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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Jul 17. 2024

불량품들의 사계

새점을 치는 내 친구 영국이 119

새점을 치는 내 친구 영국이  



             

오늘 시장에서 메밀국수를 사 먹었다. 지난해 서둘러 저쪽으로 떠난 가버린 영국이가 생각났다. 친구가 군 생활할 때다. 나는 그때 대구 둘째 오빠네에서 살고 있었다. 영국이가 휴가 나왔었다. 둘이 대구 동아백화점에서 메밀국수를 사 먹었었다.

국립 임실 호국원 묻힌 친구 얼굴이 종일 떠올라 한밤중에 중학교 앨범을 펼쳤다.   

   

청보리가 활짝 피는 봄이었다. 친구들 여럿이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경찰이었던 형부 따라 둘째 언니가 사는 어의리 섬으로 처음 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토요일이라 도시락을 싸 오지 않았다. 배가 고팠다.  보리를 꺾어 비벼 먹다가 ‘보리피리’를 불었다. 친구들은 개구리가 울  때처럼 볼이 터지도록 바람을 가득 넣어 보리피리를 불었다. 그 소리는 필리리, 삑, 삘리, 삘삘 끊어지고 째진 채로 황톳길에 퍼졌다. 나는 보리피리 만들어 불 때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날도 역시 내 보리피리 소리가 가장 잘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이 보리피리 소리는 ‘음이 높은 나무’라는 뜻을 가진 ‘오보에’만큼 아름다웠다. 그래서였을까. 언제부턴가 나는 오보에 소리를 들으면 떠난 간 것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해찰을 하며 어디쯤 갔을까. 친구들이 하나둘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맨 나중에 나하고 영국이만 남았다. 영국이는 어의리 섬에서 온 아이였다. 친구는 학교 근처에 혼자 자취하는데 토요일이라 집에 가는 것이다. 어색하지만 나는 이 친구와 어의리까지 가야 한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우리 둘 다 반장이어서 얼굴은 알지만, 말을 거의 해본 적은 없었다. 우리는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영국이는 먼발치서 내 뒤를 따라왔다. 걷다 보니 삼거리가 나왔다. 어느 길로 갈 줄 모른 내가 머뭇거렸다.

“왼쪽.”

뒤를 따라오던 친구가 가만히 말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오른쪽.”

친구는 짧게 말했다. 사거리와 삼거리가 번갈아 나왔다. 가도 가도 선창은 보이지 않았다. 다리도 아팠다. 쉬고 싶었지만 쉴 수가 없었다. 어의리에 사는 이 친구랑 같이 가야만 했다. 어느덧 하늘은 빨강 물감과 회색 물감을 섞어 저어놓은 듯 어질러지고 있었다.

나는 배도 고프고 깜깜해질까 봐 빨리 걸었다. 둘이 나란히 걷는 것이 쑥스럽기도 했다. 친구는 일 없다는 듯 내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아따, 지가 내 앞에 가는 것이 좋겄구만' 그래야 내가 따라 걷기가 편하니까. 나는 처음 길이라 여러 갈래 길이 나오면 나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친구는 ‘왼쪽’ ‘오른쪽’ ‘앞으로’를 반복하면서 선창에 닿을 때까지 내 뒤를 따라왔다.   

  

어의리는 읍내에서 4Km 미터 넘게 걸어가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이다. 알고 보니 영국이만 어의리가 집이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초등학교에 다녔다. 영국이를 중학교에서 만난 것이다. 어느 날 오재열 수학 선생님이 우리 반 복도를 지나가는 영국이를 불러 노래를 시켰다. 영국이는 교탁 옆에서 얼굴이 빨개진 채 멍하니 서 있다가 나갔다. 그런데 웅변은 잘했다. 무엇보다 의젓했다.

    

보리피리를 불며 선창머리에서 빗방울을 세던 순정 소년은 시인이 되었다. 영국이의 시집 ‘새점을 치는 저녁’처럼 그는 소소하고 따뜻한 시인이었다.

영국이는 뒤를 따라가면서 길을 안내하던 친구였다. 그런데 그 옛날 나를 뒤따라오던 영국이가 나를 앞질러 가버렸다.


친구는 군 기상대에서 날씨 보는 일을 했었다. 구름 기상대에서 그는 여전히 새점을 치고 있을까.

‘친구야, 내일 비 그치 겄냐?’

그 옛날 선창에서 배를 타고 어의리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말없이 바다만 보고 있었다. 그날처럼 나는 비 내리는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다.                                              

중학교 졸업 앨범  마지막페이지  나와 영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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