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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우 Jul 20. 2023

[순우여행노트 23] 호찌민 아저씨(2)

베트남 인상

  호찌민은 그의 사후 6년 후인 1975년에 이루어진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지만, 생전에 여러 차례 인도차이나전쟁 중에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의 희생을 항상 가슴 아파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이른바 공산주의 혁명을 이룰 수도 있었는데, 지나치게 과격한 수단을 동원해서 민족 간에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었다.


  그런 연유에서 1992년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베트남을 방문했던 한국의 어느 고위 인사에게 베트남 공산당의 ‘도 무오이(Do Muoi)’서기장은 호찌민 주석의 평소 회한을 거울삼아 한국이 통일되는 과정에서는 그와 같은 극단적인 어느 한쪽의 희생이나 참극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간곡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호찌민은 1917년 프랑스에서의 생활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를 떠돌며 독립 구국 항쟁을 계속했지만, 베트남은 1945년 일본군이 철수한 뒤 위도 18도 선으로 그들의 영토를 나뉘어 남측의 월남과 북측의 월맹이 대립하면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되었다. 우수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1946년의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은 1954년 베트남 역사에 있어서 또 하나의 큰 획을 그었다. 즉 ‘디엔 피엔 푸(Dien Bien Phu)’전투에서 공산 월맹 ‘베트민(Viet Min)’이 승리하면서 베트남은 다시금 국토가 위도 17도 선으로 새롭게 양분되었다.

인도차이나1차전쟁도(1954년)(자료: Wikipedia)

  한편 디엔 비엔 푸 전투 이후 ‘제네바협정’이 체결되면서 프랑스군이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베트남 양측은 2년 뒤인 1956년 남북한 자유 총선거를 치른다는 내용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유 총선거에서 공산 북베트남의 우세가 점쳐지자 이를 남측이 거부함에 따라 남북총선거가 무산되면서 그 이후 무려 20년 동안이나 계속된 제2의 인도차이나전쟁이 총선거를 치르기로 한 1956년에 다시 시작되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이 전쟁에 미국이 실질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은 전쟁이 발발한 지 7년이 지난 1963년의 일이었다. 호찌민의 베트민은 남측 베트남과의 꾸준한 협상을 이어 나왔다. 하지만 공산 베트민이 자유 월남을 능가하기 시작하자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이 제네바협정 6년 뒤인 1960년부터 베트남의 남북 간 내전에 개입하게 되었다. 그 결과 호찌민의 월맹은 미국이 주된 상대가 되는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인 베트남전쟁을 본격적으로 치르게 되었다.


  베트남의 통일은 1973년 미군이 베트남으로터 철수하고 나서 2년 뒤인 1975년 호찌민이 이끄는 공산 베트민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전쟁에 미군이 참전하는 동안 우리도 자유 베트남 측을 지원하는 미군과 월남군의 편을 들어 이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와 통일 베트남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짐에 따라 과거 아주 가까운 맹방의 관계에 있었던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는 소원해지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빗어지고 있다. 또 우리는 베트남이 그간 성공적으로 실시해온 대외개방과 자유 시장경제 발전의 경험을 북한이 어서 빨리 배웠으면 하는 기대와 함께, 베트남이 이를 북한 측에도 적극적으로 권고해 주기를 바라는 역설적인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여하튼 호찌민은 베트남 동족 간 이념 상쟁의 과정에서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지 못한 데 대한 후회와 함께 다른 두 가지의 부족했던 점들을 시인했다고 한다. 그 첫 번째는 그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생전에 너무 많은 담배를 피웠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가 결혼했다면 그의 조국과 국민을 향한 초지(初志)의 마음이 그의 가족이라는 새로운 변수에 의하여 저지 않게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가 지금도 모든 국민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호 아저씨’라는 애칭은 받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대단한 애연가였다는 것은 지금의 시대 상황과는 잘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그 누구보다도 많은 고뇌와 번민의 나날을 보냈을 그의 삶을 되돌아볼 때 그것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개인의 낙이요, 어렵고 힘든 순간의 도피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의 좌파 잡지 Osawatomie 표지(1975년) "미국인 침략자는 패할 것이고 베트남을 더 아름답게 재건하겠다"는 호찌민의 유언 시가 적혀있다.(자료: Wikipedia)


  1969년 80세를 일기로 호찌민이 숨을 거둔 날 이후 며칠간 무척이나 많은 비가 내렸다는 것을 당시를 살았던 베트남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비가 한결같이 불과 6년 후에 맞이할 수 있었던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죽어간 호찌민의 여한이 어린 그의 애달픈 혼령을 달래는 비였다고들 말하고 있다.


  호찌민은 그가 죽으면 그를 화장해서 조국의 산하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살아 생전 호찌민의 가르침을 따랐던 베트남의 국민은 그의 유언을 듣지 않았다. 호찌민은 그의 유언과는 달리 지금 하노이시의 가장 중심부에 자리한 광장 한가운데 위엄 있게 세워져 있는 그의 능묘에 안치되어 그곳을 찾는 이는 누구나 그를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전국 각지에서 매일 끊이지 않고 몰려드는 인파로 항상 그 묘소의 입구에는 차례를 기다리며 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누구의 삶이든 그것이 한가지의 잘못도 없이 무결하고 위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호찌민이라는 한 사람의 인간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시대를 통틀어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게 자리하면서 가깝게 사랑받는 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지도자란 어떤 것인지, 적어도 한 시대를 초월해서 그와 같이 추앙받을 수 있는 인간의 참된 모습은 과연 무엇인지 하는 생각도 가져보게 된다. (200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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