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악도 악이다
1.
어느 아침, 아버지는 방에서 낡은 상자를 손에 들고 거실에 나타나셨다. 부모님이 해외로 이주하면서 할머니의 물건들이 고모네로 옮겨 갔는데, 그 상자만 아직 우리 집에 남아 있었더랬다. 그 상자 속에는 할머니가 담긴 사진들이 쌓여 있었다. 아버지는 그 사진들을 모아 앨범을 만들겠다고 하셨다.
나는 옛날 사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앨범에 들어갈 사진을 고르는 아버지 옆에서 추억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환갑잔치, 우리 가족과 함께 다녀온 해외여행, 그리고 흑백으로 칠해져 있던 할머니의 모습... 사진 더미를 쥐고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익숙함과 낯섦이 번갈아가며 내게 인사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사진을 넘기다 문득 아쉬움이 생겨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다.
"요즘 우리 모습 보시면 기억하는 데에도 좋을 텐데. 인화를 해둘걸 그랬네요."
"옛날 추억 떠오르게 해 드릴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좋아."
사진 속 할머니는 젊었다. 사실, 사진 속 인물이 너무 젊어 할머니라고 부르기도 미안했다. 지금 우리 부모님보다 어린 나이의 할머니였다. 검고 빼곡한 머리카락, 아직 주름이 덜 든 팽팽한 피부, 선명하게 반짝이는 눈까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했다. 평면의 할머니를 말없이 바라보던 아버지는 웃으며 나와 어머니에게 몇몇 사진을 보여 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오전 내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셨다. 앨범에 사진이 쌓여갈수록, 그의 옆자리에 그리움도 덩달아 쌓이고 있었다.
2.
그날은 아버지가 1년에 한 번 할머니를 만나는 날이었다. 코로나 상황이 악화되면서, 할머니가 계시는 병원에서도 면회를 금지하기 시작했다. 견우와 직녀도 한 해에 한 번씩은 만날 수 있는데, 아버지는 그마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일 위기에 있었다. 그래도 속절없이 할머니께 드릴 사진 속 기억들과 편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속절없었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직원을 통해 전해줄 수 있는 물건들을 준비하는 것 외에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다음 겨울에나 다시 들어올 텐데, 그 사이에 할머니께 무슨 일이 생기면 너희 아버지는 못 산다고. 그런 상황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가장 괴로워한다고. 내게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두 손을 모아 소리 없이 기도했다.
3.
신께서 기도를 들으셨다. 면회는 절대 안 된다는 관계자에 꺾이지 않고, 어머니는 담당 의사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하여 창 밖에서 겨우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마주한 할머니는 아침에 본 사진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눈처럼 소복이 쌓인 흰머리, 피부에 깊게 파인 골짜기, 먼 곳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한 두 눈. 1년 만에 마주한 아버지를 모른 척하듯이, 두 눈은 창 밖 먼 곳만을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가리키면서 누구냐고 물어보던 요양 보호사의 말에도 대꾸하지 않으셨다. 할머니에겐 옛 사진 속 검은 생기가 모조리 빠져나가 버린 것만 같았다.
그날 저녁, 고모들은 남편보다 의지하던 아들이 1년 넘게 나타나지 않아서 할머니가 심통을 부리시는 거라 이야기했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이리라. 그들이 나쁜 의도로 그런 얘기를 하지는 않았을 거야, 어머니는 말했다. 그들이 죄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나쁜 건 그 행동 자체였다는 것을 마음에서 지울 수 없었다.
미래에 누군가가 내게 모르는 것이 죄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게 될 것 같다. 나는 눈이 시리도록 선명하게 기억한다. 지난해,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면회는 안된다 이야기하던 관계자를, 그 말에 할머니의 모습을 멀찌감치라도 보려 오래도록 땅에 닿지 않던 아버지의 뒤꿈치를. 결국 요양보호사의 도움으로 창 너머로 할머니를 마주한 아버지의 표정과 요동치던 뒷모습을. 고모들은 보지 못했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그걸 봤다면, 그걸 알았다면 평생의 가시가 될지 모를 말을 친히 박아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몰랐으니까, 그런 모습들을 보지 못했으니까.
4.
이렇게 인간은 죄인이 된다.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모두가 무죄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름' 때문에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밖에 없다.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또는 다른 사람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분명 나도 누군가에게는 떠올리기 싫을 상처 이리라. 건강검진 결과를 받아 들었을 때 했던 말을 여기서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나쁘다.
말을 쉽게 하게 하는 무지 말고, 다른 죄스러운 무지가 하나 있다. 이것은 젊은 부모님이 담긴 사진이 내게 알려 주었다. 젊은 부모님이 담긴 사진 속 그때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를 비롯한 어린아이들이 그 속에서 젊은 부모들과 웃고 있었다. 아버지와 사진을 정리하며 수많은 사진을 손에 쥐고 넘겨도, 그때의 아름다움은 만져지지 않았다. 아무리 아름다운 시간도 지나고 나면 온 몸으로 느낄 수 없다. 그러나 훗날 사진 속에서 만날 이들이 지금 내 곁에 있다. 그들과 보내는 시간의 아름다움은 만지고 느낄 수 있다. 그 속에서 온전히 흐르지 못한다면, 그만한 죄도 없지 않을까.
현재가 가장 아름답다는 문장은 식상해서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 그러나 이 닳아빠진 문장이 삶에서 시간과 공간이 되어 다가올 때, 나를 울렸다. 수많은 문장을 읽고, 그 문장들이 나를 둘러싼 시공간이 되도록 살아야겠다. 그러다 보면 무지의 그림자는 하나씩 걷히고, 조금은 덜 불쾌한 사람이 되어 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