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였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텃밭 가 돌멩이에 보라색 칠을 하고 있었다. 성길씨는 수돗가에서 등산화를 솔로 닦고 있었다. 풀치가 맨 정신으로 마당으로 걸어 내려왔다. 풀치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어디 아퍼?”
내가 일어서며 물었다.
성길씨가 등산화를 수돗가에 세우며 풀치를 쳐다보았다.
“술이 안 깨겠지.”
“진짜 아파요.”
“술병 났겠지.”
성길씨가 풀치 심기를 건드렸다. 성길씨는 내가 풀치를 챙기면 어깃장을 놓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어째 풀치 허리가 풀 먹인 천처럼 뻣뻣했다. 쏙 들어간 눈과 몸이 뼈대그림 같았다. 풀치는 평상에 손을 짚고 엉거주춤 앉았다. 아무리 봐도 풀치가 이상했다.
“요새 틀니 허고 난 뒤로 밥 잘 먹고 그랬는디, 어디 아퍼?”
“조금 아파요.”
“그럼, 병원 가 봐야재.”
“갔다 왔어요. 거의 다 나았어요.”
“그럼 다행이고, 걸어 댕긴께 죽을병은 아니겄지?”
풀치는 이등병처럼 각을 잡고 앉아 고개만 돌려며 말을 했다. 그는 등산화를 신고 패딩 잠바에 조끼를 껴입었다. 풀치는 내가 “아따, 등산화 멋있네” 말한 후로 오로지 등산화만 신고 다닌다.
남한산성 아래 고골은 낙엽이 질라치면 패딩은 기본 스텝이다. 진달래 지고 벚꽃이 휘날려도 추운 곳이 이곳이다. 보일러 석유 탱크에 석유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텃밭 가운데 있는 막사 안에 석유 두 통이 있다. 저걸 가져다 보일러 석유 탱크에 부어야 한다. 내가 막사에서 석유통을 보일러실까지 들고 올 수는 있다. 펌프 줄이 짧아 석유 탱크 입구에 줄이 닿지 않았다. 내 키만 한 석유 탱크에 석유통을 들어 올려 붓는 것이 문제였다. 남자들이 집에 오면 부어주라고 기다렸는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성길씨에 부탁을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무슨 부탁을 하면 그는 한방에 들어주는 일이 없다. 꼭 머뭇거리든지 아니면 댕강 잘라버린다.
“동생, 석유 좀 부어 줄 거여?”
성길씨는 왜 풀치한테 말하는지 나를 쳐다보았다.
‘말허면 거절할람서.’
일부러 성길씨 있을 때 말했다. 풀치가 나서면 왠지 자기가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성길씨 맘을 불편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못 된 게 아니라 무슨 부탁을 하면 바로 들어주라는 암시였다.
나는 막사 안에서 낑낑거리고 석유통을 들고 나왔다. 풀치가 받으러 겨우 일어났다. 성길씨도 밭으로 발을 들여놓다 멈췄다. 나는 풀치에게 석유통을 넘겨줬다.
풀치는 창고 안 석유 탱크를 본 후 나에게 의자를 가져오라고 했다. 성길씨는 마당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풀치는 의자에 올라섰다. 풀치 허리가 구부러지지 않았다.
“누님, 석유통 들어서 나에게 줘요.”
“맨날 술만 마신께 뺏다구가 구멍이 나 부를까 그런 거여?”
“그게 아니고요.”
“휘어지든가 꾸부러지든가, 무슨 요다구가 냐야 술 안 마시 것지.”
“내가 갈대인 줄 아세요? 남자는 휘어지면 안 돼요. 나는 오직 누님...”
“너무 멀리 나가지 말고. 석유 붓다가 단풍 다 지것다.”
“누님도 지고 있잖아요.”
“뭐라고야?”
“앗, 실수!”
둘이 쉰 소리를 주고받는 사이 성길씨는 ‘놀고 있네’ 표정을 지었다. 풀치는 무릎만 살짝 굽히고 내가 건네준 석유통을 들어 올려 석유 탱크에 부었다. 석유통이 탱크 입구에 맞지 않아 석유가 쏟아졌다.
“아아 그으 러어어케 하아며면 아안돼.”
성길씨는 자기가 해주고 싶은 맘이 발동했다. 나는 성길 씨는 그런 맘을 모른 척했다.
“동생, 석유통을 의자 등받이 우로 올려놔 봐 내가 잡고 있으께.”
“왜요?”
“그럼 펌프 줄이 석유통에 닿을 거 같어, 펌프로 넣다가 반 남으먼 석유통 들어 올려 붓게.
어쩌 처음부터 이 생각을 못 했으까.”
“누님, 머리 좋네.”
“내가 잔머리 좀 쓰재. 글고 살살해야 다칠라.”
풀치랑 나랑 다정 속도 150km였다. 나는 이 순간만큼은 풀치에게 솜사탕 녹듯 말했다. 성길 씨는 우리 둘 꼴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는지 사라졌다.
그러나 펌프 줄이 닿을 듯 말 듯했다. 그때 창고 안으로 수동 펌프가 쑥 들어왔다. 성길씨 손에 펌프가 들려있었다. 내 펌프 줄보다 두 배는 길었다. 성길씨는 ‘나 없인 안 되겠지’ 표정이었다. 펌프로 넣고 반 정도 남은 석유를 풀치가 들어 올려 부었다. 결국은 성길씨가 해결했다.
“아따, 이 펌프 아니었먼 오늘 해져도 해결 안 날 판이었는디.”
내 말이 끝나자 성길씨가 말했다.
“술고래는 술이나 마시 줄 알지.”
풀치는 발끈 해하며 한마디 했다.
“형, 나도 집에 가면 그것보다 더 큰 호스 있어.”
성길씨가 이에 질세라 한마디 했다.
“호스로 석유 넣냐? 펌프가 있어야지.”
석유통을 보면서 어렸을 때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때 섬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석유통을 들고나가면 어두워질 때까지 집에 오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아버지는 친구를 만나 식당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석유를 담은 대두 병을 들고 집으로 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방안 긴장감이 돌고 있을 때 아버지 육자배기가 골목을 가득 채웠다. 술 취한 석유통은 몇 번이나 눈밭에 나뒹굴었다.
젊은 나이에 산속에 누워 계신 아버지 모습을 풀치에게서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가 떠올랐다.
풀치는 의자 등받이를 잡고 직선으로 내려왔다.
“동생, 휴머노이드 로봇이여.”
풀치는 천천히 마당으로 걸어갔다. 풀치는 패딩 잠바를 들어 올렸다. 풀치 허리에 보호대가 둘러져 있었다.
“세상에 이게 뭐여, 말을 허재.”
“의사가 조심만 하면 된대요.”
나는 성길씨 들으라고 크게 말을 했다. 풀치 몸을 본 순간 괜히 성길씨에 화가 났다.
“이런 몸으로 내가 밥 한번 사야겠다 야.”
“누님, 차 타고 한 바퀴 돕시다.”
“진도 빼지 말라 했지. 글고 내차 썩음 썩음 해서 안 돼야.”
아프다고 말도 안 하고 나에게 관심을 받고자 힘쓴 풀치 맘이 나의 가슴을 때렸다.
“알았어, 손 없는 날로 생각해 보께.”
풀지가 정말 고마웠다. 단지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마구 부려 먹어도 되나. 아니면 내 일을 도와주면서 풀치가 즐거워하는 것을 그대로 둬야 하나, 고민하다 해가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