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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텅 빈 방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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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은 Jul 23. 2022

마음에 남은 텅 빈 방

- 베를린, 폴란드 일기 20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우리는 따로 앉았다. 내 양옆으로는 남자들이 앉았는데, 장시간 비행을 하면서 이분들이 쩍벌로 다리를 벌리는 바람에 열시간이 넘도록 거의 불편하게 앉아 왔다.

첫째는 출근했고, 우리는 밀린 빨래를 꺼냈다. 세탁기를 돌리는 사이에 뻗어서 잠들었다. 일어나자마자 여행 짐을 분류하고, 정리했다. 마그넷을 붙이고, 열쇠고리와 종을 진열하고, 둘째 방을 열었다. 

고요했다.


퇴근한 첫째는 우리를 보자마자 수다를 떨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우리는 맞장구를 쳐주고, 같이 하리보를 먹었고, 선물을 줬다.     


한동안 사진을 분류하고 자료를 정리하면서 그곳에 푹 빠져 살았다. 여행 내내 가방과 소지품은 안전했다. 한번도 털린 적이 없었다. 마드리드에서는 세 번이나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경험이 없었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주저한 마음이 어색할 정도였다. 

    

아이스크림은 맛있고, 음식은 별로 짜지 않았고, 황동 연필깎이는 멋졌다. 운터 덴 린덴에 흐드러지게 폈던 보리수나무 꽃과 베를린에는 지하시설이 많아서 위로 설치했다는 지상으로 뻗은 상하수도 관이 비현실적인 세계처럼 가끔 떠올랐다. 



바르샤바 오페라 극장 앞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던 젊은이도 생각난다. 그가 들고 있던 꽃다발은 꽃 한 묶음을 리본으로 묶은 게 다였다. 부직포도, 철사도 없는 온전한 꽃다발이었다.    

  

여행을 다녀온 뒤, 둘째가 훈련소에서 퇴소하는 날이 다가왔다. 전날 일찍 잠들어야 논산으로 새벽에 출발할 텐데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잘 오는 차도 마셨는데 말똥말똥 했다. 나와 반려는 똑같이 꼴딱 밤을 새우고 이럴 바에는 그냥 출발하자, 새벽에 길을 나섰다.  


일찍 논산에 도착해 해장국으로 아침을 먹고, 근처에서 기다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둘째를 만났다. 검게 타고, 군복을 입고 나온 둘째를 보자 긴장이 풀어졌다.

“보고 싶었어.”

“나도요.”

둘째는 우리에게 여행을 다녀온 멋진 인생이라며 추켜세웠고, 우리는 둘째에게 잘 견뎌줘서 고맙다고 했다. 며칠 뒤 다시 검사한 결과, 수치는 올라갔고 약이 다시 늘었지만 그래도 별 탈 없이 돌아온 것만으로 충분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연착해서 우리를 괴롭혔던 LOT 항공에는 보상금을 신청했다. 연착한 시간이 긴데다 연결편을 놓쳐 다음날까지 바르샤바에 있었던 우리에겐 1인당 600유로가 보상금으로 입금되었다. 그리고 여행자보험에서도 연착으로 인한 보상을 받았다. 연착 때문에 스트레스는 받았지만, 우리는 항공기값의 90%를 돌려받은 셈이다. 

    

무거웠던 짐은 올 때 더 가벼워져서 돌아왔다. 가져간 음식들은 다 먹었고, 우산 하나는 살대가 부러져서 버렸고 옷도 몇 벌 버렸다. 기념품은 조금 샀고, 여행을 다녀왔다고 아는 사람에게 선물할 물건으로는 몇 개만 샀다. 친척과 지인들을 모두 챙겼던 예전에 비하면 정말 단촐한 귀국이었다.     


지금도 그 텅 빈 방들을 떠올린다. 내가 둘러본 장소에서 느낀, 텅 빈 방은 강렬했다. 예전에 독일 다하우 수용소에서 느꼈던 것보다 몇 배 더 강했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바르샤바. 이곳에서 보고 겪은 경험들은 베를린과 드레스덴에서 본 것들과 확연히 달랐다. 전쟁으로 빈 방들은 채워지지 않는다. 아무리 새 것처럼 다시 만든다 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 그래서 그런 빈 방은 생기지 않아야 한다.     


여행 내내 일정을 짜고, 예매와 예약을 했던 반려에게 감사한다. 또한 함께 한 나비에게 특별히 감사를 표한다. 당신들과 함께 한 여행이어서 기뻤다. 혼자였다면 쓸쓸함과 슬픔이 나를 더 힘들게 했을 테지만, 덕분에 끝까지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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