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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로 간직하기로 한 나의 10킬로 완주

by 찌니


평일의 아침 8시 30분경. 도로에 차들이 빼곡하다. 횡단보도 앞에도 버스정류장에도 사람들이 모여있다. 대부분 출근하는 젊은 사람들이다. 또다시 찾아온 꽃샘추위로 모두들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조금씩은 다급하고 초조한 모습들이다. 초등학교와 유치원 앞에는 아이와 부모가 반반으로 뒤엉켜 다급한 초조함에 더해 소란스럽고도 활기차다.


그 가운데를 혹은 그들을 피해서 빈 공간을 찾아 내가 달려 나간다. 공간이 좁아 몸을 옆으로 해서 잠시 걷는듯 하기도 한다. 나는 조금도 다급하고 초조하지 않다. 소란스럽고 활기차지도 않다. 나는 그들의 시간을 건너 와 이제 천천히 게으르고 느리게 부는 바람 같은 시간을 살게 되었으므로. 아니 그렇게 살기로 했으므로.


이번에도 달리기 앱에 목표거리를 10킬로로 설정해 놨다. 벌써 3번째 10 킬로 도전이다. 7 킬로에서 몇 달 동안 머물러 있던 내가.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겠다던 내가.


시작은 늘 단순했다. 6일 전 꽃샘추위가 지나간 따뜻한 날이었다. 바람도 햇살도 부드럽고 따스했다. 그날은 윈드재킷 안에 덧입던 경량의 집업을 입지 않았고 하의도 얇고 가벼운 걸로 바꿔 입었다. 집을 막 나섰을 때는 약간 선뜩했지만 아주 잠시였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


오래전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배우 김혜자 님의 명대사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아침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그래서인지 정말 바람이 정말, 진짜로 달큰했다.


ㅇㅇ천이 보이기 시작하자 달리기 앱을 켰다. 거리 설정 7킬로에서 멈췄다. 손가락이 망설이고 있었다. 달큰한 봄바람이 귓가에 유혹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10킬로... 달려 봐... 오늘 같은 날은 7킬로가 너무 짧을 것 같지 않아?... 나는 그 유혹에 어이없이 넘어갔다.


내가 사용하는 달리기 앱은 8킬로 9킬로 설정은 없다. 7킬로에서 바로 10킬로 설정으로 건너뛴다. 그리고 설정목표에서 단 1킬로만 모자라도 기록을 남겨주지 않는다. 그날의 달리기를 완전 날려 버린다. 시작했으면 완주하라, 완주만 인정해 주고 완주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뜻인가 보았다.


10킬로 목표에 평균페이스도 6분대에서 7분대로 1분 늘려서 설정했다. 이게 뭐라고... 괜히 긴장되었다. 혼자서 망설이고 혼자서 결정한 것을 이렇게 긴장할 일이냐고...

7킬로가 45 - 47분 정도였으니 1시간은 넘게 달려야 할 것이었다. 페이스 조절이 중요하다. 좀 더 천천히 달리자...


자... 요이... 땅!!!


연두색 조끼를 입은 공공근로 어르신들이 모여 앉아 꽃모종을 심고 계신다. 건너편 강가에선 포클레인이 땅을 파헤치고 있다. 물가 벤치마다 사람들이 둘씩 셋씩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바람이 만들어 놓은 잔 물결무늬 위에 윤슬이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오리가족도 봄햇살 봄바람을 즐기려는 듯 강의 한가운데를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아니 헤엄친다기보다 물결에 몸을 맡긴 채 떠내려가고 있는 듯하다. 흰색 왜가리는 오늘도 저 혼자 고고하다. 늘어진 버들가지에 희미한 연둣빛이 어른거린다. 특히 한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나온 노인들이 장기나 바둑을 두느라 왁자하던 다리 밑, 겨울 동안 텅 비어 있던 그 다리 밑에도 아직은 두꺼운 옷을 입은 노인들이 여럿 나와 앉아 있다. 누런 검불을 헤집고 푸릇푸릇한 풀들이 제법 많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먹이를 찾아 검불을 헤집는 까치 무리와 무엇에 놀란 듯 갑자기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호들갑스럽고도 힘차게 날아 옮겨 앉는 참새떼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봄의 기지개에 천변은 이렇게 수선스럽고 활기차다. 그 깨어나는 생명력 속을 내가 달린다.


늘 돌아가던 반환지점에서 2킬로를 더 달렸다. '네... 5킬로 절반을 달리셨습니다. 페이스 조절하시며 힘내시기 바랍니다... ' 앱에서 힘차게 응원을 보냈다.

5킬로까지는 그림자가 앞에 있었고 바람이 등뒤에서 불었다. 반환점을 돌자마자 그림자는 바로 뒤쪽에 가서 달라붙었고 바람은 앞에서 불어왔다. 예상했던 것만큼 그리 힘들지 않았다.

모든 일이 예상보다는 덜 힘들다. 예상은 거의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만 막상 닥치면 그렇게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드물다. 그걸 알면서도 늘 앞서 예상하고 걱정하고 앞서 좌절한다. 미래도 그럴 것이다. 불안하고 위태롭고 외로움과 늙음과 병듦으로 점철되어 암울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막상 닥치면 살만하고 살아질 테니까.


8킬로 넘게 달리고 있을 즈음 완벽한 몸매와 완벽한 러닝복장을 한 젊은 여자가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넘은 듯한 남자를 트레이닝하는 모습을 보았다. 골반이 틀어지셔서 자세가 나오지 않는 거거든요. 오래 달릴 수도 없으실 거고요... 일단은... 트레이너의 목소리는 프로패셔널했다.


나는 트레이너 없이 혼자서 여기까지 왔다. 지난해 10월 시작했으니까 거의 6개월 걸렸다. 중간에 근육경직으로 인한 통증으로 한 달 가까이 쉬기는 했지만.

틈틈이 유튜브 들어가 러닝 관련 숏폼을 보며 자세를 교정하고 자세를 잡아가며 내 몸에 맞는 자세와 페이스를 찾아가며 조절했다. 그리고 지금, 혼자, 10킬로 완주를 코앞에 두고 있다. 한 번은 우연이었겠으나 세 번째니까 실력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겠나...나 자신이 기특하고 기특했다.


8킬로를 넘기자 힘이 너무 들어서 다리를 끌고 가는 건가 싶어 졌으나 언제부터인가 어쩐지 다시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러너스하이'라는 것인가 싶었다. 헤로인이나 모르핀을 투약했을 때 나타나는 행복하고 황홀한 느낌 같은... 다리와 팔이 가벼워지고 리듬감이 생기며 피로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힘이 생긴다는 '러너스하이'는 30분 이상 뛰었을 때라고 한다. 나는 그동안 7킬로 45분 정도를 뛸 때는 잘 몰랐다. 그런데 50분을 넘기자 어쩐지 그런 기분인 것 같았다. 힘들어 죽겠는 순간을 지나자 몸이 가벼운 듯한 느낌 그리고 더욱 가벼운 건 마음, 가볍게 둥실둥실 떠오를 것 같은 마음...


나는 그렇게 10킬로를 완주했다. 쭉 완주해 가고 있다. 아직은 달랑 세 번에 불과하지만. 당연히 중간에 쉬거나 걷지 않았다.


3월 11일 첫 기록은 1시간 9분 23초 평균페이스 6.56

3월 13일 두 번째 기록은 1 시간 8분 52초에 평균페이스 6.53

그리고 3월 17일 세 번째 기록은 1시간 8분 32초에 평균페이스 6.51


아주 조금씩, 기록이 아니라면 조금도 티 나지 않을 미미한 시간이지만 어쨌든 단축되었다.


나는 나의 이 10킬로 완주 사실을 아무와도 공유하지 않았다. 달리기 앱에서는 신기록을 달성하셨다고, 당신의 기록을 누군가와 공유하시라고 성화였지만 나는 어쩐지 환호도 갈채도 응원도 없는 고독한 나만의 1시간이 넘는 레이스를 당분간 비밀로 간직하고 싶어졌다.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뜬금없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장 그르니에의 '섬'의 한 구절이 뗘올랐다. 도대체 달리기와 저 문장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20대 때 만난, 무척이나 좋아하는 문장. 바야흐로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떠나고 싶은 열망에 온몸이 간지러울 봄이라지만 말이다.

그런데 내가 10킬로 완주 사실을 비밀로 간직하자고 마음먹은 후에 저 문장이 떠오른 건지, 저 문장이 떠올라서 비밀로 간직하고 싶어진 건지는 확실치가 않다.


어쨌든 나는 당분간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하루가 갈지 이틀이 갈지 일주일이 갈지는 나도 모른다. 확실한 건 그리 오래갈 것 같지는 않다는 거다.


#달리기 #10킬로 완주 #러너스 하이 #눈이 부시게 #비밀 #머니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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