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을 주제나 이론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으로 대학만큼 좋은 곳은 없는 듯합니다. 졸업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교양 과목을 꼭 들어야만 하는데, 저는 이 교양 과목을 꽤나 즐겼습니다. 학부 시절에는 철학에 관심이 많아서 미학이나 문화인류학, 국제 빈곤 같은 주제들도 찾아들었죠. 이런 것들은 제 전공인 경제학과 전혀 다른 세계일 것 같았는데, 막상 들여다보면 그 이면에 있는 어떤 원리라던지 거대한 흐름이 똑 닮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적 쾌락을 즐겼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때가 제 생애 가장 '논쟁'을 좋아하는 시기이기도 했죠. 친구들이나, 간혹 공개된 SNS에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의견이 서로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니까요. 학교에서 배운 이론들을 끌어다가 요즘 사회 현상을 해석하기도 하고, 세상에 대해 일종의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어디에서도 쉽게 제 생각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실은 드러낼 만한 '생각'이랄 게 딱히 없기 때문이죠. (너무 뻔한 핑계지만) 회사 일만으로도 너무 바쁘고 지쳐서, 무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를 놓아버린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제 스스로가 너무 멍청이가 되어버린 것 같아 책을 읽거나 제 글을 쓰려는 시도들을 조금씩 하고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바로 독서 모임 트레바리입니다. 그중에서도 단순 독후감을 넘어 1,000자 이상의 '내 글'을 적어내야만 하는 모임에 합류했죠. 운이 좋게도 너무나도 좋은 분들을 만나, 함께 책을 읽고 글을 공유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마치 예전의 학부 시절에 경험했던 '지적 쾌락'을 다시금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은 중세 철학 교수를 지내고 있는 멤버 분께서 선뜻 재능 기부를 해주신 덕에 정말 대학에서만 들을 수 있는 교양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했던 바로 그 교양 수업을 말이죠. "저희들의 글쓰기에 단초가 되어줄 것"이라며 고대 철학부터 근세로 넘어가기까지 철학의 큰 줄기들을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서 설명해주셨는데요. 한 때 "경제학과 철학을 전공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겠다"는 저의 어릴 적 각오가 떠오르더군요. 결국은 복수 전공 없이 빨리 졸업하는 걸 택했지만, 계속 학교에 남아 철학까지 배웠다면 지금의 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오랜만에 철학 수업을 들으면서 '존재'나 '인식' 같은 단어들을 들으니 잠시나마 철학에 애정을 가졌던 시기에 향수를 느낍니다. 쑥스럽지만, 벌써 7년 전에 교양으로 들었던 '논리학' 수업에 제출했던 짧은 페이퍼를 오랜만에 꺼내봅니다.
체했을 때 종종 손가락을 딴다. 어릴 적 한 번쯤은 다들 경험해봤을 만큼 지극히 평범한 일이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속이 아픈 것과 손가락? 둘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모두 유기체.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부분들은 지극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한 부분이라도 떼어내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고,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체할 때 손가락에 바늘을 대는 건 손가락 끝 부분이 특히 소화기관을 이어주는 혈자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생리를 할 때쯤이면 턱에 울긋불긋 여드름이 올라오는데, 마치 소화기관과 손가락 끝처럼, 턱 부위는 자궁의 건강상태와 깊은 연관을 갖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도 이처럼 유기적인 체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무엇을 ‘인식’하고, ‘사유’하는 것, 더 나아가서 무언가에 대해 ‘안다’는 것은 견고한 믿음의 체계를 “가꾸어가는 것”과 같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믿음의 체계, 즉 ‘앎’은 절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편견을 경계한다. 토대론자들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명백한 사실로써의 기초적인 믿음을 주로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도출한다. 그렇지만 감각은 편견. 단지 편견일 뿐이다. 내가 며칠 전에 본(감각한) 사과는 노란빛, 초록빛, 그리고 수줍게 붉은빛이 겉도는 초원의 노을 녘과 닮았다. 그런데 오늘 본 사과는 깊은 붉은빛. 하늘은 사라졌다. 어떤 게 진짜 사과일까? 내가 ‘사과’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은 어떤 사과를 떠올릴까? 의심할 수 없는 명제는 없다. 오늘 낮에 봤던 사과는 밤이 되면 또 전혀 다른 빛을 띤다. 무엇이 진짜 사과인 지 확신할 수 없다. 결국 ‘앎’은 완성될 수 없는 것. 개미는 일 벌레라고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근 12년씩이나 개미를 관찰했다고 한다. 그가 쓴 개미의 세계는 경이롭다. 하지만 그도 개미에 대해 다 알지 못한다. 그는 단지 개미를 열심히 감각했을 뿐, 그 자신이 개미는 아니지 않은가! 나 스스로 커서 뭐가 될지 한참 고민하다 깨달은 바로, 나도 나를 잘 알지 못하는데 타자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토대론들의 말마따나 사과나 개미를 볼 때의 현상적 경험을 스스로 정당화되는 기초적인 믿음이라고 한다면, 편견에 갇히게 된다. 감각 경험은 우리의 이성을 거쳐 주체에 의해 각기 다른 사유의 산출물을 내놓는다. 편견에 갇힌 산출물은 온전할 수 없다.
“앎”의 시제는 항상 진행형이다. 아는 것이라기보다는 알아가는 것. 우리는 마주치는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인식하고 사유하면서 견고한 체계를 만들어간다. 기초적인 믿음을 맹신함으로써 편견에 인식 혹은 지식을 가두지 않고,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 말이다. 작은 개개의 벽돌들을 한데 모아 튼튼한 벽을 쌓으려면 시멘트가 필요하다. 이 시멘트가 앎의 체계에서는 일관성. 똑같은 크기의 벽돌들, 즉 어느 곳에도 권위가 부여되어 있지 않은 동등한 믿음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을 때야 튼튼한 벽이 되어 비바람도 견딜 수 있다. 혹자는 이렇게 인식을 하다 보면 결국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근거로 삼는 점을 지적한다. 이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앎의 체계란 유기체와 같다. 동맥에서 나온 피는 정맥으로 다시 들어가 순환하듯이, 명제들도 순환한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다. 나에 대한 다른 무수한 명제들과 모순되지 않으므로 참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렇지만 그럴듯한 견고한 체계 또한 인정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나는 현실과 동떨어진 명제는 참이 될 수 없다는 그들 주장에 회의가 든다. 이 또한 편견으로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대학에서 배우고 있는 무수한 이론들은 다 무의미할까. 이론은 여러 인과관계를 일반화하다 보니 추상적이고, 한 이론의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수많은 전제를 둔다. 이렇다 보니 이론들은 항상 현실과의 괴리감을 필연적으로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이론은 어마어마한 힘을 갖는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현실과 닮은 그럴듯한 모형 속에서, 우리가 특히 관심을 두는 내생변수가 어떤 요소에 의해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할 수 있다. 세계의 여러 요인들의 대부분을 외생변수로 간주하며 수많은 전제를 두고, 내생변수의 움직임을 관찰한 후에야 다른 외생변수들이 변했을 때엔 또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할 수 있다. 이렇듯 모순 없이 일관적인 체계는 현실과는 멀어도 거짓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완전히 망상에 불과한 견고한 체계조차 현실에 유의미할 수 있다. 상상은 지금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던 핵심 요소이다. 이러한 체계를 두고 거짓이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 즉,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능성의 출구를 항상 열어 놓다 보면 어떤 믿음이 진정한 참인지, 모순되지 않은 일관적인 체계가 가능한 지 의구심이 들 수 있다. 모든 게 편견일 수 있으며, 결국은 아무것도 인식할 수도, 알 수도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나의 사유도 그렇게 흘러갔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앎은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안다’는 것은 ‘알아가는 과정에 있다’ 임을 암묵적으로 동의한다면 무언가에 대해 편견 없이 올바로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참들의 일관적인 체계에 다다르게 할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첨언하자면, 우리가 무엇에 대해 "안다(know)"는 것에 대해 철학자들은 "안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지식을 둘러싼 다양한 관점으로는 토대론, 정합론, 증거론, 신빙 주의가 있는데요. 이 중에서도 토대론과 정합론은 철학사의 오랜 논쟁이자 대결이라고 합니다. 토대론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그 자체로 정당화된 믿음을 토대로 합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나는 생각한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토대 믿음'이 되죠. 토대론에 따르면 이러한 토대 믿음(기초 믿음이라고도 합니다)으로부터 연역적으로 다른 '믿음'들이 도출됩니다. 하지만 과연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제가 존재할까요?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는데요. 정합론은 이에 반해 '토대 믿음'에 의지 하지 않고, 여러 '믿음'들 간에 형성된 관계에 따라 서로가 서로의 정당성을 지지한다고 바라봅니다. 이에 따르면 무조건적으로 '참'인 명제는 없습니다. 개별적인 명제들이 모여 체계적이고 일관된 어떤 구조를 형성해 서로에게 근거로, 전제로, 명제로서의 정당성을 지지하죠. 당시 이런 내용들을 배운 후, 각자 토대론과 정합론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 적어 제출하라는 과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정합론을 지지하는 글을 적어 냈죠. 당시 교수님께 "좋은 글을 읽게 해 줘서 고맙다"는 극찬을 받았는데, 오히려 요즘의 저를 보면 크게 실망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사석에서는 오늘 강연이 처음이라던, 트레바리 멤버 분은 도입부에 "생각하고 질문하고 그 답을 찾는다면 우리는 철학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더 시간이 흘러버리기 전에, 다시금 예전처럼 성실하게 배우고 공부하면서 부지런히 '철학'을 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