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주재원 생활의 환상이 깨지다
부동산 시세가 꼭짓점을 찍던 2021년 11월. 8년의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임했다.
코로나 격리 2주가 끝나고, 딸 아이 학교 때문에 석 달 먼저 귀국한 아내가 구해놓은 전셋집으로 향했다.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직감했다.
‘아, 내 인생이 쪼그라들고 있구나.’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80평 규모의 3층짜리 타운하우스에 살았다.
정원이 딸린 독채에서 누리던 여유는 온데간데없고, 20년 된 구축 아파트의 좁은 복도가 나를 맞이했다.
25평, 방 셋, 화장실 둘. 그 좁은 틈 사이로 내 인생을 억지로 구겨 넣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내를 원망할 순 없었다.
남편도 없이 한여름 땡볕 아래 서울 전역을 헤매며 집을 구하던 아내였다.
"지하철역 근처면 아무데나 상관없어"라며 모든 선택권을 떠넘겼던 건 나였으니까.
주재원이라는 '관리자'의 삶은 달콤했다. 회사는 가족의 삶을 완벽하게 서포트해 준다.
월세 500~600만 원대의 고가 주택,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 환경.
그 안락함 속에 있다보니 나는 어느덧 그 집들이 정말 내 것인냥 취해 있었던 것 같다.
정작 내 가족의 진짜 터전인 '서울 내 집 마련'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나 있었다.
해외에서 몸을 갈아 넣으며 8년간 5억이 넘는 돈을 모았다.
파견 전 자금까지 합치면 얼추 7억. 내심 이 정도면 서울 중상급지 아파트 한 칸은 너끈히 살 줄 알았다. 정말 안일했고, 무지했다.
당시 7억에 대출을 영끌했다면 12~13억대 서울 구축이라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눈만 높았다. 강남 3구와 마용성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았고, 낡은 집에서 '몸테크'를 할 마음가짐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부동산에 관해서라면 나는 그야말로 '무뇌아'였다.
결국 아내가 고심 끝에 선택한 곳은 경기도 부천 상동의 17년 차 아파트였다.
입주 한 달 뒤, 주재국에서 보낸 이삿짐이 도착했다.
짐을 옮기던 직원은 "25평에 이렇게 짐이 많은 집은 처음"이라며 하루 종일 투덜댔다.
결국 수용 한계를 넘긴 짐들은 화장실 한 칸에 박스째 쌓였고, 우리 집 화장실 하나는 그렇게 창고가 되었다.
우울함과 현실감이 동시에 엄습했다.
화장실 문을 닫으며 생각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하지만 자책할 시간조차 없었다.
냉혹하고도 진짜배기인 '한국 라이프'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