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늘 미안한 이름

by 올랜진

첫 번째 그녀를 묘사하자면 이렇다. 큰 키에 퉁실한 등치. 깊은 쌍꺼풀에, 양쪽 입꼬리는 내려간 편이고, 심술궂은 볼은 팔자 주님을 깊이 세기고 있었다. 양쪽 귀는 컸으며 무거운 금 귀걸이로 늘어져 있었다. 항상 홈 드레스를 입고 다녔으며 목소리는 걸걸했다. 내 기억에 그녀를 이렇게 묘사한 이유는 별로 좋은 인성도, 인상도 아니었기에 이런 표현들을 했다. 어떻게 엄마와 알게 되었는지 그 처음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녀를 서울댁이라고 불렀다.


돈이 궁했던 엄마는 노상 그 집에 있었다. 허드렛일을 시키면서 반찬값을 챙겨주는 일 이 푼에 엄마는 간도, 쓸개도 집에 빼놓고 다녔다. 집에 엄마가 없어 서울댁 집으로 찾아 가면, 마치 그 집이 엄마 집인 듯 이런저런 잡일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가 거기에 있다고 해서 반질반질한 마루에 맘 편히 앉을 수는 없었다. 엄마가 안쓰러워 집에 가자고 성화를 하면 서울댁은 엄마 좀 가만히 놔두라고 했었다. 정작 엄마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 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서울댁에서 엄마가 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서울댁은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처음 엄마에게 쥐어준 반찬값은 이제, 안 주거나, 동생에게 돈 몇 천 원으로 퉁쳐버려 엄마를 서운하게 만들었었다. 그런 서울댁의 속셈을 알고, 엄마는 그 집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집에 전화하고, 엄마를 또 오라고 해 일을 시키고, 반찬값을 쥐어 주고는 값싼 흥정에 뿌듯해했었다 그녀는. 어느 날 엄마와 서울댁은 심하게 싸우게 되었고, 자존심이 센 엄마는 그 뒤로 서울댁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두 번째 그녀는 이러했다. 뚱뚱했다. 항시 웃는 얼굴이었고, 언니 언니를 남발했다. 동생에게 툭하면 볼을 비비고, 뽀뽀를 했다. 나는 더럽다고 생각했다. 저항할 힘이 없는 동생은 붙잡혀 늘 그녀의 이쁨을 석연찮게 받아들였다. 동생의 손에 쥐어 준 용돈은 서울댁의 그것보다 쏠쏠했기 때문이다. 항상 엄마를 불러 밥을 해주고, 급한 돈을 빌려 주기도 하면서 엄마의 마음을 놓이게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우리 집 밑바닥을 보지 못한 건지 서랍을 뒤졌고, 무엇인가를 찾으려 했으나 그런 것들이 우리 집에 있을 리가 없었고, 결국 이유가 있었던 잘해줌이 끝이 나버렸다.


사람에게 치인 엄마는 징글징글하다는 표현을 했었다. 그 징글징글함 속엔 속을 썩이는 자식들도 포함이 되었다. 왜 주변에 엄마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생각해 주는 사람이 없었던 걸까. 자식들에게 볶기고, 가난에 넌더리가 난 엄마는 하소연할 사람이 필요했었는데 그럴만한 대상이 없었다. 엄마는 자주 담배를 물고 멍하니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하길래 소리 없이 울기도 했었다. 서울댁이나 뚱녀 이모는 엄마의 눈물에 포함되지 않는다. 엄마는 더 깊은 상념과 고뇌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것도 모자라 엄마를 힘들게 했었다 자식들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엄마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 많았었다. 자식들이 제대로 살지 못함은 본인이 죄가 많아서 그렇다며 울고 또 울었었다.


엄마에게 힘든 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없던 힘도 나게 하는 유일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오빠의 방문이다. 오빠가 집에 온다는 전화를 받고 난 뒤 엄마는 부랴부랴 찬거리를 준비하고 정신없이 집안일에 집중을 했었다. 맏아들... 엄마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가고 나면 더 어쩔 줄 모르는 서러움에 가슴이 미어지면서도 또 오빠를 기다린다 엄마는. 오빠를 위해 엄마는 콜라를 준비하고, 플라스틱 작은 칼로 잘라먹는 롤케이크 빵을 사다 놓았다. 지금도 나는 롤케이크를 보면 오빠가 생각난다. 오빠는 집에 오면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어쩌면 오빠도 집에 잠깐 다녀가는 것이 숨통이었을까. 오빠가 집에 오면 갑자기 먹을 것이 생겨서, 엄마가 울지 않아서, 우리 찌든 삶에 때 묻지 않아 보여서 좋았었다. 동생들 이름을 부르며 잠깐이라도 관심을 가져주는 게 신이 나기도 했었다. 엄마, 아버지에게 꼬박꼬박 존대하는 모습은 하대에 가까운 경상도의 짧은 말투를 무색하게 했었다.


엄마는 많은 날들을 견디었다. 하루라도 맘 편할 날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었다. 그때, 그 시절에 엄마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여전한 아픔이다. 우린 힘이 없었고, 어렸다. 어른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하찮은 나이였고, 그 이후의 삶을 예측도 못하는 아둔함이 있었다. 지금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을까. 엄마에게만 빨리 가는 세월을 눈치챈 듯 먼 거리에 있는 나에게 어서 오라 한다. 엄마가 살아 있을 때 오라고 한다. 타국에 살고 있는 나는 가까이서 엄마를 살피지 못함이 늘 미안하다. 곧 하늘길이 열려 맘 편히 오고 가는 날들이 오면 엄마에게 갈 것이다. 콜라와 롤게익이 없어도 좋다. 엄마의 기다림이 조금이라도 채워진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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