА 기차의 06번 칸에만 존재하는 시공간이 찾아왔다. 하나의 기차 칸에는 서른여섯 명의 자리가 있다. 여섯 명이 한 단위가 되어 서로 마주 보며 공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베드가 놓여 있는데 나는 편의상 그 단위를 골목이라 부르고는 했다. 내가 속한 골목에 입주한 좌석번호 001번부터 006번 탑승객들은 스스럼없이 서로의 행선지와 함께 소개를 이어갔다. 나의 맞은편 이층 베드에는 사진가 올레사가 차지했다. 주로 웨딩 스냅을 찍는다는 올레사는 무르만스크에 군인으로 일하는 애인을 만나러 기차에 탔다고 했다. 그리고 요새 가장 좋아하는 거라며 '허니버터 아몬드'라고 쓰인 스낵 봉투를 내게 보여줬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그 스낵을 보며 나는 웃음이 났다. 올레사의 아래층 베드를 쓰는 할머니도 목적지가 무르만스크라고 했다. 보라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그 할머니는 더는 말이 없었다. 복도 쪽 일층 베드를 차지한 올레사의 또래로 보이는 친구 다샤는 아파티티역이 목적지라고 했다. 다샤도 수줍음이 많은 것인지 우리 대화를 듣기만 했다. 다샤의 위층 청년은 벌써 침대 위에 누워 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기차가 밤 아홉 시를 넘어 출발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까 그는 기차가 출발하기 전 내 짐을 손수 이층으로 올려주었다. 이층 베드에 올라가는 건 익숙하게 잘 해내지만, 짐을 올리는 건 민첩함과 균형감보다는 안정된 근력을 필요로 하는 탓에 매번 이렇게 도움을 받고는 했다. 내 아래층 베드의 인나 할머니도 다샤와 같은 목적지가 쓰인 티켓을 쥐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요양원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인나 할머니의 흐트러짐 없이 안쪽으로 말아진 컬의 하얀 단발머리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스마트폰에 태블릿까지 꺼내 쓰며 격변하는 IT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면모마저 뽐내었다. 나에게 남한에서 왔는지 물어보길래 러시아인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호기심이 작용한 건가 싶었지만, 일본에서 부산으로 배를 타고 가본 적이 있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하라쇼!"(좋다! 의 러시아어)라는 감탄사를 툭 내뱉었다. 그 말에 객차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날 바라보았다. 그들은 얼굴을 활짝 편 채로 즐겁게 웃고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여행자의 낭만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의외로 여행자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나마 여행자를 볼 수 있는 기차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로 가는 노선 혹은 모스크바와 같은 대도시를 가는 노선 정도이다. 이 경우 역시 여행자를 손에 꼽을 정도로 만나게 된다. 보통 생활권 내에서 이동의 목적으로 이용하는 러시아인들로 채워진다. 이번 칸은 운이 좋아 올레사, 다냐, 인나 할머니처럼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대부분 러시아어 외에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스마트폰에 받아둔 번역 앱이 요긴하게 쓰였다. 혼자 여행을 하며 어렵게 소통하는 내가 걱정이 됐는지 기차에서 나의 러시아어 선생님을 자처한 친구들을 여럿 만나게 되었다. 그들 덕분에 러시아 사람들과 대화할 때, 러시아어로 가벼운 추임새를 넣는 것에 도가 트게 된 것이다. 나의 첫 러시아어 선생님은 이르쿠츠크에서 노보시비르스크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아르토르였다. 아래로 열다섯 살 이상의 터울인 아르토르에게 배운 첫 러시아어는 다름 아닌 밤 인사였다. 우리가 밤 기차에서 만난 덕분이었다.

"도브레 노치!"(밤 인사의 러시아어)

그날을 추억하며 우리 골목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설렘도 함께 까만 밤을 이불 삼아 잠재웠다.


다음 날, 기차에서 아침을 맞았다. 잠시 정차한 역에서 간신히 연결된 통신으로 밀린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일종의 독촉 메시지도 껴 있었다. 조만간 육지 여행을 끝나는 여름의 끝에 비행기를 타고 유럽의 작은 섬나라 몰타에 가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몰타에서 다닐 어학원 비용의 입금 기한일을 알리는 재촉의 메시지가 와 있었던 것이다. 더는 미룰 이유가 없어 은행 앱을 켜서 이체를 하려는데 앱에 연결된 신용카드 거래내역에 내가 결제하지 않은 항목이 눈에 띄었다. 이럴 리가 없을 텐데? 현실을 부정하며 새로고침을 하는 순간, 기차가 출발해버렸다. 달리는 기차에서 꼼짝없이 길을 잃은 사람처럼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다시 기차가 정차할 때까지 끙끙거리기만 했다.


다시 기차가 섰다. 재빨리 카드사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유럽에 있다고 하니, 상담사는 네덜란드에서 우크라이나 화폐로 결제된 건이라며 여행 중에 사용한 것이 아닌지부터 가장 먼저 확인했다. 으레 필요한 절차 같았지만,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나는 기차가 또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터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런 상황을 알리 없는 상담사는 매뉴얼대로 내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는 카드 정보가 타인에게 유출된 것으로 보이고, 고객님이 사용하신 게 아니라면 분쟁 신고를 하시면 됩니다. 분쟁 신고에 들어간 카드는 더 이상 사용하실 수 없..."

분쟁 신고? 처음 듣는 단어라 혼란스럽기 시작했는데 그 복잡한 문장이 갑자기 끊겨버렸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달리는 동안 통신이 일체 되질 않는다. 오직 정차할 때만 가능하다. 그 말은 즉, 나는 다시 기차가 정차할 때까지 전화를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던 올레사가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한국어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표정만은 정확히 읽어낸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우리 골목 사람들은 미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내 걱정을 덜어주려 애를 썼다. 올레사는 절대 울면 안 된다고 나를 달랬는데, 정말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 눈물이 나올 세가 없었다. 그저, 집 나가면 고생이란 말을 떠올리며 쓰게 삼켰다.


겨우 통신이 잡히는 구간에 들어섰고 재빠르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러시아어로 알 수 없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오다 툭 끊기기만 할 뿐이었다. 인나 할머니는 대신 전화를 받아 그 안내 음성을 듣더니, 이 전화번호에 돈이 모자라서 끊기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탑업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국제전화라 돈이 빠르게 소진된 것이었다. 인나 할머니는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한국의 카드사에 전화를 시도했지만 어떤 이유인지 전화 자체가 걸리지 않았다. 그러자 올레사와 다샤는 내가 러시아에서 사용하는 번호를 물어보더니 각자의 스마트폰을 꺼내 내 번호로 통신 요금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불현듯 고등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남는 알을 교환하던 추억이 떠올랐지만, 지금 추억팔이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어서 전화를 걸어야 할 타이밍! 그러나, 기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별 수 없이 다음 정차역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지갑에서 루블을 꺼내 올레사와 다샤에게 건넸다. 그들은 고개와 손을 함께 저어가며 어서 카드 문제부터 해결부터 하자고 한사코 거절했다.


단 오 분의 시간 동안 정차하기로 예정된 어느 역에 기차가 속도를 늦추며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전화를 걸어 쇼미더머니에서 당장이라도 합격 목걸이를 받을 수 있는 랩 실력을 발휘하듯 카드사 상담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전화를 걸 때마다 다른 상담사가 받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모든 사정을 이해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우리 골목 사람들은 숨죽여 바라봤다. 기차가 출발하면 전화가 끊긴다고 상담을 시작할 때 말해두었더니, 상담사도 나와 같은 BPM으로 상담을 진행해주었다. 드디어, 분쟁 신고 완료! 카드 정지 완료! 전화를 끊을 때, 진심으로 북받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전화를 끊고 카드 내역을 다시 조회하니 그 새 내가 사용하지 않은 결제 내역이 추가되어 있었다. 에라이! 실물 카드가 내 손에 있는데 대체 어떻게 결제를 하는 거야! 달리는 기차 안에서 전화를 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사이에 누군가 내 카드 정보를 계속 이용한 것이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우리 골목 사람들은 카드 정보가 어디에서 유출됐는지 추측하는 갑론을박을 벌였다. 몇몇은 앞으로 오 개월이나 더 남은 내 여행을 염려하며 나에게 이런저런 주의를 줬다. 나 역시 무르만스크에 도착하면 더 조치해야 할 것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동시에 일단 급한 불을 끈 것에 안도하며 마음을 다 잡으려 애를 썼다. 자신의 일처럼 도와준 골목 사람들을 봐서라도 그래야 할 터였다. 그들이 없었으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무르만스크의 시린 바람을 맞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단지 기차에 함께 탔다는 이유만으로 어리둥절하게 입은 호의에 만감이 교차했다.


기차는 칸달락샤역에 정차했다. 내게 온 작은 시련을 하나의 팀처럼 일사불란하게 해결해 낸 우리에게 평온이 찾아왔다. 나는 다샤와 함께 바깥공기를 쐬러 밖을 나섰다. 이 기차를 타며 유일하게 누린 산책이었다. 알고 보니 다샤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 세 마디의 한국말을 구사할 수 있는 케이 콘텐츠를 좋아하는 소녀였다. 쑥스러워하며 말을 아끼던 이유는 무르만스크로 가는 기차에서 난생처음 한국인 친구를 처음 사귀게 되어 들떠서였다.

"올레사, 다샤 한국말할 줄 안다?"

기차에 돌아와 올레사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그 말에 올레사가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다샤를 바라봤다. 아까 나에게 보여준 것처럼 다샤는 다시 한국어를 읊었다. 올레사는 눈이 더 커졌다. 다샤의 한국말 덕분에 기차는 활기가 돌았다. 바리스타가 꿈이라는 다샤는 한국에 꼭 와보고 싶다고 했다.


얼마 가지 않아 기차는 아파티티역에 도착했다. 다샤를 비롯해 인나 할머니 그리고 내 짐을 올려주었던 청년이 짐을 꾸려 기차에서 내렸다. 우리 골목에 처음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이제 막 서로를 알기 시작했는데 기차는 아쉬운 우리의 마음을 무시한 채 이별의 시간을 정확히 지켰다. 다샤는 마중 나온 친구와 나란히 역을 떠났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고 인나 할머니가 짐을 끌고 사라지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무르만스크에 도착하고 나서야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둘러보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사진에 찍혀있는 인나 할머니를 발견했다. 하룻밤 이웃이었던 우리의 인연이 마냥 가벼운 우연은 아니었나 보다. 그 사실을 알려드리려고 인나 할머니에게 받아둔 이메일을 잘 간직해두었는데 어째선지 아직까지 메일 한 통을 보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들을 함께 배웅한 올레사와 함께 다시 기차에 올랐다. 약간의 허무함이 밀려왔다. 다 같이 카드 정보 복제 사건을 거칠게 한바탕 치른 덕에 나름 진한 사이라 생각했는데 떠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종점으로 가는 이 기차에는 새로운 승객이 탑승하지 않았다. 텅 빈 기차에 묘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제 셋 뿐인 우리 골목 사람들은 마지막 식사를 위해 지니고 있는 음식들을 모조리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덕분에 넉넉한 저녁식사가 되었다. 아파티티에서부터 무르만스크까지 이어진 구간의 창 밖 풍경은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웠다. 끊임없이 호수와 강이 이어지는 길을 기차는 달렸다. 보라색 머리의 할머니가 그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종종 나를 불렀다. 멋진 경관이 창에 걸릴 때마다 내 카메라를 가리키며 어서 찍으라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올레사, 할머니께서 왜 우리한테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시는 거야?"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철통보안으로 지키는 할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올레사도 모르겠다고 했다. 결국 아르토르에게 배웠던 러시아어 실력을 발휘해 나는 다시 보라색 머리의 할머니에게 이름을 물었다.

"깍 바스 자붓?"(이름이 뭐예요? 의 러시아어)

할머니는 약간의 공백을 두더니 이내 대답을 해주었다.

"류다."


우리에게 이름을 알려준 후로 류다 할머니는 대화에 활발히 동참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의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여정을 궁금해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다녀온 도시를 열거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는 "그냥 러시아에 계속 살아라!" 하며, 별안간 결혼을 했는지도 물었다. 내가 미혼이란 사실에 류다 할머니는 잘됐다며, 러시아 남자를 만나 여기서 지내라고 적극적으로 권했다. 뜬금없는 그 말에 나는 우습게도 디마가 생각났다.


비로비잔에서 탄 기차에서 디마를 만났다. 그 기차는 내가 탔던 기차 중에 가장 긴 시간을 달렸다. 이틀 하고도 열한 시간 이십 분 동안을 기차에서 보냈으니 말이다. 나는 001번인 일층 베드를 디마는 002번인 이층 베드 입주민이었다.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거리를 두는 디마때문에 제대로 된 대화를 거의 하지 못했다. 나를 불편해하는 눈치에 하필 오래 머무는 기차 생활에 까칠한 친구를 만났다며 나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그러던 이튿날 밤, 기차에 소동이 벌어졌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음주 행위가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누군가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놀라 나는 잠에 깼고 디마는 이층 베드에서 내려와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게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번역 앱을 켜보라고 했다. 내 스마트폰을 건네받은 디마는 분주하게 무언가를 입력해 내게 돌려주었다. 별일 아니니 잠이나 마저 자라는 문장이 번역되어 있었다. 어리둥절해하며 나는 상황을 계속 살피다가 졸음에 못 이겨 하얀 얇은 이불을 턱끝까지 올리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덜컹 거리는 기차는 잠을 깊게 자기가 어려워 잠에서 쉽게 깨기 마련이다. 푸르스름한 공기가 드리워지는 새벽 눈을 떠보니 내 침대 끝에 디마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디마는 나의 맞은편 일층 베드에 자리한 제르기 아저씨와 소곤소곤 대화 중이었다. 잠에 깬 나를 발견한 제르기 아저씨가 말했다.

"디마가 밤새 너를 지켜줬단다."

사실, 밤에 소동을 피운 그 사내는 몇 번이고 내게 불편한 대화를 시도하려던 사람이었다. 그때마다 골목 사람들이 나의 대리인을 자처해 그가 더는 내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었다. 그로 인해 내가 불안해하던 것을 잘 알고 있던 디마는 밤새 내내 자신의 잠을 쫓아가며 내 베드를 지켜준 것이었다. 방어태세로 앉아 있던 디마는 내가 일어난 걸 보고서야 이층 베드에 올라가 마저 잠을 청했다. 그 일을 두고 제르기 아저씨는 나와 디마에게 잘 어울린다며 결혼하라고 종종 놀렸는데, 그때마다 디마가 어찌나 싫다고 난리를 쳤는지. 아니, 생각해보니 기분 정말 나쁘네. 뭐 그렇게까지 싫다고 할 건 또 뭐람? 류다 할머니의 말에 그날이 떠올라 디마가 선물해준 모자를 가방에서 꺼내봤다. 군인이었던 디마가 군생활을 하며 쓴 모자였는데 모자 안쪽에 '디마가 주는 기념품'이라는 말이 키릴 문자로 적혀있다. 흔들리는 기차에서 쓰는 바람에 글자가 몹시 삐뚤빼뚤했다. 펜을 꼭 쥐고 집중해서 글씨를 쓰던 디마의 모습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미소의 의미를 모르는 류다 할머니는 으쓱하며 다시 자기 말을 이어갔다. 무르만스크에 사는 류다 할머니는 무르만스크를 여행할 내게 올레사를 통해 몇 가지를 알려주었다. 류다 할머니가 러시아어로 말하면 올레사가 영어로 내게 설명해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무르만스크는 유월에서 팔월까지는 밤이 없어. 까만 밤이 찾아오지 않아. 반면에 십이월에서 일월까지는 밤밖에 없고. 그러니까 낮이 없는 거지."

그 말에 턱이 빠지도록 입이 점점 벌어지던 나는 무르만스크에 도착하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희 언니와 밤을 새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백야여도 자정이 될 무렵엔 늘 까만 밤이 찾아왔기에 환한 낮 같은 밤은 정말 상상이 되지 않았다. 꼭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말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나중에 이걸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라고 하시네." 하며 올레사가 내 스마트폰에 키릴 문자로 무언가를 입력해주었다. 'полярный день, полярная ночь в мурманске.' 나중에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나서야 검색어에 입력해보니 무르만스크의 오로라 사진이 결과 페이지를 메웠다. 내가 다시 무르만스크에 오게 된다면 그때는 겨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르만스크는 왜 가려는 거니?"

류다 할머니가 물었다.

"테리베르카로 넘어가서 북극해를 보려고요."

"그게 다야?"

"네, 그게 다예요."

내가 안전하게 북극해에 닿을 수 있다면, 이 여정을 함께 해준 사람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생각에 생애 처음 북극해를 만날 순간이 더 간절히 기다려졌다.


기차는 종점인 무르만스크에 닿았다. 모두가 내린 빈칸을 멍하니 바라봤다. 우리의 온기 어린 대화가 오갔던 그곳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였다. 홀로 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은 결코 혼자 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언어를 가르쳐주었고, 누군가는 밤새 내 베드를 지켜주기도 하고, 누군가는 예정에도 없던 목적지로 향하는 내 여정을 이어주었다. 그 모두 단지 기차의 같은 칸에 머문다는 사실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이 기차에서의 만남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서로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그저 존재만으로도 영향을 주고받는다. 우연히 앞 뒤로 같은 트랙을 달리거나 미루고 미루다 마침내 발권한 티켓으로 서로 마주 보게 되거나. 더 셜리 클럽의 설희가 S를 찾는 여정을 함께 한 셜리들도 그렇다. 설희의 경우 셜리는 선택한 이름이겠지만 호주에서 설희가 만난 무수히 많은 셜리는 스스로 선택해 그렇게 불린 것이 아니다.(설희 역시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한국 이름으로 인해 영어 이름 셜리를 쓰게 된 것을 생각한다면, 설희가 셜리라는 이름을 쓰는 것도 어느 정도 우연처럼 보인다.) 결국 우연히 만난 셜리와 셜리였다. 서로를 돕겠다는 의지가 작용하기 앞서 이들이 셜리가 된 것은 의도한 바가 없다. 이 소설은 지극히 우연에 기인하며 일시적인 만남으로도 돕는다는 것의 시작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알려준다. 그렇다면 다양한 형태의 더 셜리 클럽이 언제 어디서든 생길 수 있지 않을까? 나의 022ЧА 기차의 06번 칸 골목 식구들처럼. 더 나아가 우리는 서로 어디를 향해 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삶의 방향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우연한 만남에도 반짝거리는 인연을 서로 알아볼 수 있다면 말이다.


기차에서 내리니, 서늘한 공기가 이곳이 북극권임을 알려주었다. 류다 할머니는 벌써 저 멀리 짐을 끌고 자신의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뒤를 돌아서서 나와 올레사를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짧은 시간 함께 보낸 탓에 류다 할머니를 잘 알지 못하지만, 정말 그 다운 이별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플랫폼에는 우리나라에서 사월에나 볼 수 있는 라일락이 한아름 피어있었다. 무르만스크를 사는 류다 할머니의 머리색과 꼭 닮은 보랏빛이었다. 잠을 잊은 채 이십사 시간을 깨어있는 팔월의 라일락은 향이 매우 짙었다. 그것이 내가 무르만스크를 기억하는 첫 감각이다.


22_9 lilac.png 무르만스크에 만발한 팔월의 라일락


매거진의 이전글가장 정직한 소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