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이야기 28화

밤안갯속의 데이트

by 현동인

여자는 자기 이름이 진희라고 소개하였다.

첫인상이 매우 좋았던 것처럼 다행히 진희는 매너 좋고 마음씨도 착한 여자였다. 그녀가 매너 좋다는 것은 두 번째로 만나서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껏 데이트하면서 여자가 돈 쓴 적을 별로 본 적이 없었는데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내가 식사비를 지불하려는 것을 한사코 말리면서 자기가 기어이 지불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데이트비용을 여자들도 분담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와 만나면 모든 데이트 비용은 남자들이 대부분 쓰던 때였다.

그러나 진희는 내가 한번 저녁이나 술을 사면 다음에는 꼭 자기가 데이트비용을 지불했다.
이제껏 많은 여자들을 만났었지만 그런 여자는 진희가 처음이었다. 그녀는 내가 자기보다 키가 작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캐주얼한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진희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정말 천사 같은 아가씨였다.


진희는 내가 돈을 많이 쓰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비싼 저녁을 사 주려고 하면 싸고 맛있는 음식점을 자기가 알고 있으니 내 손을 잡아끌고 그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진희와 만날 때는 별 부담 없이 그녀와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진희는 술은 좀 마실줄 알지만 내가 싫어하는 담배는 전혀 피우지 않는 여자였다. 미인이면서도 마음씨가 이렇게도 착하니 이런 여자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희를 만날수록 나는 그녀의 매력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급격하게 가까이 다가서면 진희가 부담을 느낄 것 같아서 일부러 조금 거리를 두었다.
왜냐면 그녀는 이미 애인이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진희와 데이트를 하고 있을 때 남자로부터 전화가 왔었는데 아마도 그녀의 애인 같았다. 남자는 진희에게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친구를 만나고 있다고 둘러댔지만 그들 사이의 대화가 살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애인이 있는 여자가 나를 만나러 나왔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문제가 어떤 것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이유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다.

애인이 있는 여자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일명 개구리전법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개구리란 동물은 신경세포가 조금 특이해서 처음부터 뜨거운 물에 빠뜨리면 화들짝 놀라서 뛰쳐나오지만 찬물에 넣고 약한 불로 서서히 물을 데우면 뜨거움을 감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익혀 죽는다는 동물이다. 진희 또한 처음부터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서면 개구리처럼 놀라서 도망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감지하지 못하도록 그저 내가 좋은 남자라는 가면을 쓰고 조금씩 다가갔다.

진희의 생일날 나는 거금을 들여서 그녀가 근무하는 회사에 축하편지와 함께 꽃다발 배달을 보냈는데 아마도 그녀의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 한 바탕 난리가 났었던 것 같았다. 지금은 그런 이벤트가 당연하지만 남자가 여자의 생일에 꽃다발 배달을 보내는 경우는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진희가 강아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이웃집 아줌마에게 새끼 푸들을 한 마리 사서 그녀에게 선물까지 하였다.

나의 선물공세에 어쩔 줄 몰라했던 진희도 나를 거부하지 못하고 점점 더 나와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어느덧, 진희와 영화까지 함께 보게 되는 관계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오래전 일이라서 진희와 함께 본 영화의 제목이 선뜻 생각나지 않아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동성애를 다룬
"굿 윌 헌팅"이란 외국영화였다.

나는 홍삼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이란 성인 영화를 보려고 했지만 진희의 요청대로 그 영화를 함께 관람했는데 나는 영 불편하게 보았어도 진희는 아주 감동스러운 표정까지 지으며 영화를 보았던 것이다. 진희의 뜻밖의 취향에 나는 좀 의아스러웠다. 겉으론 명랑하고 밝은 성격 내면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진희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왜 그런 영화를 좋아하는지 물어보자 자기가 어떤 여자인지 알고 싶으면 무라카미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란 책을 한번 읽어보라는 것이다.

무라카미하루키? 상실의 시대?

"상실의 시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고 히트작이라 할 수 있고 하루키를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반열에 오르게 한 유명책이었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그런 책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나는 일본이란 나라를 극도로 싫어했기에 일본작가들도 관심 없었고 일본책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진희의 말을 듣고는 당장 그 책을 구입해서 읽어보았다.

충격적으로 너무 재미있으면서도 어쩜, 젊은 시절 무라카미하루키의 자서전이라고도 느껴졌다.
"상실의 시대"가 왜 그토록 세계적으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읽히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자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 책의 주인공인 "와타나베"의 애인이었던"나오코"란 여자와 두 번째 애인"미도리"중에서 진희는 어딘지 모르게
정신적으로 병을 앓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 주인공인"나오코"와 많이 닮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레즈비언 어린 여자아이까지 등장하는 대목이 나오자 나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진희가 "굿 윌 헌팅"이란 영화를 보고 그토록 감동스러워했던 것이 "상실의 시대"에서 등장하는
어린 레즈비언 여자아이와 무슨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 같은 보통남자들은 "게이"나"레즈비언"같은 사람들을 보면 불쾌하게 느껴지면서 피하기 마련인데 진희는 영화를 보면서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 혹시? 진희도 레즈비언인가?

그러나, 만약 진희가 레즈비언이라면 결혼할 남자가 있다는 것도 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또 나를
만나러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굿 윌 헌팅"같은 영화를 좋아하며 또 내게 상실의 시대 같은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을까? 진희와 몇 번 만났을 때는 단지 성격 좋고 명랑하면서 착한 여자로 보였지만 그녀를 만날수록 나는 점점 더 희 뿌연 밤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