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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군분투 서른살 Jan 02. 2024

" 너 거길 왜 간 건데?"

09. 코티카에서 생긴 일


오늘은 26km로 지난 6일 간 걸었던 키로 수에 비해 짧아 느지막이 5시 30분에 길을 나섰다.

그래도 아직까진 달과 별이 떠있다.


달빛과 헤드랜턴에 의지해 토마르에서 벗어났다.

토마르 마을을 벗어나는 풍경은 목적지를 향해 빨리 가야 하는 순례길만 아니었다면, 넋 놓고 볼 만큼 아름다웠다.

뭐가 이리 바쁜 건지,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작정 발길을 재촉했다.


여기까지 와서 경주마처럼 달리기만 할 거면 뭐 하러 왔을까? 그러지 말자, 그러지 말자! 해도 천성을 버리긴 어렵다.


어차피 이렇게 걸을 바에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맞지 않을까? 예약한 항공사 홈페이지에 접속해 일정 변경에 대해 문의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자 취소 문의를 남기고 답신을 기다리는 시간이 산티아고에 와서 가장 희망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현시점에서는 과거의 내가 왜 이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는지 조금은 의아하다. 인간은 참 간사하다는 걸 느낀다..)

하지만 변경과 취소가 불가하다는 답신이 왔다.


이럴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좌절과 실망감이 찾아왔다.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지니 인천공항에서 두 팔을 벌려 나를 반겨줄 남편의 모습이 그려지며, 더욱 향수가 심해진다.

사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살아지는 것이라는 얘기가 이제야 와닿는다.


걸으며 남편에게 이런 얘길 하니, 차라리 사람들이 많이 걷는 포르토로 점프해 걷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기차를 타고 100km 넘게 점프해야 하기 때문에 선뜻 그러겠다고 하지 못했다.

그래도 최대한 걸어보겠다고 얘길 했다.

아직까지 쓸데없는 신념이 있는 걸 보니, 덜 힘든가 보다..


그간 30km 이상 걸어왔던 것에 비하면 23km는 껌이다.

점심 무렵 숙소에 도착해 샐러드와 와인을 마시고 있으니, 캐나다에서 온 50대 아저씨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원래 다른 곳에 숙소를 잡아놨으나 이 숙소가 너무 좋아 보여 자기도 여기서 묵겠다고 한다.


코티카는 순례자들이 많이 묵는 마을이 아니라, 오늘 숙박객이 혼자라는 생각에 걱정이 됐는데 다행이다.


재작년에 딸과 함께 순례길을 완주했다는 아저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해 솔직히 얘기해 본 것 같다.


대화 중 표현하고자 하는 말이 생각이 안 나, 번역기를 쓰려할 때마다 너는 할 수 있다며 기다려주기까지..

드디어 내 순례길에서도 이런 의인을 만나는구나!


멋진 풍경을 배경 삼아 같이 와인 한 병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갑자기 김정은 얘길 하다 동양의 성문화에 대한 주제로 얘길 시작한다.


워낙 자유로운 사람들이라 이러는 걸까?라는 생각에 정보 전달 차원에서 몇 마디 거들었더니 점점 수위가 높아진다.


미친놈이었네...


그냥 미친놈 취급하고 안 보면 그만인데 오늘 이 숙소엔 나랑, 이 아저씨 단 둘 뿐이고, 방도 같이 써야 한다..

게다가 스탭은 21시에 퇴근한단다.

걱정되는 마음에 스탭에게 이런 상황을 겪었다 얘기하니 잠금장치가 있는 독방을 내어주고, 본인도 24시 넘어서 퇴근해주겠다고 한다.


이런 호의와 물리적 안전장치에도 불안한 마음에 자는 둥 마는 숭하다 날이 밝았다.


아침 10시쯤 어제 스탭에게 혹시 코임브라까지 차로 데려다줄 수 있냐 물었다. 50유로 데려다주겠다는 말에 냉큼 "오브리 가다!"를 외치고 차에 탔다.


 한화로 6만 원이 넘는 돈이 너무나 아까웠지만 무사 완주를 위해 내린 선택이다.


코임브라는 포르투갈에서도 꽤나 큰 도시에 속한다. 교육의 도시답게 '해리포터'의 모티브가 된 대학교도 있고, 서점도 있다. 특히 호그와트 학생들의 까만 망토가 코임브라 대학의 망토에서 착안했다 한다.


큰 도시답게 관광객도 많다. 오늘은 나도 관광객!

관광객 모드일 때는 카메라가 있어 참 다행스럽다. 손에 카메라가 들려 있고, 무언갈 찍고 있는 게 덜 뻘쭘하다고 해야 하나..

오래간만에 한식도 먹고, 커피와 디저트도 즐겼다.

그리고 큰 강가 앞에서 퇴근한 남편과 통화를 했다.


내일 포르투로 넘어가 걷기 시작하면 완주까지 7일이 단축되는데, 단축된 시간만큼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간 계속 위로와 응원을 해주던 남편도 이제 한숨을 푹 내쉰다.


"도대체 거길 왜 간 거야?, 갔으면 즐겨야지 왜 하루종일 한국으로 돌아올 궁리만 하는 건 지 이해가 안 돼. 그렇게까지 해서 완주를 하는 게 너한테 의미가 있어?"


도무지 반박을 할 수 없는 완벽한 팩트폭행이다. 반박도 핑계도 댈 수 없었다.

스스로도 왜 온건 지 의문을 품고 있었던 상황이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도 완주는 하고 갈 거야."라는 말을 하곤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정말 이상한 순례길을 걷고 있다. 행복과 불행 사이에선 불행에 가까운 순례길이라 생각한다.

미디어를 통해 접한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였는데 나만 왜 이럴까

불행한 사람들이 노출되지 않았을 뿐인가


아 정말 모르겠다.


정말 이상한 건 그럼에도 산티아고까지는 걷고 싶다는 거다.

며칠 쉬며 마음을 정리해 보자..

과연 나는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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