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하기엔 내 점심값이 너무 비싸서

-서브웨이 알바생은 왜 매일 밤 '홀스래디쉬'를 버려야 할까

by 묘한 경제

늦잠 탓에 늦은 점심을 먹는 2시 10분, 서브웨이 유리창 너머로 긴 줄이 보인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심박수가 미세하게 빨라진다. 빵은 위트, 치즈는 슈레드, 야채는 다 넣고... 여기까지는 기계적으로 읊을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소스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알바생의 무미건조한 질문. 내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 조합이 스쳐 지나간다. '오늘은 좀 매콤한 게 당기는데, 사우스웨스트 치폴레를 넣어볼까? 머스타드는 왜 '매콤한 맛'으로 분류되어 있는거지?' 하지만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비겁하게도 늘 똑같다.

"그냥... 썹픽(추천 조합)으로 주세요." 혹은, "렌치랑 스위트 어니언이요." (어제도 먹은 그 조합)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생각한다. 이젠 나름 주문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인터넷에 널린 게 '꿀조합' 레시피인데, 나는 왜 매일 똑같은 맛만 고집할까? 이건 단순히 내가 결정장애라서가 아니다. 내 점심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실패하기엔 우린 너무 가난하다

경제학에는 '손실 회피(Loss Aversion)'라는 개념이 있다. 인간은 이익에서 얻는 기쁨보다, 손실에서 오는 고통을 더 크게 느낀다는 이론이다.

15cm로는 간에 기별도 안가는 20대 대학생인 나에게 한 끼 13,500원(이탈리안 BMT 30cm 기준)은 결코 가벼운 돈이 아니다. 이 거금을 투자했는데, 호기심에 선택한 '홀스래디쉬' 소스가 내 입맛에 안 맞아서 점심을 망친다면? 그 타격감은 단순히 "맛없네"로 끝나지 않는다. 오후 내내 기분이 잡칠 만큼의 심리적 파산이다.

그래서 우리는 검색창을 켠다. "서브웨이 알바생 추천 꿀조합." 이건 나의 취향을 찾기 위한 능동적 탐색이 아니다. 남들이 검증해 준 안전자산에 편승하려는 비겁한 회피다. 우리는 실패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 모험 대신 '렌치 소스'라는 안전한 국채를 매입한다.


과연 썹픽(Sub-Pick)이 효율적일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서브웨이가 야심 차게 도입한 '썹픽(이거 하나 주세요 하면 알아서 다 넣어주는 시스템)'은 겉보기엔 효율적이다. 결정 시간을 줄여주니까. 하지만 알바생 친구의 말은 달랐다.

"렌치 소스는 하루에도 몇 통씩 리필해야 하는데, 홀스래디쉬나 머스타드는 안 팔려서 유통기한 지나면 그냥 버려."

아이러니하다. 효율을 위해 만든 시스템이, 오히려 '재고의 불균형'을 가속화하고 있다. 사람들은 실패가 두려워 추천(썹픽)을 고른다. 추천 메뉴는 당연히 호불호 없는 소스로 구성된다. 사람들은 더더욱 렌치만 먹게 되고, 홀스래디쉬는 선택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마치 스펙 한 줄이 부족해서 면접장 구경도 못 해보고 서류에서 광탈당하는 우리네 취준생 신세 같아서, 버려지는 홀스래디쉬가 묘하게 짠하다.

어쩌면 오늘도 렌치를 선택한 나는, 한번도 홀스래디쉬를 먹어본 적이 없는 나는, 누구보다 홀스래디쉬를 사랑할 잠재적 마니아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주제에.

어쩌면 저번에 바로 떨어진 회사도 '나'라는 소스가 가장 입에 맞았을지 모르는데.

그런 쓸모없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모두가 아는 그 맛, 안전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다.

역시, 실패 없는 맛이다. 그래서 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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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입안에 남은 쓴맛을 지우려 콜라를 들이키다 문득, 엉뚱한 상상이 피어올랐다. 이 쓴맛을 단맛으로 바꿀 방법은 없을까? 냅킨에 휘갈긴 내용은 이렇다. 경제학도의 시선으로 본 이 비효율의 고리를 끊을 방법. 이름하여 <TNS (Try New Sauce) 프로젝트>다.

방법은 간단하다. 매달 판매량이 저조한 '이달의 비주류 소스(예: 홀스래디쉬, 레드와인식초)'를 선정한다. 그리고 고객이 용기를 내어 그 소스를 선택하면, '미니 쿠키'를 무료로 주는 것이다.

왜 하필 쿠키냐고?

첫째, 재고로 버려질 소스를 소진시키니 점주들의 폐기 비용이 줄어든다. (점주 이득)

둘째, 서브웨이 쿠키는 원가 대비 마진이 높은 효자 상품이기에 '미니'를 만든다면 얹어주기 알맞다.

셋째, 이게 가장 중요한데... 서브웨이 쿠키는 너무 맛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벽한 '보험'이기 때문이다.

고객이 낯선 소스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맛이 없을까 봐'다. 그런데 만약 소스가 맛이 없더라도, 달콤하고 쫀득한 화이트 마카다미아 쿠키가 내 입을 씻어준다면?

"에이, 샌드위치는 좀 별로였는데 쿠키가 공짜니까 괜찮네."

인간은 단순하다. 이 작은 보상 하나만 있어도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넛지(Nudge)'라고 부른다. 쿠키라는 안전장치가 '손실 회피' 본능을 상쇄시켜 주는 것이다.

게다가 이 전략은 쿠키 매출 증대로도 이어진다.

서브웨이 쿠키, 참 맛있는데 묘하게 손이 안 간다. 비싼 가격도 그렇고, 마치 홈플러스 계산대 앞 초콜릿처럼 대충 진열되어 있어 눈길을 끌지 못하니까. 하지만 공짜로 맛본 그 '첫 경험'이 강렬하다면? 아마 다음번엔 제 돈 주고 사 먹게 될걸. 즉, 잠재적 충성 고객을 확보하는 셈이다.


우리에겐 추천이 아니라 '보험'이 필요하다

물론 서브웨이 마케팅팀이 할 짓 없는 방구석 경제학도의 이 글을 볼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반쯤 먹어가며 든 생각은 꽤 씁쓸했다.

우리가 매일 똑같은 렌치 소스를 고르고, 남들이 좋다는 대기업만 바라보고, 경제학을 전공했다면 다들 CPA 시험에 몰리는 이유. 그건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우리가 취향이 없거나 꿈이 없어서가 아니다. 한 번 삐끗하면 회복하기 힘들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실패했을 때 "괜찮아, 이거 먹고 힘내"라고 건네주는 '쿠키'가 없기 때문이다.

청춘에게 필요한 건 "요즘 뭐가 대세야(썹픽)"라는 추천이 아니다. "이거 한번 먹어봐. 맛없으면 내가 쿠키 사줄게"라는, 실패를 허용해 주는 작은 보험이다.

사실은 용기내 고른 홀스래디쉬가 취향이 아니라고 해서, 잠깐의 실패를 겪었다고 해서 샌드위치가 못 먹을 음식이 되진 않는다. 코끝이 찡하고 눈시울이 붉어질 순 있어도, 그건 여전히 든든한 한 끼고 꽤 근사한 맛을 낸다. 결코 내 점심을 통째로 망가뜨리는 독약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도 조금은 과감해져도 좋지 않을까.

오늘도 여느때와 같이 한 망상을 글로 끄적여본 덕인지, 입안에 남은 샌드위치가 이젠 조금은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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