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공무원에게 「나이」란?
꼰대의 생각 : 새삼 나이의 의미
예로부터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리고 우리말에는 다른 나라 말에는 없는 경어체가 있다. 심지어 같은 뜻인데도 윗사람에게만 따로 쓰는 단어들도 있다. “밥 먹었어?”, “식사 하셨어요?”, 그리고 “진지 잡수셨어요?”처럼.... 나이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나이를 매우 중요시 하였다. 여전히 연세를 드신 분들 사이에서는 나이가 중요한 기준이다. 경로당에서는 60대는 아예 안쳐주고, 70대도 쫄병이나 동생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그분들끼리는 나이를 기준으로 사이좋게 질서가 유지된다.
헌데 가만히 보면, 요즘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이 나이 기준이라는 것이 상당히 허물어졌다. 집단과 협력의 필요성이 점점 줄어들고,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서구문화의 영향이기도 해서, 나이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구시대의 낡은 관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심지어 나이 먹었다고 행세하다가 곤경에 처하는 일까지 생기니, 어디서건 아예 나이를 기준으로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공무원 조직에서 나이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나는 솔직히 조직은 어느 정도 규율이라는 것이 존재해서 질서가 유지되면서 자율성이 발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꼰대의 입장에서 공무원 조직에서 나이가 어떠한 역할을 해야하는지 같이 생각해보면 좋겠다는 뜻으로 이 글을 쓴다. (욕 먹을 각오하고...)
우리 공무원 조직은 나이와 관련하여 다른 조직과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나도 공무원 들어오기 전에 사기업 생활을 약 3년간 해 봤지만, 사기업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 대부분의 조직에서 나이와 직급은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다. 상대적으로 어릴 때 들어가서 거기서 승진하고 쭉 있으니까 나이와 직급은 대체로 비례한다. 그런데 유독 공무원 조직은 꼭 그렇지가 않다.
대다수 공무원은 9급부터 시작하는데, 중간에 치고 들어가는 고시제도와 7급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일부 공무원 나이 제한이 없어져서 가끔 나이 드시고 들어오시는 신규 직원분들도 있다.) 여기에 임기제 계약직 공무원이 있고, 요즘은 더구나 단체장과 궤를 같이 하는 정무직 공무원이 상대적으로 많아졌다.
내가 몸담고 있는 서울시는 특히 그렇다. 고시(5급)로 해마다 적지 않은 공무원이 들어오고, 또 7급 공채를 통해 고시보다 많은 수가 들어온다. 서울시에는 9급으로 입직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지만, 구청에서 근무하다가 7급 이상일 때 큰물에서 근무하고 싶은 분들이 교류를 통해서 서울시로 들어온다. 한 마디로 짬뽕이다.
그래서 급기야 이런 현상도 있다. 예를 들어, 82년생 고시 출신 과장님, 78년생 7급 출신 팀장님, 74년생 9급 출신 6급 주무관님이 같이 근무한다. 나이로 보면 완전 거꾸로다. 이런 경우 서로 호칭은 어떻게 해야 하나?
또 이런 경우도 있다. 나이가 많은 6급 고참 주무관님과 이제 막 신규로 입사한 7급 주무관님이 한 팀에서 근무한다. 두 분 모두 팀장은 아니므로 주무관으로 통한다. 대부분 이런 경우 서로 ○○○ 주무관님이라고 호칭한다. 서로 존칭한다. 나이에 관계 없이 직급이 같은 주무관이므로....
나는 여지껏 구청에서 만 3년, 서울시청에서 만 25년, 총 28년의 공직생활을 하면서 나이에 관해 여러 가지 불편한 경우를 목격했다.
나이 어린 고시 팀장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주무관을 살짝(?) 하대하거나, 어떤 경우는 고시 과장이 자기보다 아주 큰 형뻘인 팀장님께도 함부로 부르거나 막 대하거나 하는 심한 경우도 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같은 주무관이라고 나이 차이나 공무원 짬밥 차이가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서로 존칭을 쓰며 깍듯하게 부르는 경우도 많다.
내가 처음 공무원에 입직해서는 최소한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다. 2000년대 초에도 일부 고시 출신 높은 분들이 직원들을 함부로 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건 단지 인격이 저급한 몇 사람의 튀는 행동으로 당시에도 비난을 받았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서로 나이나 짬밥을 기준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존칭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기분 나쁘지 않는 선에서 예의를 갖춰 대했었다. 그래서 나름 형 동생 같은 사이로 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다.
요즘은 선배가 후배를 ○○○씨라 불러도 안 된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후배가 선배를 ○○○ 선배님이라 부르는 경우도 많지 않다. 당신이랑 나랑 같은 주무관이니 그냥 서로 ○○○ 주무관님이라고 상호 존칭하는 것을 원한다. 존중하는 것이 당연하고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선배가 후배 부르는 것이 내심 마뜩치 않을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순전히 내 생각임)
나이 어린 팀장이나 과장을 상관으로 모시는 경우 또한 어렵다. 이런 경우는 나이는 잊어야 한다. 내 생각으로는.... 직급이 깡패니.... 상관이니 존칭을 쓸 수 밖에 없다. 허나 이 경우에는 상급자가 잘해야 한다. 직원분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관리자인 경우는 반드시 그 직원분에게는 각별히 신경써서 존칭을 써야 한다. 누구누구 팀장님, 또는 누구누구 주무관님 이라고....
나아가 내 생각으로는 사무실을 떠난 자리에서는 나이 관계를 존중하여 호칭하는 것도 좋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 밑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나의 인격이 더 높아진다. 본인의 나이를 존중해주는 직장상사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
나의 나이 관련한 생각은 이렇다. 한 마디로 나이는 못 속인다. 나이는 하늘이 준 것이고, 다른 어떤 것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하다. 직급으로 구분하는 우리네 공무원 조직에서도 나이는 여전히 중요하다.
참고로 나는 67년생(호적은 68년생)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보다 한 살이라도 어린 사람은 동생이라 불렀고, 나보다 한 살이라도 많으면 바로 형 또는 형님이라고 불렀다. 누군가를 만나서 이 사람과 앞으로 교류를 하겠다 싶으면, 나는 바로 나이를 묻는다. 그리고 나이를 기준으로 관계를 정리했다. 형 아니면 동생 아니면 친구로.... 그리고 조직 내에서도 고시 기수와 관계없이 나이가 같으면 친구 먹었고, 나이가 많은 부하 직원 분에게는 사석에선 형 또는 선배님이라 호칭하였다. 난 그게 가장 편했다. 덕분에 나에게는 형 누나가 참 많다.
나이 30살에 고시로 입직하여, 처음에 강북구청 민방위재난관리과장으로 그리고 바로 다음으로는 사회복지과장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우리과 뿐만 아니라 구청의 과장님 계장님들은 모두 삼촌뻘이었고, 주무관님들 중에 나보다 나이 어린 직원은 한 사무실에 2~3명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나는 정확히 나보다 어리면 약간 반말을 해서 ○○○씨라고 불렀고, 나이가 많으면 ○○○ 주임님(당시에는 현재의 주무관을 주임이라고 호칭함)이라고 불렀다.
내용은 형식을 규정하고, 형식은 다시 내용을 강화한다. 조직내에서 상대방을 어떻게 호칭하는가는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일이다. 한편 어떻게 호칭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강화되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내 경험으로는 공식적인 호칭만으로는 그 사람과 내가 가까워지고 마음을 터 놓는 사이가 되는 것은 어렵다.
상사는 부하직원을 아껴야 하는 게 기본이고, 특히 나이가 많은 부하직원에게는 예를 다해서 그 사람의 인격과 그리고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같은 직급에서는 상호간 존칭도 좋지만, 나이 어린 사람이, 그리고 늦게 들어온 사람이 먼저 상대방에게 선배님 또는 선배라고 호칭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럼 선배가 후배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아껴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선배가 후배에게 주무관님이라고 깍듯이 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너랑 친해지고 싶지 않다는 표시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누구를 존대하는 것이 나를 그 사람 밑으로 가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은 나의 인격과 인품을 높이 보며, 서로가 마음을 열고 친해지는 계기가 된다.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도 된다. 아무도 나이가 적다고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나이나 연차에 걸맞는 적절한 대우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오늘만 생각하지 말고 한 10년 또는 20년 뒤에 내가 나이와 연차가 높아졌는데, 막 들어온 어린 후배와 상호간 존칭을 쓴다고 하면 그때는 어떻겠는가?
나이 안에는 그 사람의 곡절 많은 인생이 있다.
나이를 대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