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내가 학교 다닐 땐 EBS에서 만든 다큐 <지식채널e>를 수업시간에 보여주는 게 유행이었다. (90년대생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선생님은 핀란드의 교육과 우리나라의 교육을 비교하는 영상을 보여주셨다. 그 영상에 따르면 핀란드는 아이들에게 등수를 매기지 않는다고 했다. 점수로 1등부터 30등까지 줄을 세우기보다, 30명 모두 각자만의 목표를 정하고, 본인의 목표를 달성했는지 여부만 평가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 간 비교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구조이다. 학생들의 공부시간도 한국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다. 그럼에도 핀란드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우리나라를 2위로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핀란드의 교육 효율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좋다는 결과까지 확인했는데도, 나는 비현실감이 들었다. 평가와 비교에 익숙해져있던 나는 핀란드의 교육 방식이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그게 없으면 뭘로 평가를 하지?’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때 반에서 1등, 전교 2~3등정도의 성적을 내는 공부 잘하는 아이였다. 열심히 노력한 증거가 바로 성적인데, 성적 표시를 안하면, 열심히 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고등학교 때는 성적이 잠시 떨어지긴 했지만, 재수를 통해 내가 꿈에 그리던 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성공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우울증에 걸려 인생 바닥을 쳤다. 살아남기 위해 잘못된 가치관들을 전부 바로잡아 정신건강을 되찾고 나니, 이제는 가장 후회되는 일이 12년 동안이나 학교를 다닌 일이다.
만연해있는 우울증, 그 원인은?
“재미없음”, “무기력” 등의 부정적인 정서가 한국 사회에 만연해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다. 우리나라가 OECD 자살률 1위 국가라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한동안 1위 자리를 뺐겼다가 되찾았다.) 게다가, 우리나라 인구수는 줄기 시작했는데도, 우울증 환자는 외려 늘어나고 있다. 2017년 68만명이 우울증으로 진료를 받았고, 2021년 91만명으로 4년만에 환자가 33%가 증가했다. 그야말로, 우울 한국, 무기력 한국이다. 그런데, 독특한 점은, 이렇게 삶의 재미와 의미를 잃은 사람이 증가하는 현상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선진국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울증의 증가세는 다른 선진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주립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청년들의 우울, 불안 지수는 이들을 측정하는 심리검사지(MAS, MMPI)가 1900년대 중반 처음 발명된 이후 몇십년 동안 수직적으로 증가했다고 한다.(출처. 언스쿨링) 요즘 청년들의 늘어나는 우울증, 원인은 뭘까? 속된 말로 요즘 애들이 고생을 안해서 나약해지고, 물러터지게 된 것일까? 빈부격차의 심화로 상대적 박탈감이 너무 심한 것일까? 먹고 살만 하니까 쓸데없는 잡생각이 많아진 것일까? <언스쿨링>의 저자 Peter Gray 박사에 의하면 우울증의 증가 추세는 경제주기, 전쟁 등의 외부 상황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 지독한 고난을 겪고도 극복하고 성공까지 이루어내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작은 실패를 겪고 나서 회복하지 못하고 깊은 우울의 늪에 빠져버리는 사람도 있다. 우울증은 객관적인 외부 상황보다는, 외부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개인의 느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Peter Gray 박사는 그의 저서 <언스쿨링>에서 바로 학교가, 아이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인생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아감으로써 아이들과, 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을 우울증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는 장본인이라고 주장한다.
학교의 설립목적은 알고 학교에 보내시겠죠?
현재 우리나라의 학교 모델은 미국의 학교 모델을 따온 것이다. 다음은 미국의 현대 학교 모델을 추진한 일반교육위원회(General Education Board)에서 추구하는 비전을 발표한 내용의 일부이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나 이들의 자녀들을 철학자나 학자나 과학자로 만들 생각이 없다. 우리는 작가, 연설자, 시인, 문인을 키우려는 것이 아니다. (중략) 이미 차고 넘치는 변호사, 의사, 목사, 정치인을 키우려는 것도 아니다. (중략) 우리가 내세우는 과업은 아주 단순 명료할 뿐만 아니라 아주 훌륭하기도 하다. (중략)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모아 작은 공동체를 꾸려서 그 아이들에게 부모 세대가 불완전하게 수행 중인 일들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도록 가르치려 한다.”
위 교육 모델을 “테일러주의 교육”이라고 하는데, 개인의 기질이나 흥미, 적성은 전혀 고려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면 제대로 봤다. 현대 학교는 공장 노동자에게 필요한 자질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공장은 노동자가 개성을 표현해서는 곤란한 곳이다. 공장은 창의적으로 일하기보다, 표준화된 방식으로 일할 때 생산성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학교 교육 역시 개개인의 개성을 죽이고 표준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창의성은 소수의 관리자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 테일러주의의 철학이었다. 그리고 이런 목표를 가진 학교는 미국에서 시작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여러 선진국들의 학교 모델이 되었다.
그러니,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소망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가? 학교는 다니면 다닐수록 아이를 별볼일없는 사람, 기계의 부품처럼 대체되기 쉬운 개성없는 사람이 되는 곳이라는 것을 대놓고 알려주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비판의식을 갖는 것은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당신도 이 학교에 다녔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익숙한 것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단순노출효과”라고 하는데, 기업들이 그렇게 광고를 많이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자주 보기만 해도 그 브랜드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간다. 하물며 학교는 어떻겠는가. 자주 수준이 아니고, 매일매일 12년을 다니지 않았는가? 호감도가 올라가는 수준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삶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가 아무리 객관적으로 별로인 곳이라 해도, 당신은 무의식 수준에서 필사적으로 학교를 옹호할 수밖에 없다. 학교가 쓸모없는 곳이라는 게 증명되면, 당신이 더 생산적으로 보낼 수 있었던 12년을 흘려보냈음 역시 증명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뇌가 말랑말랑하고 습득력이 빠른 어릴 때 배워야 잘 배울 수 있기에 어린 나이에 학교를 가는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너무도 어린 나이에 학교에 가기 때문에 학교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져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게 된다. 좋든 싫든 아무 생각이 없든, 그냥 ‘적응’해버린다. 필자가 학교에서 핀란드 교육법에 대한 영상을 보고도 우리 나라 교육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학습된 무기력
“학습된 무기력” 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는가? 피하기가 불가능한 힘든 상황을 지속적으로 겪으면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기회가 오더라도 아무 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현상을 발견한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개들을 세 집단으로 나누어 전기충격을 주었는데, A집단의 개들은 버튼을 누르면 전기충격이 멈추도록 하였고, B집단의 개들은 A집단과 동일한 전기충격을 받지만, A집단의 “짝꿍 개”가 버튼을 눌러야 전기충격이 멈추도록 설계하였다. B집단의 개들은 외부상황에 대한 통제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C집단의 개에게는 전기충격을 주지 않았다. 이후 개들을 풀어주고, A,B,C집단 모두에게 전기충격을 주었다. 전기충격을 통제할 수 있었던 A집단과, 전기충격을 받지 않은 C집단의 개들은 몸을 피해 전기 충격을 벗어났다. 그러나, 전기충격을 통제할 수 없었던 B집단의 개들은 충분히 몸을 옮겨 피할 수 있음에도, 체념한 듯, 웅크려 전기충격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처럼 무기력을 학습하는 현상은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위 실험을 설계한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에 의하면, 고통스러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것 뿐만 아니라, 반복된 실패경험도 동일한 효과를 낸다고 한다.
학생은 학교에서 남들과 비교받으며 평가당하는 입장이며, 평가가 고통스럽든 말든, 그 평가의 방식라든지, 일정에 학생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학습한 것을 평가하는 것은 숙련자에게는 동기부여의 역할을 하지만, 초심자에게는 불안을 준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선행학습을 한 아이들을 제외하면 그 내용을 처음 배우는 초심자이기 때문에, 평가=고통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또한, 학교의 평가 기준 역시 중학교 이후부터는 최상위권의 변별을 위해 매우 높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최상위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생이 반복된 실패경험을 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학교교육을 성실히 이수한 아이들이 학습된 무기력 상태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작은 위기에도 멘탈이 무너지는 이들이 성공을 위해 도전한다는 것이 쉬운 것일까?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현실에 안주하려 할 수밖에 없다.
학교의 노력에 대한 거짓말
현대 학교가 아이들에게서 자신의 시간을 계획할 권한을 빼앗아갔을 때, 아이들은 위에서 설명한 학습된 무기력 상태에 빠지는 한편, “노력”이란 하기 싫어도 참는 것이라는 걸 배웠다. 집중 안되는 수업에 집중하려고 노력하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교과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학교생활을 한 그들은, 인생이란, 하기 싫으면 지금보다 더 좋고 ‘나에게’ 효율적인 방법이 어디 없나 고민하고 도전해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어도 참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러면서 그들은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학교의 설립 목적에 제대로 부합하는 인재로 자라난 것이다.
근본 원인을 해결하려고 해봤자, 학교 시스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 학교 시스템 자체가 문제일거라는 생각은 당연히, 아이들 수준에서는 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근본 원인 해결을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다. 그들은 그들의 권리를 극도로 제한하는 그런 환경에 처해있으면서도, 의사결정을 내리는 “척”을 해야만 했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아무런 권한도 주지 않으면서, 말로는, 진취적이고, 주도적인 인재가 되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리더십을 갖추라고 ‘말해줘도’, 아이는 배울 수 없다. 아이는 말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처한 상황과, 받는 대접으로 배울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내리는 해결책은 아주 단기적 임시처방일 뿐이고, 문제의 근본 원인은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는 그런 경향을 띤다. 아무런 통제권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노력은, 그저 지금 이 순간 스스로를 채찍질해서 상황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예를 들면, 수업 중에 졸릴 때, 볼펜으로 허벅지를 찌르는 것처럼 말이다. 몇 초간 정신을 차렸다가 곧이어 또 졸 것이 분명한데도, 그들은 허벅지를 찌른다. 그들도 사실 허벅지를 찌르는 것이 소용이 없다는 것은 무의식중에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찌른다. 왜냐하면, 학교는 아이들에게 리더십과 진취성을 갖추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리더십과 진취성은 “진짜 자유”를 가지고 있을 때 배울 수 있는 가치인데, 우리 착한 아이들은, 그것들을 배운 적이 없지만, 연기해서라도 가지고 있는 척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벅지를 찌르는 것은 ‘나는 수동적으로 조는 학생이 아니에요. 주도적으로 잠을 깨려고 노력하는 진취적인 학생입니다!’라는 선언이다. 그러나 가엾게도 그들이 하는 노력은, 마치, 셀리그만의 실험실의 개들이 전기충격을 참아내려고 “노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결과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노력. 결과가 바뀌지 않는 노력은 공허할 뿐이다. 그 공허함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더더욱, 이를 악 물고, 의욕을 끓어올리는 등의 “의욕 충만” 퍼포먼스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 수렵채집 시절 아이들은 편안했다. 가만히 놔두면, 아이들은 자신이 몰입되고, 집중되는 것을 찾아서 자기학습을 해 나갔다. 어디까지 궁굼하고 얼만큼 배울지, 언제 학습을 멈출지는 철저히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노력”할 필요는 없었고, 단지 “생각”할 필요는 있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생각해야 했고, 그 행동을 하면서 자신의 느끼는 감정을 관찰했다. ‘이게 궁굼한데, 알아볼까?’, ‘재밌네.’ ‘이제 재미 없는데 그만 해야겠다.’ 등 그들은 자신의 행동의 사령관이었다. 집중이 안되면, 그것이 현재로서는 궁굼하지 않은 것이니, 학습을 중단했다. 이것은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문제인 것 같지만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아도” 집중력은 상당히 높은 상태로 오랜시간 유지된다. 시간이 빨리 흐르는 “몰입”을 경험한다. 그리고, 몰입하여 학습하면서 어느새 숙달이 되어, 동일한 수준의 학습이 지루해진다. 몰입은 아주 기분 좋은 경험이기 때문에 그들은 또 다시 몰입을 느끼기 위해, 스스로에게 약간 어려운 과제를 부여함으로써 학습의 난이도를 높인다. 실력 향상의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이처럼, 진짜 노력은 편안하다.
정 반대의 현상은 학교에서 아주 흔하게 관찰할 수 있다. 아무리 버티고 버텨도 시간이 흐르지 않는 현상 말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활동을 하니까 너무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학교는 노력은 원래 쉬운 것이라는 걸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학습은 원래 고통스럽고, 노력은 원래 힘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학교의 말은 거짓말이다. 노력은 힘든 것이 아니다. 심지어, 필요 없기까지 하다. 생각만 잘 한다면 말이다.
가짜 노력, 진짜 노력
가짜 노력과 진짜 노력의 예시를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가짜 노력: 아까 언급한, 허벅지 찌르기 행위가 대표적인 가짜 노력의 예시이다.
-진짜 노력: 진짜 노력의 핵심은, 생각하는 것에 있다. 수업시간에 졸아서, 자괴감을 느낀다면, 이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생각을 시도한다. 졸지 않기 위해 어떤 때 주로 조는지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지켜봤더니 수면시간이 6시간 30분이 안될 때 헤드뱅잉을 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아냈다. 6시간 30분은 자려면, 적어도 12시에는 잠에 들어야 한다. 12시에 잠에 들기 위해 “노력”한다. (근본 원인 해결을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 그런데, 마음처럼 12시에 잠드는 게 잘 안된다. 왜 그럴까 고민한다. 핸드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밤 늦게 뭘 먹었을 때 잠이 안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눈치챘다. 9시 이후에는 먹지 않아보려고 한다.
혹은,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6시간 30분의 수면시간을 확보하려면 12시에는 자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공부하는 양이 너무 적어진다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어차피 고등학교 수준이 높아 내신이 망했기 때문에 답은 수능밖에 없고, 차라리, 자습하기 힘든 수업시간에 졸고, 2시나 3시까지 공부하겠다고 선택할 수도 있다.
(이 때 전제는,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든지 하여, 학교 시스템을 이용하겠다고 결정했다는 것이 전제이다. 고민하다 보니 대학교 학위가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면 학교에서 조는 것을 해결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소중한 시간을 고등학교에서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면, 학교를 그만두고 일찍부터 직업사회에 뛰어들어 경험을 쌓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때 사회적인 시선이나, 학력에 대한 통념도 고려할 필요가 있기는 하다. 고등학교는 다니기만 하면 학력이 생기는 것이라, 학교를 다니는 게 속편하다면 다니기로 하면 된다. 그만두기로 결정할 때도 합리적으로만 결정했다면, 사회 통념에 벗어난다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
핵심은 이것이다. 모든 사회적 제약을 초월하여 “나”에게 맞는 결정을 내리는 것. 수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일찍 자기 위해 노력하기로 선택하면 된다. 수업으로 인해 자습시간을 뺏긴다는 생각이 든다면, 철판을 깔고 졸아버리는 것이다. 이 때, 규칙을 어기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 수 있는데, 죄책감이 들 때도 생각하면 된다. 죄책감 때문에 공부가 안된다면, 그냥 수업을 듣기로 선택할 수도 있고, 또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로 선택하는 방법이 있다. 죄책감을 덜어줄 생각을 떠올리면 된다. “선생님이 내 수능 성적 책임져주지 않아. 나 말고 수업 안듣는 애들도 많아. 학교 구조의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야.” 라고 말이다.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더라도, 연습하면 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핵심은, 모든 판단과 선택의 기준은 당신에게 실질적인 이득이 되는지 여부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저, 허벅지를 찌르는 노력을 할 때보다, 근본적으로 원인을 해결할 수 있거나,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라 판단하고, 죄책감만 없앨 수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본인을 중심으로 선택하면 된다. 당신은 학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가 당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학교와 사회, 국가는 전부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을 기억해라.
정답
자, 그 다음은 정답에 대한 이야기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학습된 무기력”과 “노력하는 척하기”를 성공적으로 학습한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이들은 학교에서의 수많은 정답 맞히기 훈련으로 인해, 인생에도 정답이 있다는 가치관을 학습하고, 성공하기 위한 정답을 찾기 위해 뽈뽈거리며 돌아다닌다. 이들이 학교에서 훈련받은 두 가지는, 학교 시험에서 “한 번에” 통과하는 연습과 “정답”을 맞히는 것이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중간고사를 두 번 볼 수 없다. 잘 볼 때까지 계속 시험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회는 단 1번이다. 반복적인 시험으로 무의식까지 “한 번에 정답을 맞추는 것”에 최적화된 이들은, 성공할 때도, “한 번에” 성공하고 싶어하고, 성공의 “정답”을 찾으려고 한다. 이들이 특히 권위있는 사람의 말이나, 유명한 자기계발서를 매우 신뢰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들이 한 번에 그들을 성공시켜줄 정답과 가장 가까워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성공한 이들을 들여다봤을 때 확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은, 성공의 비결이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서로와 서로가 아주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친구를 사귈 때도, 나와 성격이 비슷하고 잘 맞는 아이와 사귀게 되지 않는가? 아무리 친해지려고 노력해도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 있는 것처럼, 성공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속성에 잘 맞는 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누구는 행동이 아주 빠르고, 누구는 행동이 느린 대신 신중하다. 행동이 빠른 사람은 빠른 행동을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성공방법을 찾으면 되고, 행동이 느린 사람은, 신중함을 무기로 성공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알고있었던 다름에 대한 개념은, 학교의 획일화 교육에 의해 덮어쓰기 된 듯 하다. 지독하게 훈련받은 그들은 개개인마다 기질과 성격과 가지고 있는 자원이 다르므로, 성공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다는 상식적인 추론조차 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잘 하고 있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그들을 따라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그들이 최선을 다하는 것과는 별개로, 성공은 그들에게 가까워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남의 말을 듣는 것이 별로 효율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행동을 하려면, 그 행동을 꾸준히 하는 것은 더더욱, 그 행동을 해야하는 이유가 “납득”이 되어야만 그 행동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 해주는 말은, 따라해도 며칠 안이면 그만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깨달아서 알아낸 것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성공의 정답은 당신 안에 있다. 용기를 돋기 위해 해주는 말이 아니라, 당신 안에서 성공을 찾는 것이 가장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당신이 어떤 상황에서 효율이 올라가는지, 게을러지는지 알고 있다. 계획이 있을 때 잘 되는지, 없을 때 잘 되는지, 회사에 다닐 때 일을 더 잘 하는지, 혼자 일할 때 일을 더 잘 하는지 말이다.
이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외부에서 정답을 찾겠다는 말은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고, 스스로에게 성공해야만 하는 이유를 납득시키는 과정을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한 번의 실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패를 해야 정답에 다가갈 수 있다. 실패하면 안된다는 말은 납품기한을 어기면 안되는 공장노동자에게나 적합한 말이다. 당신은 아주 창의적이고, 시장을 리드하는 리더가 되어야만 한다. 요즘같은 자동화 바람이 부는 때, 그래야만 살아남는다. 성공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99번 실패하고 100번째에 성공해서 부자가 되라고. 그들이 일부러 99번 실패했겠나? 성공하려고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하는 과정에서, 이번엔 진짜 될 것 같았는데 안되네, 이번엔 진짜 이건 줄 알았는데 잘 안되네의 반복을 99번 한 것이다. 그래도 너무 겁먹지 마라.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도 환상일 뿐이다. 그냥 현재만 존재한다. 3번째 실패든, 10번째 실패든, 당신이 지금 존재하는 현재, 겪은 단 한 번의 실패일 뿐이다. 현재를 살다가 갑자기 과거를 회상해봤더니 실패를 꽤 많이 했을 뿐이다. 이 느낌이다. 실패를 해야 더 좋은 방법이 보인다. 그렇게 조금조금 발전하다가 보면, 성공이 온다. 99번 실패해도 100번째 성공하면 부자가 된다는 말을 기억해라. 학교에서 배운 것은 싸그리 잊어야 성공할 수 있다.
벗어나자
늘어나는 우울증, N포세대,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을 두고 젊은이들을 욕하지 마라.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중학교, 고등학교로 갈수록 아이들이 침울해진다. 노는 시간 없이, 공부에 대한 압박을 받으며 살아와서 20살이 되었는데, 내가 뭘 잘하는지 모른다. 지금부터라도 적성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해본다. 적성을 어떻게 찾아야 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더 막막하다. 이들은 그냥 배운대로 힘들어도 참으면서 노력한다. 그러다가 금방 20대 중반을 지난다. 이들은 이제 늙기 시작한다. 힘들기만 하고, 재미도 없는데 이제 늙기까지 한다. 얼마나 허무하고 비참할까? 우울증이 생기지 않는 것이 더 대단해보인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의무 속에서 스스로를 옥죄며 살아왔다. 사회와 학교가 시키는대로 스스로를 다그치며 살아온 대가가 불안과 우울, 무기력 뿐이라면, 이제 그만하자. 결과의 수정을 가져오지 않는 노력은 가짜 노력이라고 했다. 불안과 우울, 무기력이 결과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했던 노력은 가짜라는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노력, 보여주기식 노력에서 벗어나 “자기친화적” 노력으로 전환할 때인 듯하다.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는 짓은 이제 그만하기로 하자.
지금도 늦지 않았다. 학교의 최면에서 빠져나오자. 기억하자. 성공한 이들의 공통점은 자유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에서 단 한 번만 성공해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들도 두려웠다. 그러나, 두려울 때마다 생각했다. 나한테 유리한 것이 뭔지, 확률로 결정하는 것이다. 성공한 이들은 돈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통제권 회복을 목표로 했다. 당신도 할 수 있다. 당신은 어린 시절 당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의 표준화, 후려치기 교육으로 인해 잠시 잊었을 뿐이다. 이제 벗어나자. 본래 가지고 있었던 통제권을 회복하자.
참고자료
-EBS 지식채널e <핀란드의 실험>
-책<언스쿨링> 저자:Peter Gray 출판:박영스토리
-책<마틴 셀리그만의 낙관성 학습> 저자:마틴 셀리그만 출판:물푸레
-책<평균의 종말> 저자:토드 로즈 출판:21세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