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지 않는 방법을 모르겠어요

상담 1회차

by qwerty

프로젝트 마감 날짜가 다가올수록 끝없이 일을 미뤘다.

일을 미뤘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거짓말에 거짓말이 더해졌다.

일단은 한숨 돌렸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이미 나락에 빠졌다는 극도의 불안감,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어 이제는 바뀌고 싶다는 의지와, 이걸 누군가한테는 말을 해서 해소하고 싶다는 마음이 뒤섞여 상담소를 찾아갔다.


평소라면 이런 저런 후기를 다 찾아보고 비교하고 갔을 텐데,

그냥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전화하고 찾아갔다.




나: 제가 지난 한달의 절반 정도를 회사를 안갔어요. 아프지 않았는데 아팠다고 거짓말을 쳤고요. 못 가겠는 날이 늘어나니까 점점 거짓말도 더 커지고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됐어요. 어제도 아파서 회사에 갈 수 없다고 큰 거짓말을 치고 며칠동안의 병가를 획득한 상태에요. 그래서 약간 한숨을 돌린 한편, 지금 내 상황이 좆됐구나... 나 정말 끔찍한 사람이 됐고 끔찍한 행동을 저지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얼른 이걸 해결하고 싶은데, 혼자서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정말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거든요.


온 세상에서 선생님만 알고 계세요.


쌤: 그런일이 있었군요. 보통 당일 예약은 잘 안받는데, 오늘 받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전에도 이런 일들이 있었나요?


나: 이전 회사에서 본격적으로 이런 습관이 생겼어요. 반면에 첫번째 다녔던 회사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어요. 그 회사는 굉장히 시스템이 빡빡한 곳이었거든요. 아침 8시 30분까지 출근을 하고, 아침 조회를 했었어요. 신입사원이었던 저는 별 권한이 없었구요. 그래서 저한테 기대하는 것도 별로 없었어요. 해야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었고, 저에게 주어진 일들을 아주 잘 해냈어요.


좀 더 많은 것을 주도적으로 해보고 싶고,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두번째 회사로 옮기게됐죠.


쌤: 그렇군요. 두번째 회사는 첫번째 회사랑 어떻게 달랐나요?


나: 두번째 회사는 훨씬 자율이 높았어요. 책임져야하는 것도 많고, 제가 갑자기 팀장이 됐다. 그때 너무 너무 큰 스트레스를 받았었어요. 출퇴근도 자율이었고 연차도 무제한이었다. (그런 회사가 있다니!) 그때부터 스트레스에 너무 몰렸을 때 사소한 거짓말을 하면서 회사를 안 가는 일이 몇 번 생겼었어요. 아무도 크게 뭐라고 안 했었거든요.


쌤: 두번째 회사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렇게 해도 된다"라고 학습이 된 것으로 보여요. 일종의 습관이 된 것 같고요. 두번째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더 파보도록 하죠.


앞으로 상담에서는 "자율이 주어졌을 때 왜 더 어려울까? 나에게 자율은 어떤 의미일까?"라는 질문들을 더 탐구해볼거에요.


혹시 회사 업무가 아닌,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문제가 된 적이 없나요?


나: 네. 별로 생각이 안나는데요? 저는 친구들이랑은 잘 지내요. 별로 문제가 된 적은 없어요.


쌤: 보통 이런 문제가 있는 분들은 삶 전반에 걸쳐서 문제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까지 생각나는 경험이 없었다면, 주변 사람들이 잘 참아주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회피 성향은 고치는게 정말 어렵고, 앞으로 점점 심해질 가능성이 높아요.


나: 왜죠?


쌤: 이미 회피를 통해 상황을 모면해본 경험이 쌓이면 같은 방법으로 계속 반복하게 됩니다.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않지만 (오히려 악화함) 당장의 곤란한 상황에서 잠시 쉬게끔 해주고, 안도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문제 상황에 닥쳤을 때 본능적으로 회피를 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져요.


불편하더라도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꾸준히 상담에 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담은 약 10회 정도 진행될 예정이며, 구체적인 예제를 가지고 (이걸 '에피소드'라고 합니다) 이야기하는 방식입니다.


회피를 하게 되는 기저에는 어떤 생각이 있는지, 반복되는 트리거나 조건은 무엇인지 살펴볼거에요. 그리고 회피 대신에 택할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배우고 연습해나가는 과정입니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끕시다.

회사 일을 어느 정도 해결하고 나서

어린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얼마나 큰 일을 내 손으로 저질렀는지 체감했다.

너무도 한심하고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상담에 오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검은색 도화지에 흰색 점 하나가 찍힌 느낌?

회피적인 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내 인생은 앞으로 영원히 이런 꼴이겠구나.

쉽게 고쳐지지는 않겠구나, 그렇지만 정말 꼭 고쳐야겠다.


지금 엉망진창인 상황부터 해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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