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다섯의 해나에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그날의 나

by 은영

스물 다섯의 해나에게.


해나야, 넌 지금 대서양에 닿았겠구나. 너는 계획했던 남미여행을 취소하고 스물 넷의 끝자락을 스페인에서 보내겠다며 12월에 훌쩍 그곳으로 떠났지.

너는 오로지 두 발로 920km를 걸어 그 길을 완주하고 싶다고 했어. 왜 꼭 그 길이어야 하냐는 내 물음에 넌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오직 그 길 뿐이라고 말했어. 꼭 가야만 한다고 말이야. 그곳을 다녀오면 조금 더 나은 너 자신이 될거라는 확신이 든다고 했지.

섬과 같은 분단국가에서 자라 온 너는 설렘 속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두 발로 넘으며 여행길에 올랐어. 물집 가득한 양발과 익숙하지 않은 배낭의 무게를 견뎌내야 하는지도 모른채 말이야. 얼마 후, 너는 짐을 점차 줄여가며 어느새 어엿한 순례자가 되었지. 내딛는 걸음마다 실린 힘은 몰라보게 달라진 너를 말해주는 듯 했어.

넌 매일 밤 열리는 인터네셔널 테이블에 한국대표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지. 여러 국적의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며 미처 몰랐던 세상 이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말이야. 편견없이 사람을 대하며 넌 그곳에서 진정한 우정을 배웠어. 그 사람들은 든든한 너의 동료가 되었고 너의 여정을 더 풍요롭게 해주었다는 사실에 넌 늘 감사해했지.

21_27 920km.png 920km의 여정

머지않아 그 눈부신 여정 속에 넌 오로지 두 발로 대서양을 마주했지. 그곳의 비린 바다냄새를 맡으며 스물 다섯이 된 너를 난 참 대견하다고 생각했단다.


해나야, 그런 네가 지금의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지 아니? 가끔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때면 난 어김없이 그때의 나, 고된 여정 끝에 스물 다섯을 맞이한 해나를 떠올려. 12kg짜리 배낭 하나와 두 발만 있으면 어디든 떠날 수 있었던 '용기'있던 나를. 마침내 그 길의 끝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나를 말이야. 무언가를 결심하고 해낸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너를 통해 알게 되었어. 그때 너의 경험은 지금의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현명하게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곤 해.

너는 내게 언제나 내 선택을 믿도록 한단다. 나 자신이 더 나아지는 법을 잘 아는 너는 내가 나 다움의 기준을 세우고 살아갈 수 있게 하지. 마치 너가 나를 돌봐주는 기분이야. 그날의 네가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이만 편지를 줄인다. 너와 내가 선택한 오늘을 응원하며.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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