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이야기 2화.

먼저 다가 온 여자

by 현동인

29살이었던 나는 형님의 125cc 오토바이를 타고 신앙심이 돈독한 가톨릭 신자가

운영하고 있는 한 양로원을 자주 방문하였다.

그곳은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았거나 아님 노숙을 해야 할 정도로 오갈 데가 없는 분들만 있는 양로원이다. 내가 점찍어놓은 "수미"라는 이름의 25살 자원봉사자가 그 양로원에 기거하면서 할머니들을 돌보고 있었다. 맏며느리감 같은 풍채에 사슴처럼 큰 눈망울의 "수미"를 처음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사람은 상대적이다. 체구가 왜소하면서 눈이 작아 별명이 단추구멍이었던 나는 눈이 크면서 체형이 좀 통통한 여자들을 좋아했는데"수미"는 내가 좋아하는 요건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나만 여자를 좋아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를 내 듯이 상대편 여자도 나에게 호감이 있어야 연애의 역사는 시작되기 마련이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다면 작업부터 걸어야 한다.
짝사랑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것은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만 바라는 것이 될 테니까 말이다. 일단, 여자와 친해지려면 자주 눈도장을 찍으면서 그녀가 못하는 일들을 해 주는 게 좋다.
예컨대, 여자들이 하기 어려운 전기나 집수리 같은 것들은 주로 남자들의 몫인데 양로원을 방문할 때마다 그런 일들이 생기면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척척 해결해 주었다.

특히 전기 같은 경우는 예전에 전자회사를 다녔던 경험으로 조금 다룰 줄 알았던 나였기에 형광등을 옮겨 단다거나 세탁기가 갑자기 작동을 하지 않으면 고장 난 원인을 찾아내어 능숙하게 고쳐주곤 하였다. 나의 맥가이버 같은 능력을 "수미"앞에서 유감없이 발휘하자 그런 나를 보고는 수미는 굉장히 신기해하였다.
여자들이 남자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자신이 못하는 일들을 남자가 해결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수미와 나는 차츰 친해졌고 농담도 자주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제 그녀와 개인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면 나의 "카사노바"기질을 최대한 발휘해서 수미를 내 여자로 만들 것이다.
그럼, 어머님께서 그토록 바라시던 눈 크고 키도 큰 셋째 며느리를 맞게 되시겠지.

그러나 인생은 절대로 나의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이곳 양로원에는 수미를 포함해서 여러 명의 여성봉사자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녀들과도 허물없이 지냈다. 그중에서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민혜"라는 여자가 있었지만 수미에게 필이 꽂혀 있었던 나는 다른 여자들은 안중에도 없었기에 민혜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양로원에 오면 나는 항상 수미를 찾았고 또 그녀와 함께 힘든 이불빨래를 하거나 양로원 청소등을 하면서 그녀에게 작업을 걸었는데"민혜"는 나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민혜가 내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다.


형제님!!~~~ 저 오토바이 한번 태워주실래요?

민혜의 뜻밖의 말을 듣고 내가 잠시 어리둥절하고 있자 그녀는 재차 내게 오토바이를 태워 줄 것을 요청하였다. 수미가 내게 이런 요청을 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냐마는 그렇다고 민혜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오토바이를 태워달라고 요청하는데 내가 거절한다면 그녀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하겠는가?

2월 중순의 아직은 쌀쌀한 날씨, 나는 민혜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한산한 태능길을 내 달렸다.
125cc 오토바이 엔진에서 터져 나오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귓가를 스치는 찬 바람은 나는 물론이거니와 오토바이 뒤에 탄 민혜를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앞니와 어금니가 딱딱 소리를 내면서 위아래로 요동을 쳐 댔다.

아니? 이렇게 추운데 왜 민혜는 내게 오토바이를 태워달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민혜의 마음을 알지 못했었기에 그저 호기심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싶은 줄로만 알았다. 보통 친하지 않으면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자동차도 아닌 위험한 오토바이를 태워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민혜와 나는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여자가 먼저 내게 다가온 것이었다.

민혜는 많이 추운지 내 등에 얼굴을 파묻고 내 허리를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졸지에 나와 민혜는 서로 사랑하는 애인처럼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둘 다 동태가 되겠다 싶어서 불암산 기슭에 있는 풍광 좋은 카페 앞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언 몸들을 녹이기 위해 민혜를 데리고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페 안은 마치 서부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식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마차 바퀴가 벽에 걸려있었고 창문에는 카우보이 모자를 쓴 인형들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장작이 활활 타 오르고 있는 난로 옆에 자리를 잡고 민혜와 마주 앉자 한창 얼어 있었던 그녀의 볼은 따뜻한 난로 온기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민혜는 키가 좀 자그마한 아가씨이지만 부잣집 귀한 외동딸로 태어나서 고생이라곤 전혀 하지 않은 여자다.
세상의 때가 거의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을 갖고 있는 여자였다.

그런 민혜가 왜 오갈 데 없는 할머니들만 있는 양로원에서 온갖 궂은 일들을 하면서 여기에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독실한 신앙심을 가졌던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곳 양로원의 생활은 그녀에게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음식 솜씨도 좋지 않았거니와 청소 빨래 바느질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었기에 할머니들로부터 핀잔만 받기 일쑤였다.

게다가 성격이 좀 내성적이었던 민혜는 같이 있는 다른 봉사자들과도 친하게 지내지도 못하였다.
그런 것들이 스트레스가 되어 차곡차곡 쌓이면서 민혜는 적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이상과 현실은 냉혹하리만큼 달랐던 것이다.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할머니들에게 봉사를 했었지만 아무런 대가 없이 힘들게 일해도 주위로부터 좋은 소리 한마디조차 듣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서글펐단다.

나는 민혜의 푸념을 듣자 위로의 말을 건넸다.

민혜 씨!~~ 사람은 말이죠 다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마다 얼굴 다르고 성격 다르듯이 타고난 재능도 제각각 다르지요.
민혜 씨가 잘하는 숨겨진 재능이 있을 겁니다 단지 그 재능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뿐이겠지요.

나의 말을 듣자 민혜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럴까요? 저는 이제껏 여자로서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는 것 같았어요. 저의 집은 가정부가 있어서 그분이 음식이든, 빨래든 집안청소등 모든 것을 다 해주어서 저는 이제껏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왔어요. 그러다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주일 미사만 드리면서 성당에 다녔는데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께서"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구절이 너무 마음에 와닿아서 이곳 양로원에 자원봉사자로 왔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은 미처 몰랐어요.

아무래도 이곳은 제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만간 집으로 돌아가려고 해요.
그나마 형제님께서 위로를 해 주시니 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형제님은 마음이 참 따뜻한 남자 같아요.


민혜는 그렇게 말하며 내얼굴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곧 집으로 돌아갈 것이란 민혜의 말을 듣고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민혜에게는 전혀 마음이 없었기에 내 앞으로 다가온 그녀를 붙잡지도 않았다.
내가 손만 내밀면 언제든지 그녀 또한 내 손을 잡을 것 같았지만 이미 내 마음속에는
"수미"라는 여자가 차지하고 있었으니 민혜가 들어올 틈이 없었다. 이런 것들이 내가 늦게까지 결혼을 하지 못했던 이유인 것 같다.

세상에는 1등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2등도 있고 3등도 있게 마련인데 최선책은 "수미"라는 여자였지만 차선책으로 "민혜"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 있다.
민혜와 만난 지 며칠 뒤, 그녀는 결국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수미에게 전화로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수미가 할머니들 앞에서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하라는 말을 듣고는 그만 멘붕에 빠졌다.

그전에도 몇 명의 여자들에게 퇴짜를 맞았던 나로서는 할머니들 앞에서 수미가 나를 퇴짜 놓을 것이라 지레 겁을 먹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용기 있게 꽃다발 하나 들고 그녀의 요청대로 용감하게 할머니들 앞에서 당당하게 데이트 신청을 했더라면 수미와 나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을 텐데 나는 그만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나는 결국 양로원에 가지 않았고 수미도 얼마 후에 양로원을 나오는 바람에 나와의 인연은 끊어지고 말았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그 타이밍을 놓친 후에 다시 잡으려는 것은 결국 기회의 신"카이로스"의 뒷 통수를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