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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우 Jun 22. 2023

[순우여행노트 19] 베트남 인상

-우리와 닮은 베트남 사람들

.  상하의 나라 베트남. 푸른 하늘 흰 모래사장을 따라 기다란 잎 새를 드넓게 펼친 시원스러운 모습의 야자수, 잠자리 날개와도 같은 아오자이를 입고 삼각 밀짚모자를 쓴 가녀린 몸매의 여인, 어두컴컴한 정글의 숲... 베트남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머나먼 남쪽 나라‘의 이국적인 것이었다. 그간 많은 외국의 정경을 접하기도 했지만 내가 평소에 가장 이국적이라고 느끼고 있던 것을 가만 되짚어 보면 베트남, 월남의 것이 아니었던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가장 감수성이 많고 호기심이 컸던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나라가 바로 베트남인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야자수가 있는 베트남 풍경(다낭 노루옥해변 자료: 네이버 블로그)

  1960년대 중후반 내 또래의 아이들이 한창 중학교에 다닐 무렵 내가 다니고 있던 학교의 학생들은 가끔 기차역으로 동원되어 태극기를 흔드는 일로 오후나 오전 한나절의 수업을 대신하고는 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는 우리의 장병들이 우선은 부산을 향해 출발하는 군용열차를 타고 장도를 출발하는 곳이 바로 우리의 학교가 있던 도시 춘천에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로부터 2km쯤의 거리에 춘천역이 있었다. 걸어서 30여 분, 그곳에는 용사들을 태울 군용열차가 모든 선로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상기된 모습으로 기차역을 떠났던 병사들은 부산을 거쳐 큰 배에 실린 뒤 몇 달 후가 되면 지금의 남쪽 베트남에 이를 수 있었다. 월남에 도착한 뒤 지루하게 계속된 베트남전쟁에 투입되었던 우리의 장병들은 때로는 눈부신 승전보를 전해주기도, 때로는 그곳의 이국적인 소식들을 우리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그때는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로 시작되는 유행가가 인기를 끌었고 월남 여인들의 아오자이를 본뜬 ‘월남치마’라는 것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 정글을 헤집으며 용맹을 떨치는 우리 장병들의 용감하고 자랑스러운 모습이 화보에 큼지막하게 실리기도 하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보여주는 대한뉴스에는 월남으로부터의 소식이 빠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월남에서 보내온 사진을 보면 푸른 파도와 흰 모래, 싱그러운 야자수가 줄 지어선 해안의 모습은 전쟁의 포화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듯이 평화스러운 정경으로 남국의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겨주기도 했다. 신문에 보도되는 사진은 폭격으로 파괴되어 검은 연기를 내며 불타고 있는 황폐된 마을의 모습이 담겨있기도 했다.

아오자이를 입고 논 라를 쓴 여인(자료: 네이버 블로그)

  우리와 같은 어린 학생들에게는 멀게만 느껴졌던 나라 베트남. 그러나 누군가를 통해서나마 돌아온 ‘역전의 용사’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는 마치 내가 그 전투에 참여해서 싸우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 나라가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대학을 다니는 동안의 어느 해인가 월남의 패망 소식이 전해졌다. 이후 베트남은 나의 기억으로부터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그러나 나의 학창시절 내가 새겨두었던 먼 이국의 나라 베트남에 대한 강렬한 인상만큼은 나의 기억 어딘가에 깊숙이 남겨져 있었던 것 같다.


  공산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월맹에 의해 1975년 통일된 베트남은 그로부터 10여 년 뒤 그들의 문호를 서방세계에도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때 그들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우리에 대해서 그들은 좀처럼 문을 열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와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한 것은 그들 방식의 개방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도이 모이(Doi Moi)'를 채택하고 나서도 6년이 흐른 뒤인 1992년이었다.


  우리나라와 베트남과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재개된 지 4년이 지난 1996년 나는 처음으로 베트남 땅을 밟았다. 이때 받은 베트남에 대한 인상은 꽤 오래전 학창시절 내가 머릿속에 넣어 두었던 나의 아련한 기억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다. 밝은 태양의 빛을 받아 화사한 해변의 모습을 곧바로 발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단박 눈에 띄는 삼각 밀짚모자 ’논 라(Non La)와 눈부신 흰색 ‘아오 자이(Ao Dai)’, 몸집은 작고 여려 보이지만 강단과 끈기가 있어 보이는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 따위는 내가 학창시절 나의 머릿속에 그려두었던 그들에 대한 인상 그대로였다고 할 수 있었다.


  교통량이 별로 없는 한적한 도로를 달리며 바라보는 푸른 들녘의 모습이 내 생각보다는 더 한가해 보이기도 했다. 달리 바쁘지 않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조용하고 그 표정은 한결같이 무표정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 정경은 내가 오래전부터 내 머리에서 어렴풋이 그리고 있던 이국적인 나라 베트남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아득한 나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 베트남에 대한 기억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은 몸집의 사람들의 모습으로부터 나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양사람들에 비해서 다소 작게 느껴지는 우리 자신의 체구보다도 더 작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몸집이 작고 날씬한 만큼 그들의 몸놀림 또한 매우 기민하고 유연하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또 그들은 말수가 적은 데다가 말하는 소리도 또한 조용한 듯 보였다. 어찌 보면 소곤거림에 가까울 정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은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때로는 서로 간에 재잘거리는 말소리가 무척 빠르게도 느껴졌지만 대체로 그들의 말소리는 무척이나 작고 조심스러워보였다.

논농사 일을 하는 풍경(자료: 네이버 블로그)

   이처럼 처음으로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느껴진 것은 바로 그들의 말소리가 작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들의 말소리가 작은 것은 보통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집의 형태와 관련이 크다고 했다. 대체로 대나무를 쪼개거나 얇은 나무판자 따위로 지은 집에서 대가족의 여러 사람이 함께 살고 있기에 서로 간의 말소리를 작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그들이 소곤거리듯이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들의 언어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했다.

 

  그들의 말소리가 보통은 작기도 하지만 조근조근 그렇게 빠르지 않은 속도로 들리는 것은 그들의 말이 여섯 개의 독특한 억양을 가지는 이른바 6성(六聲)의 억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어의 4성(四聲)보다도 한결 더 까다롭고 미묘한 어감을 대화 상대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큰 목소리보다는 작은 소리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말소리가 작은 이유는 아마도 다른데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오랜 피식민 지배와 게릴라전이라는 매우 독특한 형태로 치러진 베트남전쟁의 큰 시련을 거치며 그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크게 높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항상 그들이 싸워 이겨야만 하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만의 내밀한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도록 낮은 소리로 조심스레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외압으로부터의 오랜 시련, 이념 갈등과 내전으로부터 빚어진 동족상잔의 처참한 비극은 그들의 얼굴 모습마저 어둡게 바꿔놓은 것 같았다. 외국인에게는 좀처럼 친절해 보이지 않아 보이는 애매모호한 듯한 태도, 호기심을 느끼는 것도 같지만 무엇인가를 애써 피하는 듯한 표정,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같지만 왠지 어떤 거리감이 느껴지는 듯한 기분. 그들이 나를 대하는 느낌, 내가 그들로부터 느끼는 기분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이렇듯 그들은 역시 우리와는 많이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었고 무엇인가 우리와는 많이 다른 모습의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사회 속에서 하루하루를 생활하면서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겉모습이 우리와는 적지 않게 다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서로가 닮아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들과 우리가 여러 면에서 닮아있다고 느껴지는 것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은 아마도 그들 생계의 기본이 되는 삶의 수단이 과거 우리와 같이 논농사를 주로 하는 수도작(水稻作) 농업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수천 년 그들의 역사도 우리와 같은 농경사회 속에서 이루어져 나왔으며, 특히나 그들도 우리와 같이 쌀농사에 크게 의존하는 경작과 생활의 방식을 오랫동안 유지해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남북한을 모두 합친 인구와 비슷한 숫자의 사람들이 베트남에서 살고 있다. 논농사에 크게 의존하는 베트남은 2모작이라는 우리보다 유리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어서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 중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우리는 쌀의 생산 과잉으로 고민을 겪고 있기도 하지만, 베트남이 벼를 그들 농업생산의 주 작목으로 가장 많이 재배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와 베트남이 서로 크게 닮아있는 점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논농사를 많이 지으면서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1960, 70년대와 같아서 우리의 시계를 2, 30년쯤 뒤로 돌려놓은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중남부의 일부 정글 지대와 북서부의 그리 많지 않은 산간지역을 제외하고 남북으로 펼쳐진 베트남의 긴 국토는 한없이 길고 넓게 펼쳐진 들판이라고 할 수 있다. 풍부한 햇빛과 강우에 힘입어 한 해에 두 번씩의 벼농사를 힘들이지 않고 지을 수가 있다. 그들의 모든 생활은 과거 우리와 못지않게 쌀을 떼어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을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우리가 그랬듯이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벼농사를 지으며 농촌에 살고 있다. 쌀은 그들의 주된 생계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식이 되고 있다. 땅은 그들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제 더는 가축의 힘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지 않지만, 그들은 아직도 농사일의 많은 부분을 소의 도움을 받아서 해나간다. 과거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집에 한두 마리씩의 소를 기르기도 하고 또 돼지를 사육하기도 한다. 아직 비육우나 식육용 돼지를 대규모로 사육하는 곳은 발견할 수 없다.

 

  쉬운 예로 베트남의 식당에 가서는 되도록 쇠고기를 주문해서는 안 된다는 말들을 한다. 잡혀서 상에 오르는 소고기가 비육우가 아니라 모두 나이 먹은 일소들이어서 육질이 매우 질기기 때문이다. 그 대신 돼지고기를 시키면 훨씬 고기 맛이 좋다고 했다. 대량으로 사육되는 돼지의 고기가 아니라 농가에서 한두 마리씩 키우는 집돼지의 고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랬다. 비육돈과 달리 비계가 적은 돼지고기는 쫄깃하고도 참으로 맛이 좋았다.


  땅에서 자라는 작물을 키워서 먹고사는 사람들 누구나가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자연의 순리와 섭리에 언제나 순응하는 듯 편안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 물질적으로는 결코 풍족하지는 못하겠지만 현실에 만족하면서 사는듯한 항상 소박하고 검소한 그들의 모습. 그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1997.10)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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