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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영 May 03. 2020

오늘의 너에게

완성형 문장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문장으로

나의 오랜 친구 젬마에게.


1년의 갭이어(Gap year)를 보내고 회사에 복직했더니 회사 적응에 도움을 주겠다며 상담실에서 연락이 왔어. 나는 약 4년 전, 회사에 다닌 지 3년 차가 되었을 때 누구나 겪는다는 직장 내 스트레스가 극심해져 하루하루를 불안과 우울 속에 보냈었지. 그때 찾아갔던 곳도 바로 이 사내 상담센터였어.

"그때 만난 해나 씨는 정말 연약한 소녀 같았는데 오늘 이야기를 들어보니 본인이 그리는 인생의 한 지점을 자신의 속도대로 걸어가고 있는 것 같네요."

정말 그땐 그랬어. 입 밖으로 한마디라도 내뱉으면 꼭꼭 닫아두었던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었으니까. 지금은 한강에서 맥주 한 캔 하며 안주거리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기억이 되었지만, 그때에는 왜 그리도 바스러질 것만 같았을까.


나의 갭이어는 이런 스트레스 속에서 선택한 것은 아니었어. 그 지옥 같았던 기간을 놀랍게도 이겨내고 꽤 주체적으로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챙겨가며 회사를 더 다녔었지. 그러다 5년을 채우고 선택한 것이 갭이어였어. 너도 알고 있잖아. 늘 호기심이 많고 세상이 궁금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던 나에게는 회사에서 복지로 마련한 1년이라는 자기계발휴직을 언젠가 꼭 사용하리라는! 사실 거창한 이유가 없었어. 그냥 온전히 나에게만 시간을 쏟고 싶었거든. 그리고 이렇게 에너지가 넘치는 내게 1년의 갭이어는 모자란 듯 넘치고 넘치는 듯 모자라는 시간이었지.

1년 후, 회사에 돌아왔을 때 다들 내가 돌아온 이유에 대해 너무나 궁금해했지. 게다가 웬만한 남자보다도 짧아진 머리는 덤으로 말이야. 1년 동안 어디를 여행했는지,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그래서 어떤 대단한 변화가 생겼는지 말이야. 그러나 내 대답은 "그냥 놀다가 왔는데요?" 이게 다였지. 일반 직장인들에게 휴식기를 갖는다는 것은 쉬운 선택이 아니기에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대답을 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지. 그들에게는 그만큼 어려운 결정이기 때문에 엄청난 무언가를 얻고 왔을 거라는 생각한다는 것도.

상담사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시시콜콜했어. 만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선택한 일련의 과정들은 다 필연과 의지로 인해 일어났다고 생각해. 갭이어도 마찬가지였고, 비교적 다른 이들에 비해 쉽게 선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내게 너무 많은 변화를 기대하고 자신들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내가 달라진 부분을 보면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바빴지. 그리고는 깨달았어. 어쩌면 이들은 내가 선택한 것을 부정하고 싶었다고.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멈춰진 그들의 일상을 달콤한 안정감에 맡겨버렸다는 것을. 나는 나의 선택을 지지해. 그리고 더 이상 멈춰있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아. 현실을 돌봐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해. 그렇기에 그 현실을 돌보면서도 내가 나로서 사는 이 삶을 부지런 떨고 싶어.

상담사는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진학, 취업, 결혼 등 '무엇이 되겠다 혹은 하겠다'라는 what에 대한 완결이 되는 삶의 목표는 그것을 이루고 나면 공허해지기 마련이라고. 그래서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는 how를 의미하는 현재 진행형이 수반되는 삶의 명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거야. 나는 이 말을 듣고 내가 1년의 갭이어를 가지면서도 찾지 못한 나의 삶의 태도에 대한 답을 듣는 것 같았어. 놀랍게도 내가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회사에 와서야 말이지.


제주에서의 일출

젬마, 나의 완성되지 않은 문장으로 너에게 편지를 써. 내 생각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이 또한 과정인 것이잖아. 내가 지난봄 제주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할 즈음 무언가를 이뤄내야겠다기보다 하루하루를 마치 제주인으로 살아가며 그날의 감상을 즐겼던 것처럼 그날에 더 충실할 수 있는 현재 진행형으로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너에게 함께 보내는 이 그림은 제주에서 이른 아침 맞이했던 일출이야.

오늘의 너의 하루는 어떻니? 나는 친구와 잠시 카페에 나와 앙버터 하나를 먹으며 이 생각들을 되뇌고 있단다. 내가 생각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는 어떤 것일까? 정확히 모르니 더 재미있는 것 같지 않니? 그러니 너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 살아가는 가운데 무엇하나 명확히 정해지지 않아도 우리 아무렇지 않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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