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나는 4번의 유배를 당했다(3)
덤 앤 더머 아니면 원 플러스 원
한강으로 유배간 지 정확히 2년 반 만에 후배들보다 늦게 승진이란 걸 하게 되었다. 한 직급 승진하는 데 만 14년하고도 몇 개월이 걸린 것이다. 아마 당시에 최장기간 사무관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튼 승진하고 외국인생활지원과장으로 시작하였고, 그 다음 보직이 행정국 인력개발과장이었다. 누구나 해보고 싶은 꽤 좋은 자리다. 더구나 당시는 박원순 시장님으로 바뀐 상태에서, 박시장님께서 직원들의 사기진작 및 동기부여, 복지 등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상태였다.
앞의 ‘춤추는 서울 시장’ 편에서 이야기한 대로 나는 인력개발과장으로서 시장님의 뜻을 받드는 한편, 내가 사랑하는 직원들의 사기진작 및 후생복지 등을 위하여 나아가 밝은 직장내 조직문화를 만들어보기 위하여 나름 최선을 다했다. 그때는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그런데 여기서도 갈등요인은 존재했다. 내가 인력개발과장으로 막 갔을 때, 전임 과장으로부터 몇가지 현안 사항을 인수인계 받았다. 그중에 가장 큰 당면 현안이 ‘전공노’(전국공무원노조) 노조의 사무실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인력개발과가 공무원 노동조합의 카운터 파트너였기 때문이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박원순 시장님께서 서울시장 선거운동을 할 때 전공노에서 많은 지지를 해주었다고 한다. 해서 시장님께서 시장 당선이 되면 전공노 서울시 지부 사무실을 만들어주기로 약속을 하셨단다. 헌데 당시에 전공노는 서울시에서 서공노(서울지역공무원노동조합)에 밀려 소수였다. 25개 자치구 대부분은 이미 전공노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서울시 본청만큼은 서공노에 밀려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더욱 노조 사무실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박시장님께서 취임하신지 한참 되었는데도, 서공노의 반대로 노조사무실을 별도로 만들어 놓고도 실제 정식으로 문을 열어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검토한 결과, 노조가 어느 정도 규모가 있으면 당연히 노조 사무실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허나 서공노측에서 다수의 힘으로 못 만들도록 강하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내가 인력개발과장으로 갔을 때, 서공노 위원장님은 내가 잘 아는 분이었다. 직전에 내가 한강으로 빠졌을 때, 한강사업본부 노조위원장을 하고 계셨던 분이고, 내가 거기 있는 동안 우리 둘은 서로 등치와 배포가 크다는 이유로 술도 한 잔 하면서 친하게 지내며 형, 동생 하던 사이였다.
나는 인력개발과장으로 부임하고 얼마 안 되어 바로 이 문제를 서공노 노조위원장님과 상의하였다. 위원장님은 원칙은 잘 알고 있으나, 전공노가 사무실을 가지면 위세가 훨씬 커질 수 있다는 많은 서공노 노조 간부들의 반대가 있어 쉽게 허락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던 중, 서공노에서 우리 인력개발과로 상당히 큰 사안에 대한 부탁이 공문으로 접수되었다. 나는 과거에도 해 준 전례가 있다는 노조 담당 팀장님과 직원분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안 된다고 통보하라고 지시하였다. 노조가 정당한 이유 없이 우리 업무를 방해하고 있는데, 우리만 바보같이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 없다는 점을 정확히 통보하라고 하였다.
곧 위원장님으로부터 면담 요청이 들어왔다. 그 요구 건은 과거에도 매년 했던 일이므로 꼭 들어줘야 하며, 특히 그 건의 해당자분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어서 안 들어 주면 부작용이 크다는 얘기였다. 나는 곧바로 딜에 들어갔다. “그 건을 들어드릴테니까, 전공노 노조 사무실 건과 1대1로 바꿉시다”라고.... 위원장님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그럽시다”라고 답했다.
그 길로 전공노 노조는 번듯하게 사무실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행정국장님을 모시고 정식으로 사무실 개소식도 거행했다. 전공노의 서울시 간부진 포함하여 모든 자치구의 전공노 간부들까지 참석하여 성대히 치렀고, 모두가 서울시의 당찬 조치에 만족하고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시장님께 보고드리니 “그렇게 안 되던 일을 해 주셨네요. 강 과장님 고맙습니다.”라고 칭찬하셨다. 굳이 누구의 칭찬을 받고자 한 것이라기 보다, 그 일이 정당하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강하게 밀어부친 것이라고 나는 스스로 자부하였다.(실제로 전공노는 사무실을 가진 이후에 그 위세가 많이 커져서, 지금은 서공노보다는 크지 않지만, 그래도 어깨를 나란히 하며 활동하고 있다.)
일이 여기서 끝났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또 다시 그 일로 다른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한다.(세상 일은 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위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서공노 노조위원장께서 전공노 노조 사무실을 허락할 때, 노조 간부들과 긴밀한 협의를 거치지 않은 듯하다. 단지 주변의 몇몇 사람들과 상의해서 일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해서 다수의 노조 간부들이 서공노 위원장 개인에게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왜 그랬냐고, 전공노가 급격히 커지면 위원장이 책임질 수 있냐고?” 살짝 궁지에 몰린 위원장은 다른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와서 대신에 뭔가 큰 것을 내어줄 것을 요구했다. 담당 팀장님과 주임님에게 검토를 지시한 결과, 그것은 불가하다는 판정이 났다.
내 유배 이야기의 단초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간에는 나를 믿고 맡겼던 행정국장님께서 이 건에 대해서는 나에게 다시 검토해보라고 지시하신 것이다. 내가 알기로 서공노 노조 위원장님과 행정국장님은 서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셨다. 노조위원장이 나에게 부탁한 것이 되지 않으니, 서공노 노조가 단체로 행정국장님을 찾아가 강하게 요구한 것이다. 나는 정밀하게 검토하였다. 결과를 가지고, 당시 인력개발과의 쟁쟁한 팀장님들 다 모여서 집단 검토도 하였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해서 담당팀장님과 함께 국장님께 다시 보고드렸다. 불가하다고, 어쩔 수 없다고.... 국장님은 “당신들 검토는 못 믿겠으니 정식으로 법률검토를 해봐라”라고 지시하셨고, 나는 일단 “알겠습니다”하고 나왔다.
그렇지만 하란다고 바로 할 내가 아니다. 해서 이번에는 국장님께서 가장 총애하시는 우리과 주무팀장님과 같이 들어가서, “법 규정에 거의 그대로 적혀있는데, 법률검토를 한다는 것은 쪽팔리는 일입니다. 그러니 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보고를 드렸다. 여기서 국장님께서 그 유명한 문구를 남기신다. 나와 팀장님에게. “그렇게 밖에 검토를 못하냐, 9급만도 못한 놈들!” 와! 나도 십몇 년, 더구나 팀장님은 25년여를 공무원으로 재직한 사람인데 9급만도 못하다니.... 그렇게 해서 우리는 결국 법률검토를 의뢰했고, 결과는 아닌 것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일단락 되었으면 또 얼마나 좋겠는가? 현실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법....
이제 진짜 나의 3번째 유배가 현실화 된다.
위 사건은 그렇게 결말이 나고, 그러던 중 어느 날 아침 국장님실에서 매주 하는 정례간부회의가 있었다. 행정국 소속의 총무과장, 인사과장, 행정과장, 인력개발과장, 정보화과장 이렇게 과장 다섯 명과 총무팀장, 행정팀장까지 국장님 포함 총 8명이 참석해서 그 주에 일어날 주요 현안을 보고하는 자리였다. 총무과장, 인사과장, 행정과장이 보고를 마치고 내가 보고를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보고 내용과는 관계없이 국장님께서 지난 법률검토 이야기를 꺼내셨다. “강과장은 말이야, 하라는 법률검토는 안 한다고 하고,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라는 말씀을 하신다. 나는 “죄송합니다. 국장님, 이제 지난 일이니 지나가시지요” 했다. 그래도 국장님은 또 언짢게 말씀하신다. 나는 다시 “그래서 법률검토 하고 정리되었지 않습니까? 왜 몇 번을 말씀하십니까?”
순간적으로 모두가 놀랬다. 나의 반발에 국장님께서 탁자 위에 있던 당신 수첩을 반대편으로 힘차게 던지시면서, “나 강과장하고 일 못 하겠어. 강과장 다른 데로 보내!. 같이 못 있겠어. 오늘 끝!”하고 나가버리셨다. 나를 비롯한 모든 참석자들은 갑자기 일어난 일에 모두가 벙쪄서 서로를 쳐다보다가,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으므로 그 방에서 나왔다. 나는 사무실로 가서 팀장님들을 소집하여 이 이야기를 하고 조용히 자리에 있었다.
곧이어 행정과장님께서 내 방으로 오셨다. 사실 행정과장님은 나랑 고시 동기이자 형이었다. 나에게 “강과장, 국장님께서 화가 나셔서 그런 것이니, 개의치 말고 지금 바로 가서 사과드려. 풀어지실거야”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하다가, ‘그래 내가 져야지“라고 마음먹고 국장님실로 갔다. 국장님도 화가 안 풀리셨는지 의자에 몸을 눕히고 계셨다. 나는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국장님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않겠습니다. 한 번만 더 제가 불손하게 하면 그때는 가차 없이 저를 보내십시오. 이번만큼은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국장님께서 나를 살짝 쳐다보시더니, ”알았으니까 나가봐“라고 하셨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서울시청 건물 밖 흡연실에서 다른 간부들과 담배를 피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노조담당 팀장님께서 뛰어 오더니 다짜고짜 ”과장님 큰일 났습니다. 인사팀장이 불러서 갔더니, 이번 인사에 저를 발령낸답니다.“라고 하는 거였다. 나는 바로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어? 팀장을 발령내는 데, 소관부서 과장하고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발령내는 게 어딨어? 갑시다. 인사과장한테“ 그랬더니, ”사실은 저만 가는 게 아니고, 과장님도 같이 발령이 난 답니다.“라는 거였다.
나는 바로 인사과장을 찾아갔다. 사실 인사과장은 ’세상에 이런 일이‘ 편에 등장하는 조사과장 형이었다. 그때 나에 대한 조사를 거부해서 좌천 발령 났던 바로 그 형. 씩씩거리고 찾아간 나에게 인사과장 형은 조용한데 가서 이야기하자 라고 하면서 아무도 없는 밖으로 나를 데려갔다. ”사실은 지난 번 일 때문에 내가 많이 고민했는데, 너 우리 행정국에 같이 있으면 시끄러워서 안 되겠다 싶어 내가 결정한 것이다. 너 내년에 유학도 가야하니, 조용한 데 가서 6개월 있으면서 유학 준비하고 가라. 절대 이 발령은 국장님 뜻이 아니라, 내 뜻이다.“라는 거였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미 정해진 일 내가 몸부림쳐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바로 멘토격인 당시 예산과장(나를 신문팀장으로 천거해주신 전에 노인복지과장님)에게 찾아가 이 사실을 말씀드렸다. 제가 어찌하면 좋겠는지? 예산과장님은 ”선섭아, 그냥 조용히 가라. 시끄럽게 하지 말고. 그게 너한테 좋다“ 하셨다. 나는 바로 결심하고 ”네, 그러겠습니다“하고 나왔다.
그렇게 해서 나는 바로 시립대학교 교무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젊은 시절 아이들 아토피 치료 때문에 3년 반이나 근무했던 서울시립대로 다시 간 것이다. 고시 출신은 가기 어렵다는 서울시립대를 나는 영광스럽게도 두 번이나 가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노조담당 팀장님도 같이 발령이 났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부터 지금 모임을 할 때마다, 서로를 ’덤 앤 더머‘ 또는 ’원 프러스 원‘으로 지칭하고 있다. 웃으면서....
사실 그때는 내가 바로 다음 해 초부터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 결정이 나 있는 상태였다. 인력개발과장 1년을 마치고 유학을 가게 되어있었던 것이었다. 해서 6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설마 발령이 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었다. 그런데도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는 인사과장 형의 충심과, 영어가 짧은 나에게 유학 준비를 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배려로 나는 또 한 번 유배를 간 것이다. (당시에 6개월만의 갑작스런 발령은 유학준비를 위한 배려로 세간에 알려졌다. 다행이지 뭐야, 대들다가 쫓겨났다는 것 보다 훨 낫지....)
첨언 하자면, 서울시립대는 나를 좋아했다. 내가 예전에 기획과장으로 있을 때 모셨던 교수님들이 총장 및 각종 처장 등 주요 직책을 맡고 계셨고, 뜬금없이 교무과장으로 온 나를 매우 반기셨다. 더구나 당시에 우리 시 감사위원회의 감사 결과, 아주 쎈 지적을 받고 일을 해결해야 했는데, 마침 내가 그 자리로 간 것이다.
시로부터 전임교원 강의비율이 너무 낮으니, 이를 전체 학교 차원에서 끌어올리라는 주문을 받아놓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 교수님들중 상당수는 대학원 강의를 선호하셔서 학부 강의를 시간강사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보직을 받은 교수님들에게 과하게 책임강의 시간을 빼주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나는 그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전임교원 강의비율이 낮은 이유를 하나하나 분석해서 교무처장님과 총장님께 보고드리고, 전체 교수회의를 소집하여 전 대학 차원에서 대책을 수립해야 하는 절박함을 이해시키고, 교수님들의 협조를 구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시행했다. 교수님들의 협조를 바탕으로 전임교원 강의비율을 기준선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난 다음 해에 바로 미국 유학길을 떠났다. 모두의 배웅을 뒤로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유배의 설움은 잠시뿐, 오히려 나에게는 기쁨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세상일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때로는 새옹지마 플러스 전화위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