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도, 내적으로도.
9급 지방 공시가 152일 남았다. 1회독한 과목이 단 한 과목도 없다. 그래도 마음이 조급하지 않은 건 안 되면 다시 시험을 치면 된다는 부모님의 다정함 때문인지, 사실은 몹시 불안해서 도리어 안 그런 척하려는 내 방어기제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지금 생각과 감정을 정리할 필요성은 강하게 느껴서, 혼자 카페에 왔다. 내게 집은 사랑과 보살핌의 공간이지만 그렇기에 스스로 뭔가를 해나갈 의지가 쉽게도 꺾이는 곳이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아닌 상태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소개하고 정의할 ‘타이틀’이 없다는 말이다. 내가 쓸모없는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존재 차원의 가치를 믿지 않았다면 애초에 나는 이런 글도 쓰고 있지 않을 거다. 자아의 밑바닥에는 아무런 수식어도 없는 ‘나 자신’이 존재하고 나는 가끔 그 자아의 차원으로 내려가 지금 내 삶을 관찰하는 시간을 가진다. 가장 밑바닥의 나, 원초적이고 본질적이지만 살면서 경험하고 배운 것이 있어 본능대로 살아가는 동물과는 다른 내가 존재한다. 그런 나는 인생의 분기마다 이번에는 어떤 ‘타이틀’을 골라 원초적인 자아에 새로운 층을 쌓을지 고민한다.
20대 후반인 나는 더는 이전에 기쁨과 행복이라 생각했던 활동들이 즐겁지 않음을 느낀다. 게임, 소설, 영화 같은 것에 깊이 빠져 한 작품을 몇 년씩 좋아하며 작품의 세세한 설정을 찾아 정리하고, 관련된 글을 쓰며 그걸로 소소한 수익을 만드는 건 20대 초반부터 내 삶의 원동력이자 기쁨이었다. 대학생 때는 공부를 하며, 갓 졸업하고는 학원에서 가벼운 사회생활을 맛보며 남는 시간에 무언가를 보고 읽고 쓰는 게 무척 행복했다. 한 가지를 깊이 파고들어 이해하고 탐구하려는 성향, 그것을 내 방식대로 소화해 글로 써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공감과 찬사를 받는 일에 희열을 느꼈다. 이것만 하고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대학생’, 혹은 ‘학원강사’라는 타이틀이 있었기에 가능한 행복이었다.
지금의 나는 타이틀이 없다. 사회적인 신분만 말하는 게 아니다. 학생, 직장인이니 하는 사회적인 타이틀이 없어도 내적으로 자기를 정의 할 수 있다면 이처럼 무기력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나는 사회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백수지만, 내 삶의 향방을 결정하기 위한 다양한 경험을 해보려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내가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게 되면 내가 어떤 사회적 타이틀을 갖고 싶은지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 이런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지금의 나처럼 무력하고 쓸쓸하지 않을 거다. 그의 내적 정의는 ‘스스로를 더 잘 알기 위해 짧은 시간이라도 경제활동을 하는 나’일 것이고, ‘학생 신분을 벗어났다면 자기가 쓸 돈 정도는 자기가 벌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을 어느 정도 따르면서도 스스로를 알아간다는 내적 욕구도 충족시키고 있는 셈이니까.
하지만 나는 말했다시피 아무것도 아닌 상태다. 대학에서 배운 것과 어릴 때부터 해온 글쓰기로 내가 쓸 돈은 벌고 있지만, 이는 위의 예시처럼 ‘타이틀’을 찾기 위한 활동은 아니다. 그냥 이 정도 사회적 통념도 따르지 못하면 나 자신이 정말 쓸모없게 느껴질 것 같아서 하는 게 크다. 외국어와 글쓰기는 내 아주 오랜 관심사였으니 좋아서 하는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한때는 정말 사랑했던 이 활동의 가치를 깎아내리게 된 것은 이제 ‘내가 좋아하는 활동’만 하면서는 스스로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하게 된 나이이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분명 취직을 하고 부모로부터 정신적, 혹은 물리적으로 독립해 사회에 1인분을 해야 하는 나이다. 알고 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사회적 타이틀은 당연히 ‘취준생’, 혹은 ‘공시생’이다. 실제로 나는 올 6월에 지방공무원 시험을 보기로 했고, 수험서가 책장 한 칸을 빼곡히 메우고 있다. 공부도 하고는 있다. 하지만 나는 옛날부터 그랬듯 여전히 ‘~준비생’이라는 말이 싫은 모양이다. 한 인간이 현대 사회에서 자아를 유지하려면 사회적 정의와 내적 정의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함을 이제 알고 있고 인정할 수밖에 없음에도,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하고 정의하기가 싫은 이유는 뭘까. 아마 에리히 프롬 책을 곡해해서 그렇겠지만.
하지만 ‘~준비생’ 타이틀에 대한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정말로 예전에 행복이라 생각했던 활동이 예전만큼 즐겁지 않고, 이는 사회적으로도 내적으로도 타이틀 없이 밑바닥의 자아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스스로를 깨달았기 때문이므로, 나는 목표 타이틀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적은 돈이나마 벌고 공시 공부를 하는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즉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닌데도 내가 무력했던 이유는 그 모든 것이 사회적 압력에 굴복하는 측면이 강했으며 그 활동에 대한 내적 당위성과 확신이 한참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유를 찾아 써 내려가면 된다. 이유는 확신을 강화해줄 것이고, 나는 사회적 압력에 굴복하고 그 기준에 맞추려 아등바등 노력하기에는 게으른 데다가 아버지의 이상적인 반골 기질을 매우 많이 닮았기에, ‘공시생’이라 불리는 걸 싫어해도 공시 준비를 하기로 한 내 선택에는 사회적 압력만이 작용했을 리 없다. 그것은 내 온실 속 화초 같지만 수동적이지만은 않은 자아의 판단도 작용한 결과다.
나를 둘러싼 세상과 사회에 작용하는 거대한 이념과 논리에 의문을 품고 사회적 기준에 맞춰 살지 않아도 한없는 우울을 헤매지 않는 자아를 만들어 낸 것은 부모님이다. 이 각박한 한국 사회에서 그 온실을 마련해 화초를 가꾸는 사랑이란, 집단주의 사고가 강하며 역사적 격변을 거쳐온 부모님 세대가 쉽게 줄 수 없는 사랑임을 안다. 나는 내가 온실 속에서 길러진 화초임을 아는 화초이고, 아늑한 온실 속에서 바깥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탐구할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이런 글을 쓸 수 있음도 안다. 하지만 나는 결국 화초이기에 온실이 없으면 죽어버릴 미약한 존재라는 것도 안다. 최근 몇 달은 부모님에게서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나를 놀랍도록 깨닫는 시간이었기에 나는 그토록 무력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이다. 내 친구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내가 아마 먼 미래일 그때를 상상하며 친구들보다 더 몸서리치는 것은 내게 타이틀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인 타이틀이. 거기다 지금의 나는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잊어버린, 내적 정의도 공백인 상태이므로 더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늘 온실 속에 있었지만 지금처럼 아무것도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사회적으로 나는 공시생이다. 내적으로 나는 좀 더 좋은 세상이 될 수는 없는지, 그러기 위해 믿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는지 알고 싶은 사람이다. 이런 내적 정의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사회적인 기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내 스펙을 깨닫고 내가 정말로 쓸모없는 사람인지 고민하며 내렸던 것인데, 이제야 다시 생각이 났다. 1년 전에 정한, 타이틀과 상관없는 내 존재 이유와 삶의 목표는 여전히 그러한데도 요 몇 달 그것을 까맣게 잊었던 것 같다. 스스로가 삶의 이유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무력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예전에 행복이라 믿었던 활동들만을 고집하며 이제 나이를 먹고 현실을 조금 볼 줄 알게 된 나 자신을 부정하느라 그랬던 모양이다. 나는 여전히 외국어 공부와 글쓰기가 재밌지만 이제 그것만으로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는 시절은 지났다. 내게는 타이틀이 필요하다. 나의 내적 정의와 목표는 변함이 없지만 그것을 유지하고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나를 소개할 표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사회적 타이틀을 따기 위해 시험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따뜻한 온실을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일 테다. 명확하다.
이렇게 글로 생각을 정리하고서도 수험생활이 싫을 나를 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상태는 더 싫고, 왜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싫으며, 이전의 즐거움이 더는 즐겁지 않은 이유를 정리했으니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는 조금 나을 것이다. 종종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기를 남겨야겠다. 그럼으로써 결국 사회적 타이틀이 없어도 인간은 결코 ‘아무것도 아닐 수 없음’을 보여주고도 싶어서. 사회적 기준에 내면을 맞추기보다는 내면을 가꾸기 위해 사회적 자원을 이용하고 싶다. 그렇게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