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 받는 세뱃돈을 합리화하는 경제학적 변명
설날 아침, 큰집의 공기는 무겁다. 나는 친가 쪽 '첫째'다.
내 밑으로 줄줄이 달린 사촌 동생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본다. 휴가 나온 사촌, 예비 고3 수험생 사촌... 그들의 눈빛은 말하고 있다. "형(오빠), 오래 받아서 우리 길 좀 닦아줘."
어른들도 시선으로 말을 하는 것만 같다. "우리 장손, 벌써 20대 중반이지?"라는 말을 "이제 세뱃돈 받기는 좀 민망한 나이지?"라 자연스럽게 곡해하게 된다. 덕담과 함께 건네지는 봉투를 받을 때, 나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린다.
...이걸 받아도 되나? 아니면 "아유, 됐습니다. 이제 받을 나이는 지났죠."라고 거절하는 훈훈한 미담을 만들어야 하나? 하지만 내 지갑 사정은 훈훈하지 않다. 나는 "감사합니다"라며 넙죽 받는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몰래 봉투를 열어본다. 5만 원권이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입꼬리는 올라간다.
평소였다면 좋아하는 통계와 근거를 꺼내오고 싶었을 시점.
대한민국 평균 성인은 몇 살까지 세뱃돈을 받을까? 뉴스 기사를 검색해보면 '적정 세뱃돈 졸업 나이'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나는 굳이 검색하지 않는다. 아니,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통계는 개개인의 특수한 사정을 반영하지 못하는 차가운 숫자일 뿐이기 때문.
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만약 검색했는데 '평균 22.5세' 같은 결과가 나오면 어떡한단 말인가? 데이터가 "넌 지금 불법 수금을 하고 있어"라고 팩트를 날리는 꼴을 볼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는 모집단이 불분명하고 편향된 통계 따위는 믿지 않기로 한다.
대신 나는 경제학적 이론을 들이민다. 내가 이제까지 세뱃돈을 받는 건, 결코 염치가 없어서가 아니다. 경제학적으로 '사회 전체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경제학에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과 '생애주기 가설'이라는 게 있다. 쉽게 말해, 똑같은 5만 원이라도 배고픈 대학생이 느끼는 행복(효용)과, 돈 잘 버는 40대 직장인이 느끼는 행복의 크기는 다르다는 것이다.
현재의 나 (가난한 대학생): 5만 원 = 친구들과 술 한잔 + 다음 날 서브웨이 샌드위치까지 (효용 100)
미래의 나 (취업한 직장인): 5만 원 = 그냥 점심값 몇 번 (효용 10)
"그러니, 나중에 제가 취업해서 돈 많이 벌었을 때 주지 마시고, 가장 가난한 지금(유동성 제약 구간) 몰아서 주십시오. 그래야 이 돈의 가치가 빛을 발합니다. 지금 주시는 세뱃돈은 단순한 용돈이 아니라, 미래의 잠재 우량주인 조카에게 투자하는 '엔젤 투자'이자, 제 인생에서 돈이 가장 달콤하게 느껴질 시기에 투입되는 '적기 재정 정책'입니다." ...라고 마음속으로만 외치며, 나는 오늘도 조용히 봉투를 주머니에 넣는다.
오후가 되어 외갓집으로 향한다.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경제학적 변명을 떠올렸기 뿐만은 아니다. 나는 외가 쪽 '막내'이기 때문이다.
친가에서는 근엄한 장손 코스프레를 했지만, 여기선 무장 해제다. 위로 줄줄이 있는 사촌 형, 누나들은 이미 대기업 대리, 전문직이다. 그들 틈에서 나는 여전히 '귀여운(?) 막둥이 대학생'일 뿐이다. "우리 막내 공부하느라 힘들지?" 삼촌이 봉투를 건넨다. 친가에선 눈치 보며 받았던 손이, 여기선 자동반사적으로 나간다. 심지어 애교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이어 형, 누나들도 지갑을 연다. "야, 가서 맛있는 거 사 먹어." 이 순간만큼은 나이도, 체면도, 통계도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저 '상대적 빈곤'을 무기로 삼아 자원을 배분받는 합리적인 경제 주체일 뿐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 주머니 속 봉투를 만지작거린다. 사실 나는 알고 있다. 어떤 경제학 교과서를 뒤져봐도 '수익률이 불투명한 고학번 취준생'에게 투자하라는 이론은 없다는 것을. 그들은 나의 미래 가치를 계산해서 지갑을 연 게 아니다. 그저 내 편이어서, 밥이나 든든하게 먹으라고 건넨 '비합리적인 지출'이었다.
촘촘하게 세워둔 나의 경제학적 방어막은 "힘내라"는 투박한 말 한마디에 허무하게 뚫려버렸다. 나는 오늘 가장 비경제적인,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투자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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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금 사용 내역 보고]
사용처: 시장 귤 한 봉지(당도 양호)
산출물: 귤 까먹으며 쓴 다음 글(금요일 발행 예정) ↓
왜 <1박 2일> 강호동은 가위바위보에 목숨을 걸까? (부제: 토너먼트 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