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초 캔버라에 머물고 있을 당시 나는 그곳 사람들이 역사적이라고 느끼고 있는 시간의 흐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좀처럼 어떤 공식적인 회합이나 행사를 열지 않는 그들도 간단하나마 기념 다과회를 열고 자축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보면 영국인들이 호주에 온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인 1988년은 그들에게 매우 각별한 의미가 있음이 분명했다.
영국인들이 호주라는 낯설고 물선 땅에 도착한 지가 그때로부터 어언 200년. 적지 않은 세월,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호주의 건국이라고 할 수 있는 1788년의 도착을 기념하는 200년제인 바이센테너리(Bicentenary)로 1988년 벽두부터 호주 전체를 축제의 분위기 속에 빠져들었다. 영국인들이 지금의 시드니 앞바다에 도착한 지 꼭 200년이 되는 날인 1988년 1월 26일은 그야말로 성대한 기념 축제가 벌어졌다. 호주 전역에 걸쳐 범 대륙적인 여러 행사가 벌어졌는데,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가장 많은 관심과 흥미를 끌었던 것은 200년 전 그들이 도착했을 때와 똑같이 재현된 ‘영국인들의 도착(The Coming of the British)’ 행사였다.
‘첫 함대 항해 재현(First Fleet Re-enactment Voyage).’ 200년 전 당시와 비슷한 모습의 범선 11척이 그들이 호주 대륙에 첫발을 내디뎠던 시드니 앞바다 쪽으로 들어오는 광경을 재현해 냈다. 아득한 과거의 상념을 일깨워주는 범선들이 푸른 파도를 헤치고 시드니만의 야외음악당 근처로 항진해 들어올 때 축제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하는 것 같았다. 영국의 찰스(Charles) 황태자와 다이애나(Diana) 부부가 영연방 최고의 축하사절로 참관을 하는 중에 수백 척의 요트와 통통배들이 그 범선의 군단을 뒤따라 잔잔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모습은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하늘에서는 수십 대의 비행기가 공중 축하 곡예비행을 펼쳐지기도 하고, 'Bicentenary'라는 큰 글자가 새겨진 비행선이 낮은 고도로 해안을 따라 축하 비행에 나서기도 했다.
우리와는 반대로 1월이 한여름인 호주, 건국 200주년 기념식이 열렸던 시드니 해변의 야외음악당 광장에는 시원한 바닷바람에 온갖 깃발들이 일제히 나부끼고 있었다. 무질서와도 같은 질서 속에서 거행된 기념행사는 잔잔한 박수 소리와 가벼운 탄성이 이어지면서 진행되었다.
‘역사는 승리한 자에 의해 쓰여진다’고 했던가. 이방인의 입장이던 나는 그 행사를 그저 그런대로 무심하게 바라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사의 당사자인 영국인들과 그리고 그들이 애버리지니스(Aborigines), 원주민이라고 부르는 그 땅의 본 주인들에게는 그 행사는 결코 그렇게 단순한 기념행사라고 할 수 없었다. 뺏은 자와 빼앗긴 자. 대륙을 발견해서 도착했다고 하는 사람들과 무자비한 무력에 의해 그들의 신성한 땅을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별다른 충돌 없이 함께 그런대로 서로를 인정하며 살아가고 있기는 하다. 이제는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 원주민들은 사실은 이미 잊히어진 지가 오래라 할 수 있다.
기념식이 벌어지고 있던 그나 야외음악당 근처에서는 이 행사에 반대하며 그들이 잃어버린 영토를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몇십 명의 원주민들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그들의 찻잔 속의 태풍과도 같은 몸부림은 신문 한구석에 보도된 격렬한 몸짓의 원주민 사진 한 장과 몇 줄의 캡션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서구인들의 신대륙 발견과 그들의 건국. 이런 근대의 역사를 과연 누가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역사는 되풀이되지만, 지나간 역사를 되돌이킬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를 원하는 대로 바로 잡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역사로부터 그것이 가르쳐주는 것을 배울 수가 있을 것이다.
한편 호주 건국을 기념하는 ‘오스트레일리아 날(Australia Day)’ 축제가 전국적으로 열리고 있었지만 호주 일각의 지식인들은 이 기회를 축제의 장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는 양심 있는 적잖은 호주국민들은 과거에 그들이 행한 죄악을 가슴속 깊이 뉘우치며 그들이 행한 잘못을 보다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점에 공감하고 있었다. 같은 사무실에 있던 직원 한 사람으로부터도 영국인들이 호주에 왔던 초창기 태즈메이니아(Tasmania)섬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모두 무참하게 살육한 데 대해 커다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솔질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성대했던 그들의 축제를 지나간 오욕의 역사에 대한 회개, 고해성사의 기회로 생각보다 크게 벌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호주의 존경받는 역사학자의 한사람이었던 매닝 클라크(Manning Clark) 교수는 호주 건국 200주년을 즈음해 시사주간지 타임에 쓴 기고문에서 이와 같은 그릇된 역사에 대한 반성을 매우 비장한 어조로 촉구하기도 했다. 그는 ‘지혜의 시작(The Beginning of Wisdom)'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먼저 ’위대한 범죄를 저지른 민족은 더욱 살아있는 생명의 숨결과 풍부한 문학을 만들어낼 수 있다(A people who committed a great evil are distinguished by a great pulse of life and the creation of rich literature)'는 점을 전제하며 그들이 행한 커다란 죄악이 무엇인지를 낱낱이 고백했다. 그는 그들의 앞을 가리고 있는 눈가리개를 벗어 던지고 그들이 행했던 과거의 잘못을 이제야말로 진실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국인들의 도래가 '세 가지의 커다란 죄악(three great evils)'의 시작이었다고 말하면서, 그 첫 번째의 죄악은 ‘현지의 원주민인 애버리지니스(Original inhabitants of the country, the Aborigines)’에게 행해진 폭력이었고, 두 번째는 ‘첫 번째 유럽인 노동자였던 죄수들에게 행해졌던 폭력(the first European labor force in Australia, the convicts)’였으며, 마지막 세 번째 죄악은 ‘그들의 국토 자신에게 행한 폭력((the violence done to the land itself)’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또 이 커다란 죄악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이를 외면하는 사람들은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또 다른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라는 통렬한 지적을 서슴지 않았다.
한편 호주 건국 200주년 행사를 주관한 ‘The Australian Bicentennial Authority’의 요청에 따라 저술된 『The Penguin Bicentennial History of Australia』라는 책에서 역시 호주의 유명한 역사학자의 한사람인 존 멀로니(John Molony)는 ‘오래된 민족과 그들의 귀중한 문명의 실질적인 파괴(the virtual destruction of an ancient people and their precious civilization)’라고 할 수 있는 종족 간의 갈등에 눈을 감을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 호주의 원주민들에 대해 행해진 잘못만이 아니라 백호주의(White Australia)를 추구하던 과정에서 중국인들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빗어졌던 중국인 학살과 같은 또 다른 ‘커다란 잘못들(the grave mistakes)'이 과거라는 역사가 있기에 이를 인식하고 또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사실 호주에 제일 먼저 도착했던 서양 사람은 네덜란드의 아벨 태스만(Abel Tasman)이라는 선장이었다. 1642년 이곳에 왔던 그는 이 섬을 탐사한 뒤 이 섬의 이름을 뉴 홀란드(New Holland)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0여 년 뒤인 1770년 이 섬의 남동해안에 도착한 영국의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은 이 섬을 영국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독립전쟁에서 패배한 영국이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이곳 호주, 그들이 ‘뉴 사우스 웨일즈(New South Wales)'라고 이름 붙인 그곳이었다.
500마리의 각종 동물과 함께 1788년 1월 26일 시드니의 앞바다, 지금의 ‘시드니 코브(Sydney Cove)’라는 곳에 252일 만의 긴 항해 끝에 발을 디딘 호주의 선조들은 잘 알려진 것처럼 영국 본토로부터 추방된 죄수들이었다. 두 척의 영국 해군 범선이 이끄는 9척의 상선에 나누어 탄 736명의 죄수들이 곧 그들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호주에 사는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그들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의 선조가 죄수들이었다는 보다 더 쓰라린 상흔, 묻히어진 과거의 기억은 물론 그들에게는 매닝 클라크 교수가 회개하는 또 다른 가슴 아픈 상처들이 너무도 크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200주년 기념의 해를 맞이하여 용감하게 그들의 진실의 과거를 직시하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렇게 믿고 싶다. 그들은 지혜의 시작과 함께 진실을 찾고 보다 밝고 올바른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존 멀로니 교수는 그의 책 종장 에필로그에서 파란 많은 자신의 역사를 뒤돌아보며 남긴 다윗(David)의 말을 들어 그의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 역사 속에는 많은 어둠이 있었지만,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빛을 향한 그들의 투쟁이었다(In that history there was much darkness but to him what mattered was their struggle towards the light)'라고. (198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