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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병이'를 아시나요?

by 찌니
'현대소설의 이해와 감상' 53 p

지난 2일은 방통대 출석수업 날이었다. 9시부터 시작되어 출근시간 전철을 타야 했다. 여전히 콩나물시루였다. 생각해 보니 퇴사한 지 겨우 2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출근시간대의 콩나물시루 같은 전철이 낯선 세상인 듯 놀라웠다. 사람들한테 눌려서 겨우 핸드폰을 든 한쪽 팔만 눈 가까이 올리고 이동했다. 전철에서 내려 이제는 익숙해진 길을 걸었다. 콘크리트 건물 사이사이 하얀 백목련과 산수유 노란 꽃들이 피어 있었고 바람은 차가웠지만 노트북과 교과서가 든 무거운 백팩을 매고 급히 걸어가느라 몸은 후끈거렸다.


내가 들을 강의는 '글과 생각'과 '현대소설의 이해와 감상'이었다. 두 과목 모두 1학년 전공과목인데 수강신청 추가 변경 마지막 날 수강 신청한 3학년 전공과목인 '옛 수필의 이해'와 '고전시가론'을 빼고 선택한 과목이었다. 책도 받았고 몇 강의 듣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어렵고 자신이 없었다. 기초를 좀 더 다지고 싶어졌다.


'글과 생각'은 '옛글과의 교유'라는 주제로 옛날 수필과 시에 대한 강의였다. 수필로는 '최칠칠 전(화가 최북에 대한 글)' '온달전' '홍덕보묘지명' '유수묘지명' '답전부' ' 애오잠' 등을, 시로는 '구일' ' 규정, ' '도망(悼亡), ' '제가야산독서당' '박연' 등이었다. 강사는 젊은 호남형의 남자였다. 하고 많은 공부 중 하필이면 옛글을 공부하게 되었을까... 그 계기가 어떻든 이런 한 두 분의 특별한 사람으로 인해 인류의 문화는 끊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는 것이겠지... 열강하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오후 4시부터 시작된 '현대소설의 이해와 감상'은 김유정 소설 '안해(아내)'와 '조선의 집시 -들병이 철학'에 대한 강의였다. 교수님이 프린트해 준 강의 자료인 김유정의 수필 '조선의 집시 - 들병이 철학'은 '아내를 구경거리로 개방할 의사가 있는가, 혹은 그만한 용기가 있는가...'로 시작된다. 들병이란 남편이 있음에도 생계를 위해 술을 팔고 몸을 파는 여자를 뜻한다.


< 가을은 농촌의 유일한 명절이다. 그와 동시에 여러 위협과 굴욕을 겪고 나는 한 역경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지주와 빚쟁이에게 수확물을 주고 다시 한겨울을 염려하기 위해 한 해 동안 땀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들병이가 되면 밥은 식성대로 먹을 수 있다는 것과 또는 그 준비에 돈 한 푼 안 든다는 이것에 그들은 매혹된다....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앉아서 소리를 가르친다. 낮에는 물론 벌어야 먹으니까 그럴 여가가 없고 밤에 들어와서는 아내를 가르친다. 재조 없으면 몇 달도 걸리고 총명하다면 한 달포 만에 끝이 난다.... 촌의 술집에서는 어디고 들병이를 환영한다. 아무개 집에 들병이 들었다 하면 그날 밤으로 젊은 축들은 몰려든다. 소리 조금만 먼저 해보라는 놈, 통성명만으로 낼 밤의 밀회를 약속하는 놈, 혹은 데리고 철야하는 놈... 하여튼 음산하던 술집이 이렇게 담박 활기를 띄인다.... 들병이가 들면 그날 밤부터 동리의 청년들은 떼난봉이 난다. 그렇다고 무모히 산재(재산을 이리저리 써서 없애 버림)를 한다든가 탈선은 아니한다. 모쪼록 염가로 향락하도록 강구하고 노는 것이 버릇이다. 여섯이고 몇이고 작당하고 추렴을 모여 술을 먹는다. 한 사람이 50전씩을 낸다면 도합 3원 - 그 3원을 가지고 제각기 3원어치 권세를 표방하며 거기에 부수되는 염태(아리따운 모양이나 태도)

를 요구한다. 만약 들병이가 이 가치를 무시한다든가, 혹은 공평치 못한 애욕남비(헛되이 헤프게 씀)가 있다든가, 하는 때에는 담박 분란이 일어난다. 다 같이 돈을 냈는데 어째서 나만 빼놓느냐, 하고 시비조로 덤비면 큰 두통거릴 뿐 아니라 돈 못 받고 따귀만 털리는 봉변도 없지 않다. 하니까 들병이는 이 여섯 친구를 동시에 무마하여 3원어치 대접을 무사공정히 하는 것이 한 비결인지도 모른다.... 엄동설한에 태중(胎中)으로 나섰다가 산기가 있을 때에는 좀 곡경(몹시 힘들고 어려운 처지)이다. 술을 팔다 말고 술상 앞에서 해산하는 수밖에 별 도리 없다... 이런 때이면 남편은 비로소 아내에게 밥값을 보답한다. 희색이 만면해서 방에 불을 지피고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지성으로 보호한다. 남편은 이 아이가 자기의 자식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다만 자기 소유에 속하는 자식이라는 그 점에서 만족할 뿐이다.... 들병이에게 철저히 열광되면 그들 부부 틈에 끼어 같이 표박(일정한 주거나 생업없이 떠돌아다니며 지냄)하는 친구도 있다. 이별은 아깝고, 동거는 어렵고, 그런 이유로 결국 한 예찬자로서 추종하는 고행이었다. 이런 때에는 들병이의 남편도 이 연애지상주의자의 정성을 박대하지는 않는다. 의좋게 동행하여 심복같이 잔심부름이나 시켜 먹고 한다. 이렇게 되면 누가 본 남편인지 분간하기 어렵고 자칫하면 종말에 주객이 전도되는 상외(생각 밖의)의 사변(사람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는 큰 사건)도 없는 것이 아니다. > --<매일신보> 1935. 10. 22 - 29--


불과 90년 전의 우리나라 농민의 현실은 이렇게 처참했었단다. 먹고살기 위해 아내를 손수 교육까지 시켜서 들병이로 내보내야 하는... 부부간의 최소한의 윤리 따위는 생존을 위한 밥, 앞에서는 무력한 사치였다는... 아무리 그렇더라도 남편이 어찌 아내를 그리할 수 있었을까... 아내는 또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까? 그저 그런 시대가 있었구나... 그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굶어서 죽을지언정 그렇게는 절대 하지 못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강의 중 많은 질문이 오고 갔지만 질문이 질문을 낳을 뿐 그 누구도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강의가 끝난 후 교수님과 함께 식사자리가 있었다. 오리고기와 불고기와 된장찌개와 쌈채소가 푸짐하게 나왔다. 건강을 생각하여 나이 든 우리 학생들은 밥의 절반을 거의 남겼다. 이놈의 밥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팔고 아내가 거기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90년 전의 들병이 이야기는 식사 도중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방통대 #출석수업 #김유정 #들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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