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지이제류 (水因地而制流)
60세를 넘기며 가장 먼저 체감한 변화는 시력 저하다. 보려는 의욕은 그대로인데, 보이지 않는 게 많아진다. 요즘은 60세 이전, 40대부터 이미 이런 시력 저하를 겪는 사람들이 많다. 시력 저하와 함께 찾아오는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이 황반변성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황반변성 환자 수는 2019년 20만여 명에서
2023년 49만 명으로, 불과 5년 새 2.5배나 늘었다. 이름 그대로 ‘나이 관련(Age-related macular degeneration)’ 질환이다. 나이가 들면서 망막의 중심부인 황반에 노폐물이 쌓이고 세포 기능이 떨어져 발생한다.
문제는 시력 저하 자체보다 일상 환경의 글자가 과도하게 작게 설계돼 있다는 점이다. 안내문, 신문, 팸플릿, 은행 약관, 주민센터 서류까지 모두 ‘젊은 시력’을 기준으로 디자인돼 있다. 노안을 고려한 흔적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필자 역시 돋보기가 외출용, 거실용, 사무실용 등 어느덧 여섯 개다. 생활필수품이 된 셈이다. 고령층은 늘어났고 경로 우대는 확대됐지만, 정작 ‘읽을 수 있는 사회’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특히 약병의 글씨는 불편함의 정점이다. 복용량이나 주의사항을 확인하기 어려워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확대해 본다. 샤워 중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샴푸와 린스를 헷갈려 결국 병에 직접 ‘샴푸’라고 적어두었다. 시력 문제는 개인의 노화가 아니라, 사회적 정보 전달 체계의 설계 기준이 한 세대에 머물러 있는 구조적 문제다.
한편 사회는 ‘경로 우대’ 혜택이 넘친다. 대중교통, 공원, 박물관 모두 고령층 할인 대상이다. 혜택은 많아졌지만, 정보 접근성은 여전히 아날로그 시대에 머물러 있다. 읽어야 할 정보는 그대로 작고 빽빽하다. 돋보기를 비치해두기도 하지만, 애초 글자를 키우는 근본적 개선은 이뤄지지 않는다.
다행히 변화의 조짐도 있다. 최근 LG전자가 시니어 고객을 위한 ‘이지 TV’를 출시했다. 홈 화면을 단순화하고 메뉴를 한눈에 보이게 설계했으며, 리모컨 버튼은 27% 키우고 글씨는 35%로 확대했다. 복약 알림, 화초 물 주기 같은 생활 알리미 기능도 추가하고, 두뇌 건강 게임과 노래방 기능까지 들어 있다. 기업이 먼저 시니어 고객을 ‘소비의 주체’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눈이 어두워지고 청력이 떨어지는 건 세상사에 덜 얽히게 하려는 하느님의 배려다.” 일리는 있지만, 요즘의 60대는 예전의 60대가 아니다. 정신연령은 젊고, 할 일도 많고, 앞으로 살아갈 날도 길다. 주변에는 꼭 봐야 할 정보와 글자들이 넘쳐난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24년 말 65세 이상 인구는 1,000만 명을 넘어 전체의 20%가 됐다. 시니어는 더 이상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의 핵심 세대다. 그들의 생활환경에 맞춘 정보 접근성 개선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공공기관과 기업은 글자 크기, 폰트 대비, 외국어 표기원칙 등 ‘가독성 최소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정보 디자인은 고령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전 세대의 불편을 줄이는 길이다.
손자병법 허실편에는 “수인지 이제류(水因地而制流)”라는 말이 있다. 물이 지형에 따라 흐름을 바꾸듯, 천만 시니어라는 새로운 지형에 맞춰 행정과 서비스도 달라져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니어의 눈높이에 맞춘 정보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고령사회에 필요한 ‘제유(制流)’다. 시니어의 눈이 편안해질 때, 사회 전체의 시야도 함께 밝아질 것이다.
http://www.dailycnc.com/news/articleView.html?idxno=240516
<참고>
1. 김지현기자, 동아일보, ‘눈의 노화’ 황반변성, 심하면 실명… 정기검진 필수, ‘눈의 노화’ 황반변성
2. 박혜리기자, 중앙일보, ‘단순한 조작에 큰 글씨’ 시니어 TV 나왔다
3.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1월 첫째주 TMB 뉴스] 한국이 초고령사회가 됐어요!
4. 김미경기자, 메디컬투데이, 황반변성 환자 5년간 2.5배 급증.. 초고령화 사회에서 '눈의 노화' 위험성 커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