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이야기 27화

여자를 쟁취하려면 사깃군도 되어야한다.

by 현동인

어느 금요일 밤 10 시쯤, 연세대 앞에서 젊은 여자승객이 내 영업용 택시에 승차했다.


불금이라서 친구들과 만남 후, 집으로 귀가하는 여성인 것 같았다. 그녀는 넓은 뒷좌석 대신 조수석에 앉으면서 나를 보고 싱긋 미소를 띠며 행선지를 말했다.

기사님 모레내까지 부탁드릴게요!~

여자는 행선지를 말하면서 은박지에 싸인 물방울 모양의 "키세스 초콜릿"두 개를 내밀었다.
택시영업을 하다 보면 아가씨들로부터 커피캔이나 음료수를 건네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여자에게 초콜릿을 받아 들고 감사하다 인사한 후, 옆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갸름한 얼굴에 눈이 크고 인상이 매우 좋아 보이는 미인이었다.

택시영업을 하면서 이쁜 여자들은 내 택시에 수도 없이 승차를 했었지만 미인들이라고 해서 인상이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얼굴은 이쁘지만 인물값을 한다고 표정이 거만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독기가 풍기는 여자들도 많았다. 그런 여자들은 나 같은 택시기사 따위에게 초콜릿이나 커피캔 같은 것을 건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처음 보는 택시기사에게 초콜릿 같은 것을 주는 여자들은 대체로 친화력이 좋으면서도 성격이 밝은 편이다. 그런 여성들을 택시승객으로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기 마련인데 내게 초콜릿을 건넨 그 아가씨와도 일상적인 많은 대화를 하면서 화기애애하게 목적지까지 차를 몰았다.

그동안 택시영업을 하면서도 괜찮아 보이는 여자들에게 작업을 걸어서 몇 여자를 만났었던 나였기에 역시 그녀에게도 열심히 작업을 걸어서 만날 약속을 받아냈다. 어쩜 나는 한량이셨던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자의 목적지까지 10분도 채 되지도 않은 그 짧은 시간 안에 처음 보는 여자와 만날 약속을 받아내는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 테니까.

여자와 만나기로 한 날은 신촌 어느 길거리 정류장 앞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왜 하필이면 카페도 아니고, 길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는지는 오래된 일이라서 기억이 나진 않지만 버스 정류장 앞 레코드가게에서는 박지윤이 부르는 "하늘색 꿈"이 경쾌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늘색 꿈"의 원곡은 1980년"로커스트"란 그룹이 불러서 대단한 히트를 쳤었지만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박지윤의 리메이크 곡이 원곡보다 더 히트를 쳤던 것이다. 나는 그 흥겨운 노래를 들으며 버스정류장에 서서 초조하게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자가 약속을 지킬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만날 약속을 하고도 바람을 맞히는 여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 마음이 초조했던 것은 그 여자가 내 이상형이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나이 40이 넘었어도 여자와 처음 만날 때는 여전히 가슴이 설레었다. 이 증상은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치유가 되지 않는다.
특히, 이상형의 여자를 만나게 될 때 증상은 더욱 심해진다.

택시 안에서 여자와 대화했을 때는 여자에 대한 인상이 매우 좋았지만 실제 만나서도 그 느낌이
지속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얼마 전, 자기 생일 챙겨주지 않았다고 나를 시원하게 걷어찼던 여자도 실제 만나기 전에는 비록,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는데 첫 만남부터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소주를 원샷으로 연속 들이키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었기에 새로 만나게 될 이 여자는 제발 그런 여자가 아니기만을 하느님께 기도했다.

레코드가게에서 박지윤의"하늘색 꿈" 노래가 끝날즈음 정말 거짓말처럼 그 여자가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는데 나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여자의 모습에 나는 또 충격을 받았다. 약속을 지켰다는 것도 그렇지만 키가 나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었다.
택시에서 앉은 모습을 보았을 때는 그렇게 큰 여자인 줄은 몰랐었지만 실제 보니 나보다 훨씬 큰 여자였다.

나는 겨우 160을 넘긴 단신인데 비해 여자는 거의 170 정도는 돼 보였다. 여자를 보자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어도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당당하게 여자를 불렀다. 어느 여자들을 막론하고 주눅이 든 모습을 좋아하는 여자들은 없다. 그때 나를 본 그 여자도 조금 놀라는 듯하였다.
자기보다 훨씬 작은 남자일 줄은 그녀도 몰랐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부조화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며 돌아간다. 키 큰 남자가 작고 아담한 여자를 좋아하는 반면, 반대로 키 큰 여자가 작은 남자와 만나서 결혼하는 경우도 많고 뚱뚱한 여자가 비썩 마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일도 흔한 세상이다.
그녀와 나 또한 그런 부조화 세상 속에서 만났을 뿐이다. 나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그녀를 데리고 근처 주점들을 둘러보다가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곳을 발견하고는 그 주점으로 갔다.

카페에서 맨 정신으로 맹숭맹숭 대화만 하기보다는 간단하게 요기도하고 술도 한잔 마실 수 있는 주점이 더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남자들도 그렇지만 여자는 술을 마시면 자신의 본모습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여자의 진 모습도 궁금했다. 우리는 주점에서 오십세주와 안주를 시켰는데 옥수수로 빚었는지 노란색의 옥수수향이 나는 술이었고 약간 달큼하면서도 도수는 소주보다 조금 낮았다.

남녀가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첫 만남은 좀 긴장하기 마련이다. 그 긴장을 푸는 것은 남자의 재량에 딸렸는데 그때는 유머를 한껏 발휘하는 게 좋다. 여자를 많이 웃겨주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자에 대한 경계심을 풀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지금처럼 대중화되기 전이었기에 나는 택시를 몰면서 라디오에서 들었던 유머들을
총 동원해서 여자를 웃게 했다.

술이 한두 잔 들어가고 서로가 알딸딸한 상황에서 내가 한껏 유머를 발휘하자 여자는 까르르하고 웃었다. 분위기가 좋아지게 되니 대화도 아주 자연스럽게 될 수 있었는데 사실, 여자가 나에 대해 호감을 갖고 만나러 온 것은 내가 바이올린제작을 공부하고 있다는 것에 흥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택시는 단순히 알바였고 나는 바이올린제작가로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그녀에게 어필했었다.

현악기의 명장들인 스트리다바리우스가 어쩌고, 과르넬리델제수가 만든 악기는 어쩌고 하는 나의 설명에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호기심을 갖었던 것이고 나를 택시기사가 아닌 바이올린제작가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바이올린제작자가 멋진 직업인 것은 분명하다.

단지, 이 직업은 연예인과 같아서 국제 콩코르 같은 곳에 작품을 올리고 당선돼서 이름을 널리 알려야
돈과 명예를 거머쥘 수 있지만 제작가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낮은 직업에 불과할 뿐이다.
더구나, 나는 그때까지도 바이올린 제작을 완전히 배운 것도 아니고 그저 학생이었을 따름인데 그 계통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여자는 나에 대해 환상을 갖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사기성 멘트를 남발하면서 작업을 걸던 중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었다. 여자는 이미 결혼할 애인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 결혼할 남자가 있는데 왜 또 나를 만나러 나왔단 말인가? 지식한 내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흔히 하는 말로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지는 않는다.

애인이 있으면 내가 뺏으면 되지 않겠는가?

그만큼 내 앞에 있는 여자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남녀 관계는 둘이 손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언제든 바뀔 수 있기에 애인이 있다는 여자의 말을 듣고도 나는 여자에 대한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의 입에서 나온 두 번째 말에 나는 뒤로 넘어가야 했다.


여자가 나보다 무려 14살이나 연하인 것이다.

여자의 나이를 알기 전에는 30대였기를 바랐는데 여자의 실제 나이를 알고부터는 과연 이 만남을 계속해야 할지 말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할리우드 유명 영화배우라면 모를까 별 볼일 없는 주제에 나보다 14살이나 연하인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 정서로는 도저히 가당치 않을 것이다. 여자 또한 내 나이를 궁금해했는데 내 나이가 얼마로 보이냐고 장난스럽게 되묻자 그녀는 남자를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 나이보다 무려 7살이나 아래로 보는 것이다.

원형 탈모증으로 인해 머리 꼭대기에 무허가 헬기장을 차렸던 나는 택시영업을 할 때도 가발을 착용했었는데 아마도 그 가발 덕분에 여자가 내 나이를 훨씬 젊게 보았었던 것 같았다.
여자의 말을 듣고는 나는 입가에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그 정도 된다고 말했다. 14살 차이에서 7살이나 줄어들었으니 여자와 내 나이차는 이제 겨우 7살?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ㅎ
앞으로도 여자와의 만남은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던 내 귀에서는 환청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사깃군!~날강도!~도둑놈!~너도 인간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