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네가 군인이야. / 너네가 군인이야? 의 세계
이 문을 열기에 앞서 항상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문에 귀를 대고 밖에 누가 돌아다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다가 다시 멀어진다. 소리로는 확신할 수 없으니, 문을 살짝 열고 주위를 살핀다. 당장 보이는 사람이 없다고 섣불리 움직이면 아니 된다. 목적지의 불투명한 문 너머로 사람의 실루엣이 보이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수행하면, 비로소 움직일 때가 된다.
당신은 누구이기에, 또 어디를 가길래 이리도 신중하게 걸음을 내딛는지 궁금해할 대목이겠다. 나는 화장실에 가려고 하는 소방조직의 최하층민, 의무소방이다.
의무소방이 생소한 사람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면, 의경의 소방 버전이다(이미 폐지가 확정되어 계속 생소해해도 된다). 입대 전부터 수 없이 많은 질문에 휩싸였던 터라, 이 답변이 타인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 복무를 하고 있지만 군인도 국방부 소속도 아닌, 조선시대의 서자와 같은 처지이다.
자신이 양반인지 평민인지 혼란스러워했던 서자들처럼, 우리는 그들이 던지는 한 문장으로 두 가지 정체성을 갖게 된다. “너네가 군인이야.”와 “너네가 군인이야?”. 우리도 모르는 정체가 궁금해서 그들이 이 문장을 우리에게 던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들은 우리에 정체에는 관심이 없다. 저 말들은 철저히 그들의 편의를 대변하는 문장이다. 하기 귀찮은 일이 있거나, 그냥 스트레스 받을 때, 그리고 우리에 비해 자신의 군생활이 초라했다고 느껴질 때는 앞의 문장을 사용한다. 반면에 그들이 보기에 10년도 더 된 군대의 모습과 우리가 부합하지 않을 때에는 여지없이 두 번째 문장을 사용한다. 일관된 한 문장으로 여러 잣대를 세울 수 있음에 나는 내심 감탄하면서도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아, 자꾸 이야기하는 '그들'이 누구냐고? 소방 조직에서 우리를 빼면 누가 남는가?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바로 그 사람들이다.
소방 조직의 최하층에서 생활하는 것은 생각보다 흥미롭다. 인간의 맨 얼굴을 피부에 닿는 가까움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가할 수 없는 존재에게 삐뚤어진 욕구를 날 것 그대로 표출한다. 이를테면 무시와 조롱으로 인간다움을 잃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공개적으로 폭언을 일삼는다거나, 자신의 학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학벌을 조롱하거나, 자신보다 높은 학벌의 아랫사람을 괴롭힌다거나 하는 종류의 행위들 말이다. 우리가 얼마나 흥미로운 놀이 거리가 될지는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아무런 해를 가할 수 없는 데다가, 군인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은 우리의 노예됨을 암묵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내가 자조적으로 사용한 최하층민이라는 단어가 농담만은 아닌 이유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사회생활’이라는 명목 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의방의 업무를 겉으로만 보면 사회생활이 맞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소방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과 함께 근무하며 그들의 일을 분담하는 것이 우리의 업무이니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사회생활은 표면적으로는 동등한 존재로서의 사람끼리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면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다르다.) 직장 내에서 ‘갑질’이 문제가 되는 이유도 (표면적으로는) 평등한 사람끼리 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법과 사회가 인정해주는 수드라이다. 평등하지 않으므로 사회생활이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철저히 밑바닥에 붙어서, 그들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들을 담당한다. 우리가 피우지 않은 담배 더미를 치우고, 쓰레기장을 정리하며 때로는 소방관들의 속옷을 개야 하기도 했다.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도 ‘별로 하는 것 없는 애들’이라는 이야기를 피할 수 없다. 우리가 투명인간이 되어야 했던 이유이다.
퇴근 이후에도 쏟아지는 허드렛일과 모욕을 피해, 우리는 소방관을 피해 다니는 것을 선택했다. 그들과 마주치지 않으면 불행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눈에 띄기만 하면, 언제든 동원해서 일을 시키고, 맘에 안들면 욕하면 되는 대상이니까. 우리는 문자 그대로 투명인간이 되었다. 첫 문단의 화장실 얘기를 듣고 과장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니다. 단적인 예로, 내 맞선임은 화장실에서 나오는 내 실루엣만 보고 생활실까지 돌아온 적이 있다. 그때 서로를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짓던 그 날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투명 인간이 되는 것은 대체로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불시에 생활실로 들어오는 그들의 행동과, 허드렛일을 하달할 때만 울려대는 생활실 전화기에 의해 우리의 노력은 쉽게 허사가 됐다. 하루는 근무를 마치고 초저녁 잠을 자는데 생활실 문이 벌컥 열렸다. 소방관님님(존경 받을 분들이니 님 하나로는 부족하다) 하나가 상기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전화 빨리 안 받고 뭘 하는 거야.”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여기까지 행차하신 이유를 물으니, 눈이 많이 오는데 소방관님들 제설하는 거 돕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는 핀잔이 돌아왔다. 근무가 끝나도 쉬지 말고 전화 울리기만 기다려야 하는 공노비 주제에 전화를 받지 못해 정말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어, 꾸벅꾸벅 고개를 숙여가며 죄송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이쯤에서 우리의 모습이 답답하다고 느껴지는 이가 있는가. 지극히 정상이다. 상황이 그리 부당하다면 목소리를 내고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상황은 그들의 편이다. 민원은 지나가고 우리는 소방서에 남는다. 민원이 효과가 있어서 관련자 몇몇이 징계를 받았다고 치자. 여기 남아 있는 그들의 동료였던 사람들은 우리를 무엇으로 볼까? 그런 상황이 다시 벌어지면 우리는 또 민원을 넣어야 할까? 그러면 담당자에게 우리의 이야기는 수시로 보채는 아기의 소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까? 민원이 효과가 사라지자, 상위 기관에 제보했다고 하자.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도 ‘요즘 군대는 군대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저녁식사에서 '요즘 애들은 말이야~’로 시작하는 대화거리로 소비될 뿐이다.
군대와 군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그렇다. '막 부려도 되는 사람이다. 어차피 안 볼 사람들 실컷 부려나 먹자. 어차피 우리한테 찍소리도 못하는 걸.'
모두가 피해자이다. 그리고 다녀온 이들은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행동한다. 이것은 군대가 친숙한 나라가 겪는 비극이다. 전쟁이 어떻고 인권이 어떻고 하는 원론적인 이야기보다, 2년 가까이의 시간을 공인된 노비로 소비하는 것이 아무런 감정도 일으키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모두가 다녀왔으니, 너도 감수하라는 식의 이야기로 그 많던 피해자들은 다시 가해자가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꽤 자주 감사함을 느낀다. 또, 꽤 자주 웃는다. 그 이유는, 생활실 전화기에서 허드렛일이 아니라 우리를 기억하고, 함께 먹을 것을 나누는 이들의 소리가 이따금씩 들리기 때문이고, 세대가 달라 어렵지만 우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주는 진짜 어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며 더 자라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갈밭에서도 굳건히 서서 꽃을 피워낸 이들이 우리에게 힘을 주었으니,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피해자가 더 이상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기꺼이 다시 자갈밭으로 들어가는 홑씨가 되어야겠다.
커버 사진 - Markus Spiske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