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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송목 Mar 20. 2023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드로잉

드로잉 왕초보 성장일기

최후의 심판, 1534~1541년, 프레스코, 13.7 x 12m,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이번 드로잉에서는 전체를 모두 그리기에는 워낙 대작이고 드로잉으로 전부를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어, 중앙부 예수님과 마리아 부분을 중심으로 표현해 보았다. 또 미켈란젤로의 좌우측, 정면  초상화도 추가했다.


이 그림은 클레멘스 7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한 작품으로, 로마 황제 카를 5세가 로마로 쳐들어와 로마를 약탈한 역대급 참사가 있었는데. "명색이 가톨릭 신도이며 로마인이라는 작자가 '로마 황제' 주도로 로마를 박살 낸" 참상에 엄청난 분노를 느낀 클레멘스 7세가 이 작품을 의뢰하였다. 미켈란젤로도  "참 의인은 거둬들여지고 거짓된 자는 내쫓겨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고 한 의뢰인의 분노에 아주 걸맞게  표현한 걸작이다.


하지만 성전에 그려 넣기에는 은혜로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림이다.  중앙의 예수부터가 성화에 그려지는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아폴론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그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종말 속에서 간신히 건져 올려지는 의로운 성도들이, 우측에는 예수에게 가차 없이 내 쫓겨나는 가짜 의인들이 그려져 있다. 우하단은 거짓 증인들을 악마들이 가차 없이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으며 심판을 선포하는 천사들도 이들을 혐오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현재 그림은 수정본으로, 원작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나체 상태였다. 이는 종말 앞에서 한낱 인생은 그저 하느님께 구해달라고 갈구해야만 할 뿐인 미천한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며, “로마를 약탈한 자들은 지옥에나 떨어져라!”라는 분노의 표현이다. 당대에도 수많은 성직자들이 "이런 나체화는 성당에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탄원한 바 있다.


당시 교황의 의전담당관 '비아지오 다 체세나' 추기경은 나체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고  거룩한 장소에 적절하지 못하며 홍등가에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혹평을 했다.


 미켈란젤로는 이에 대해 오른쪽 하단에 있는 카논의 배 부분에 소소한 복수의 의미로 '지옥의 수문장 미누스'로  추기경을  그려놓았다. 미누스의 귀는 당나귀 귀로 표현되었는데 무지의 상징이고, 성기마저 뱀이 물고 있게 그려 인간의 성적 방종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과 성직자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모욕을 표현하고 있다.


에 화가 난 추기경은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자신의 얼굴을 빼줄 것을 탄원했지만, 바오로 3세는  "추기경님이 연옥에만 계셨어도 제가 어떻게 해보겠는데, 지옥은 제가 어떻게 해 드릴 수 없겠습니다."라며 묵살했다고 한다.


 이후 바오로 3세 선종 후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까지 이 성화에 대해 별 조치가 없었으나, 비오 4세 이후, 1564년 로마 전례를 재정립하며, '비속한 부분은 모두 가려져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져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옷을 그려 가리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레오나르도는 기본적으로 성격이 꼬장꼬장하고 성관계를 질색하는 데다가 여자를 경멸했지만 언변이 능했고, 잘생겨서 외출하거나 사람을 만날 때에는  나름 센스 입게 잘 차려입고 다니고 박학다식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호감을 샀다. 그래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주변에는 늘 그를 숭배하는 젊은 청년들이 따라다녔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처럼 꼬장꼬장하지도 않고 고용주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데다가 잘생겼고 본인 역시 여자를 좋아했기에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기본적으로 못생긴 데다가, 본인도 자신의 외모에 관심이 전혀 없어서 길거리로 나올 때에도 작업 중 지저분해진 몰골 그대로 다녔다. 거기에 라파엘로처럼 원만한 성격도 아니고 까칠하고 거만했으며 독설을 자제하지 않아서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친구도 없었다. 메디치 가문에서 수학하던 시절 동문들에게 독설을 내뱉었다가 토리지아노라는 친구에게 주먹으로 코를 맞아서 코뼈가 주저앉은 적도 있었으며 심지어 동문들에게 미움받아 따돌림을 당한 적도 있었다. 또한 윗사람이라도 수틀리면 교황에게도 독설을 하고 대들어서 화가 난 교황에게 얻어맞았으며 더는 일하기 싫어서 도망가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소식가였고 매우 금욕적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문학 작품이 단테의 신곡이고 술도 거의 하지 않았고 여자를 경멸했다. 그의 장수에는 이런 금욕적인 생활이 한몫했을 것이다. 또 부양해야 할 가족이 많아서 지출이 많았지만, 본인의 사치를 위해서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았다. 교황에게 돈 안 준다고 보챈 것도 돈을 밝힌 게 아니라 율리오 2세가 1년이나 보수를 미루는 바람에 받을 돈을 못 받아서 그런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어릴 때 회화를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고, 그런 기억 때문에 스스로 회화를 꺼리는 것은 물론, 조각의 불완전한 버전이 회화라고 깎아내리는 등 자신을 화가가 아닌 조각가로 여겼다.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예술에 쏟았고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은 동시대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틀어 가장 역동적이다. 현재 각종 패션쇼, 사진촬영에서 모델들이 과장되게 뒤틀린 포즈를 취하는 것의 시발점은 미켈란젤로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이전까지의 회화 모델들이 이렇게 인체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포즈를 취한 적이 없다. 회화에 있어서 미켈란젤로의 업적을 한마디로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긴 하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의의는 인체의 역동성을 하나의 미학으로 발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작품의 역동성뿐만 아니라  스케일도 거대하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스케일, 최후의 심판의 스케일과 그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그의 작풍을 가장 잘 설명해 준다.


 그의 외모에 대한 평가는 추남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큰 특징은 크게 비뚤어진 코인데, 어린 시절 공방 제자 시절에 다른 공방학생의 작품을 신랄하게 까내렸다가 얻어맞고 코가 부러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예술가로서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다시 독설이 독해졌다가 말년에 이르러서는 조금 유해진 경향이 있다.


그는 수평적인 인간관계는 별로 없었다. 항상 그를 찍어 누르고 고용하는 사람들 아니면 그를 일방적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극소수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항상 생활고와 건강 문제, 돈을 요구하는 가족들과의 불화 때문에 미켈란젤로의 인생자체는 굉장히 불행했다. 회고록에서는 아예 자살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왼쪽: 볼테르가 분필로 그린 미켈란젤로 초상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다빈치 코드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아서 그렇지 미켈란젤로 역시 찾아보면 그림에 이스터 에그같이 숨겨둔 요소가 굉장히 많다. 시스티나 천장화만 하더라도 수많은 이스터 에그 추정 요소들이 많다. 아담의 탄생으로 유명한 구획은 잘 보면 뇌의 단면도로 추정되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어깨 관절의 모습이 숨겨진 무녀의 다리, 폐와 기관지의 모습이 숨겨진 하와, 콩팥의 단면도를 나타낸 형상과 뇌의 생김새를 묘사한 목 부분 등이다.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유별난 행동은 자신의 스케치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 남아있는 스케치들도 확실하게 미켈란젤로 것인지 알 수 있는 것들은 매우 적다. 위작으로 판명 난 것도 굉장히 많은 편. 정확히는 모든 작품에 스케치를 하기는 했지만, 작품이 끝나고 혹은 말년에 대부분 다 모아서 불태워버렸다. 다빈치가 스케치북과 노트를 몇 십 권이나 남겨 놓은 것에 비해 대비된다.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가장 장수하여 만 88세까지 활동했다. 노년에 시력이 약해져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촉각에 의지해서 죽기 며칠 전까지 새로운 피에타 작업에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그가 남긴 말 중 “Ancora Imparo”(I'm still learning,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가 유명하다.


 로마에 묻혔다가 고향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대성당에 이장되었다. 성대한 장례식에 피렌체 시민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대대적으로 장례를 치를 때 후배 예술가들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관을 열었는데, 사후 20여 일이 지났는데도 부패하지 않고 몇 시간 전에 죽은 것 같은 상태였으며 훗날 미켈란젤로의 후손인 필리포 부오나로티의 요청으로 18세기에 다시 관뚜껑을 열었을 때도 부패의 징후가 없이 온전한 시신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 드로잉 =최송목)

<참고 발췌인용>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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