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여행 1일 차
매해는 아니지만 12월에는 주말을 끼운 4,5일 정도의 휴가 기간을 가졌다. 회사의 사업 부분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11월까지 사업 평가를 하고, 12월은 다음 해 이동, 사업 시작을 위한 정리, 보충, 휴식 기간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휴가 이후 복귀하고도 밀린 업무 부담이 적어 12월 휴가를 좋아한다.
휴가를 계획하던 10월 즈음, 제주로 갈지 경주로 갈지 장소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제주 쪽으로 많이 기울긴 했지만 혹여라도 기상 악화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여의치 않을까 봐 며칠을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눈 때문에 부산행 비행기가 이륙을 못한다면 그것은 천재지변으로 인한 것이니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부산-제주 왕복 티켓을 예약했다. 중문에 있는 호텔도 2박 예약해 두고선 12월을 손꼽아 기다렸다. 남편에게는 회사 선배들과 함께 가는 여행이라고 둘러댔다. 홀로 여행하려는 내 취향을 존중하는 남편이지만 어쩐지 이번엔 미안해서 솔직하게 다 말하지 못했다.
12월이 되고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다시 한번 여행지에 대한 갈등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제주 산지 대설주의보, 강풍주의보가 들려오면서 '에라 모르겠다.'가 아닌 '어쩌나......' 하면서 고민이 이어졌다. 마음 편하게 쉬려고 하는 여행이 시작부터 삐걱대는 게 싫어서 과감하게 비행기와 호텔 예약을 취소하고 경주로 변경했다.
12월 휴가의 테마는 늘 똑같다.
책 읽기, 걷기, 카페에서 멍 때리기, 좋아하는 음식을 먹되 과식하지 않기.
오늘 오전, 경주에 도착하니 10시 20분이다.
차는 숙소인 회사 연수원에 주차시켜 두고 오후 3시 입실 전까지 많이 읽고, 많이 걸을 계획으로 모든 짐을 차에 두고 책 한 권과 휴대전화기, 카드 한 장만 지닌 채 최대한 가볍게 나섰다. 바람이 꽤 차가워 목도리를 귀까지 단단히 여미고 자주 가는 카페로 향했다. 추워서인지 카페 안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통창을 바라볼 수 있는 다인용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담긴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며 창밖을 바라봤다. 집 밖을 나와서일까, 집 생각도 회사 생각도 안 나고 오로지 지금 그냥 좋다는 느낌만 내 마음에서 차올랐다. 한참을 넋 놓고 있다가 책을 읽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중간중간 마시던 커피는 다 식었고, 많던 사람들도 다 빠져나가서 남아있는 대부분은 책을 읽거나 노트북 자판을 치는 사람들뿐이다. 다시 한번 통창 너머 풍경을 바라보았다. 주말 휴일 이틀 중 하루의 오전은 나의 시간으로 확보해 두며 카페에서 책을 읽으리라고 다짐하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 욕실 청소, 밑반찬 준비등으로 분주해질 생각에 한 시간 채 집중하기도 힘든데 이렇게 두 시간 넘게 독서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게 마냥 좋았다. 남편에 대한 미안함도, 내일과 모레 이틀 동안 업무 대직을 봐야 할 선배에 대한 미안함도 다 사라지고 '혼자 오길 잘했다.'는 확신과 몽실몽실한 편한 마음만 채워졌다.
한 시간가량 더 책을 읽다가 허기가 느껴져 늦은 점심 식사를 하러 나섰다.
따뜻한 국물 음식이 생각나 인근 중식당에서 짬뽕과 공깃밥을 주문해서 먹었다.
삼삼오오 모여 조용히 담소를 나누며 그릇, 수저 달그락 소리도 조심스럽게 느껴지는 식당의 분위기 속에서 4인용 식탁에 혼자 앉아 창밖 풍경도 보면서 천천히 식사했다. 평소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먹거나, 출근하는 차 안에서 운전하다가 정지 신호에 차가 멈추면 집에서 급히 싸 온 과일이나 김밥을 한 조각씩 먹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욱여넣는다.'가 더 어울리는 내 모습.
휴가 내는 것도 늘 조심스럽고, 여행 한 번 가려면 집안일을 모두 해 놓고 떠나야 마음 편한 나.
그 편한 마음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젠 조금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나를 위해서.
3일 동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자.
내일은 보문에서 대릉원까지 걸어서 가 볼 생각이다.
걸으면서 내 숨소리, 발걸음을 살피고 주변 풍경을 보면서 내 눈을 즐겁게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