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고정기자, 소이일인지이목야 (金鼓旌旗者, 所以一人之耳目也)
숲에서 호랑이는 사라지고, 도시에서는 오히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용과 봉황이 우리 생활 주변을 채우고 있다. 궁궐의 단청과 천장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권력 상징, 스포츠 대회 이름, 도시의 지명과 상호에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다. 실재하는 동물은 멸종 위기에 놓이는데, 실재하지 않는 존재는 오히려 더 넓게 퍼진다. 기묘한 역설이다.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은 아니다. 루마니아에서는 드라큘라가 대표적 관광 산업이 되었고, 전설 속 존재들은 세계 곳곳에서 시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반면 곰과 늑대, 까마귀 같은 실제 동물들은 서식지에서 밀려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실제 동물은 먹고, 번식하고 기능함으로써 존재한다. 그러나 상상의 동물은 기능이 아니라 의미로 존재한다. 용은 권위와 상승을, 봉황은 질서와 정통성을, 해태는 판단과 정의를 상징한다. 이들은 인간이 욕망과 상상을 투사해 만든 개념의 형상이다. 그래서 실제 동물인 호랑이는 사냥당하면 끝이지만, 상상의 용은 제거할 실체가 없으니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기억과 욕망 속에 존재한다. 인간이 권력과 초월을 갈망하는 한, 형태를 바꿔가며 계속 재생산될 것이다.
주변에 흔히 보이는 ‘구룡’이라는 이름도 그렇다. 곳곳에서 구룡마을, 구룡초등학교, 구룡산, 구룡반점을 만난다. 그곳에 실제로 아홉 마리의 용이 살지는 않는다. 용은 실재하지 않지만, 현실과 기억 속에서 사람들은 힘과 가능성을 덧씌워왔다. 상징이 공간을 덮고, 그 상징이 다시 현실의 의미를 규정한다. 우리는 물리적 세계 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 위에 덧입혀진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문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때 발생한다. 상징이 그 자체로 대상이 될 때, 의미는 믿음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 믿음이 반복될수록 그것은 ‘의지의 대상’이 된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가 자신의 SNS에 예수의 이미지를 올려 논란의 중심에 선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이미지 활용을 넘어, 종교적 상징을 정치적 메시지와 결합해 자기 정치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다. 이때 상징은 현실을 밀어붙이는 강력한 근거로 작동하며, 대중은 점차 그 허상을 실재처럼 받아들인다.
이처럼 상징이 집단의 인식을 제어하는 강력한 기제가 된다는 사실은 일찍이 『손자병법』에서도 경고된 바 있다. 군쟁(軍爭)편에서 "금고정기자, 소이일인지이목야(金鼓旌旗者, 所以一人之耳目也)"라 하였다. 수만 명 병사의 눈과 귀를 하나로 묶어 집단을 통제하는 것이다. 논리가 아니라, 징과 북, 깃발이라는 상징을 통해서다. 사람은 보이는 것에 더 쉽게 지배되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숲에서 밀려나고 있지만, 용은 인간의 욕망 안에서 계속 자라고 있다. 상상은 희망을 낳지만, 그것이 형상이 되어 현실을 대신하는 순간 주객은 뒤바뀐다. 우리는 상상을 ‘창조’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이며 점점 더 정교한 상징을 다듬고 있다.
호랑이를 잃어가며 용을 더 현실처럼 받아들이는 사회라면, 우리는 결국 스스로 만든 허상의 깃발 아래 눈과 귀를 가두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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