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여행 2일 차,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
어젯밤 아홉 시가 조금 넘어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리조트형 숙소이다 보니 보통 서너 명의 한 팀, 또는 그렇게 두 팀이 모여 늦은 시각까지 즐기는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이곳은 회사에서 운영하는 연수원의 휴양시설이라서 투숙객 모두가 직원이거나 직원과 관계된 사람들이라 모르는 사람이어도 엘리베이터에서는 가볍게 목례를 하게 된다. 어제는 체크인하려고 프런트로 가던 중에 지난달 교육받았던 교육원의 교수님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나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아이코! 집과 회사에서 잠시 떠나 있으려 하면서도 저렴한 가격의 회사 연수원을 포기할 수 없는 나의 모순이 드러났다.
저 웃음소리, 가끔 높아지는 목소리에 내가 쉬이 잠들 수 있을까.
눈을 뜨니 새벽 4시 50분, 평소보다 30분 일찍 깨어났다. 어젯밤 들려왔던 웃음소리에 대한 기억도 가물거린다. 나는 꽤 잘 잤나 보다.
양치질을 하고, 갑상선 약을 먹으면서 물 한 컵을 마셨다. 커튼을 여니 아직 어둠이 한참이다.
다시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두 다리는 약간 벌리고, 두 팔은 벌려서 손바닥은 천장을 향하게 해 두었다.
길고, 깊은숨 쉬기를 반복하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제는 읽기에 집중했다면 오늘은 걷기에 집중할 계획이다.
아침 식사로 사과와 삶은 계란을 먹고 숙소를 나섰다. 아침 7시 40분.
확실히 부산보다 경주가 춥다. 길을 나서는데 추위의 느낌이 사뭇 달랐다. 10분 정도 걷다가 너무 추워서 다시 돌아갈까 하고 망설였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걷기 좋은 보문의 거리와 월요일이라서 한적한 분위기도 포기 못하겠는 내 마음은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걸었다.
숙소에서 소노캄, 라한 호텔, 한화 리조트까지. 한 시간가량 걸었다. 목표는 황리단길 대릉원인데 추워서 더 이상은 무리였다. 귀와 뺨이 얼얼해지고, 콧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어정쩡한 위치에서 추위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대릉원까지 버스를 타고 갈 것인가, 여기서부터 숙소까지 버스를 타고 돌아갈 것인가. 안경에 서린 김이 버스 정류소 찾는데도 방해가 되었지만 그 와중에 불 켜진 커피점이 보여 '일단 들어가자.'하고 냉큼 뛰어들었다. 어제처럼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에 언 손과 귀와 뺨을 녹여본다.
가난의 끝이 보이지 않던 20대에는 길을 지나다가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여유가 있어야 저런 곳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지?'라는 의문을 종종 가지곤 했다. 그때는 춥다고 몸을 녹일 거라고 카페에 들어간다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여유롭게 햇살이 들어오는 카페에 앉아있으니 그때의 내가 생각났다.
삼십 분 가량 멍하니 앉아 커피를 마시고 다시 걸어볼 작정으로 나섰다. 목적지 대릉원이 아니라 보문호수 둘레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늘 다녔던 둘레길 코스가 아닌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호수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보였다.
호수 둘레길을 걷는 중간에 사진도 찍고, 서서 호수를 바라보기도 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애써 누르지 않고 그냥 두었다. 여행이 현실도피라고 말하는 사람, 여행이 재충전이라고 말하는 사람. 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후자에 더 가깝다. 내가 기꺼이 채우고자 하는 하루하루가 결코 만만하지는 않기에 저녁이면 녹초가 되고, 또 다음 날 아침이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시작하지만 때로는 그런 하루를 잘 살아가기 위해 잠시 접어두고 이렇게 시간을 가지는 것은 내게 무척이나 의미 있고 소중하다. 아직도 많이 헤매고 있지만 내 곁에 현명하고 진지한 남편과 책임감 있고 성실한 직장 선배들이 있기에 나는 가정과 직장의 양립을 잘 이어왔을 것이다. 늘 고맙지만 나 스스로에게도 시간과 여유를 내어주어야 잘 이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기에 (남편에게는 둘러댔지만) 혼자만의 어제 오늘 내일이 꼭 필요하고 소중하다.
두 시간가량 걷고 숙소로 돌아와 책을 들고 다시 카페로 향했다. 또다시 읽기에 흠뻑 젖어들었다가 걷다가 낮잠에 들었다가 또 걷는다. 걸으면서 내 마음의 독소를 다 빼낸다. 아무도 찾지 않는 나의 휴대 전화기는 그저 시계에 불과하다. 나는 조용히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