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費留)의 함정, 삼성의 ‘자만 금지령’

戰勝攻取, 而不修其功者凶, 命曰費留 /전승공취, 이불수기공자흉, 명왈비류

by 최송목

삼성전자가 분기 영업이익 20조 원 시대를 다시 열며 주가 15만 원을 돌파했다.


표면적으론 완벽한 승리지만, 이재용 회장의 메시지는 얼음물처럼 차갑다. “지금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자.” 모두가 승리에 취해 있을 때, 그는 왜 이런 뼈아픈 자성을 요구했을까.


《손자병법》 화공편(火攻)에는 승리 이후의 태도를 경계하는 ‘비류(費留)’라는 말이 등장한다.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그 공을 닦지 않는 자는 흉하다. 이를 비류라 한다.”

(戰勝攻取, 而不修其功者凶, 命曰費留 / 전승공취, 이불수기공자흉, 명왈비류)

여기서 ‘공을 닦는다(修其功)’는 것은 승리 이후 성과를 관리하고 조직의 긴장을 늦추지 않는 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승리라는 결과물을 발판 삼아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리 후에는 반드시 뒷정리가 필요하다. 이 과정을 소홀히 함으로써 승리의 열매를 따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무는 상태, 이것이 바로 ‘비류(費留)’다.


삼성의 20조 흑자는 주도적 승리라기보다 AI 시황이 실어다 준 전리품에 가깝다. HBM 수요 폭발에 따른 반사이익일 뿐, 압도적 기술 격차로 제압한 결과가 아니라는 뜻이다. 실적이라는 숫자에 안주해 기술의 본질을 닦지 않는다면, 삼성은 이미 비류의 늪에 빠진 셈이다.


2026년 1월 전 계열사 2000여 명 대상의 ‘신년 임원 세미나’에서 공유된 영상에는 고 이건희 선대회장의 ‘샌드위치론’이 다시 등장했다. 과거의 샌드위치가 '가격과 품질'의 문제였다면, 지금의 샌드위치는 '원천 기술과 속도'의 문제다. 미국이 설계하고 중국이 제조를 무섭게 확장하고 있다. AI 대전환기 속에서 미국과 일본의 기술력, 중국의 무서운 추격 사이에 낀 한국의 위기상황은 2007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미국은 나는데 우리는 아직 기어 다닌다”는 혹평은 삼성 내부의 절박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은 TSMC와 10배 차이로 벌어졌고, ‘메모리 1위’ 자부심은 HBM 주도권을 경쟁사에 내주며 상처 입었다. 실적은 수직 상승했지만, 근본적 경쟁력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제기되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주가가 3배 뛰었다고 해서 삼성의 기술력이 3배 강해진 것은 결코 아니라고. 지금 삼성에게 주어진 시간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견제로 얻은 ‘벌어놓은 시간’ 일뿐이다. 이 금쪽같은 기회에 조직 내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의 DNA를 복원하지 못한다면, 20조 원의 흑자는 혁신 동력을 마비시키는 독이 든 성배가 될 것이다.


단순히 기술력이 뒤처진 것이 아니라, 품질 문제를 눈감고 도전을 머뭇거리는 '관료주의적 안일함'이 비류의 늪을 더 깊게 만들고 있다. 손자병법이 말하는 최고의 승리는 단순히 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통해 조직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숫자는 때때로 진실을 가린다. 분기 20조 원이라는 실적에 취해 내부의 문제를 방치하고 성장을 멈춘 안일함이야말로 ‘비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재용 회장의 ‘자만 금지령’은 단순히 겸손을 강조하는 도덕적 훈계가 아니다. 역대 최고 수준의 실적이라는 달콤한 환상에서 깨어나, 다시 척박한 기술의 전장으로 복귀하라는 엄중한 명령이다.


승리에 취해 내실을 닦지 않는 자에게 내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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