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ㅡ카르페 디엠

by 지얼



-막달레나 수녀원 사건


최소 1922년부터 1996년까지 약 74년 간 아일랜드에서 있었던 인권 유린 사건. 종교시설 내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크다. 크로아티아우스타샤의 만행과 더불어 가톨릭흑역사로 여길 만한 사건이다. 이름인 막달레나는 성경의 마리아 막달레나에서 따왔다.

1922년 아일랜드에는 일명 '막달레나 세탁소(Magdalene asylum)'로 불리던 가톨릭 수녀회가 있었는데 가톨릭 교회에서 지은 사회시설로, 이름과 같이 세탁소의 형태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설립 당시는 세탁기가 발명되기 전이었기에 호텔이나 정부기관, 군 관련 세탁물을 위탁받아 사람의 인력으로 세탁물을 처리하는, 일종의 세탁 외주업체였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젊은 여성들이었고, 대부분은 매춘부 내지는 미혼모들이었다. 여기에 수용자들 중 일부는 성폭행 피해자, 고아 소녀들이었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그녀들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그녀들을 수용하여 세탁부로 노동에 참여시켰다.

수녀원은 세탁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이들을 무휴일, 무보수로 근무시킨 것은 물론이고 미혼모의 자녀들은 돈을 받고 입양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굶주린 채로 착취당했고, 매질을 당하는 것도 예사였다. 게다가 성추행까지 당하는 등 이들의 심신은 수녀원 내에서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외출은 당연히 금지되었고, 탈출했더라도 다시 잡혀와 혹독한 처벌을 당했다. 이렇게 수많은 여성들이 인권을 철저하게 유린당한 채 죽어갔다.
한 세탁소에서는 1925년부터 1961년까지 796명의 아이들이 정화조에 묻혔다.
이러한 충격적인 만행은 21세기를 코앞에 둔 1996년 9월 25일까지 약 7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나무위키에서 인용




때는 1980년대 중반, 아일랜드의 한 수녀원에 석탄을 납품하던, 다섯 명의 딸을 부양하는 가장 빌 펄롱은 수녀원의 석탄 적재 창고에 갇혀있던 한 아이를 구출하여 데리고 나온다. 이 수녀원 부속의 세탁실은 고아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장소였고 말을 안 듣는 일부 아이들을 수녀들이 엄동설한의 석탄 창고에 감금했던 것이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한 아이를 구출해서 나온 빌 펄롱의 심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고 했으면서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니, 모순형용으로 보인다. 번역 오류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최악의 일'이란 언급한 것처럼 '하지 않은 일' 또는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을 뜻하고, '최악의 상황'은 '최악의 일'을 극복함으로써 발생할 사회관계상의 불이익-재정적 불이익이나 곱지 않은 시선등을 의미할 것이다. 소설에서, 해당 수녀원은 경제와 교육 등 마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므로 펄롱의 그러한 일탈(수녀원의 관점에서)은 필연적으로 불이익을 불러올 것임에 틀림없다.

지나친 단순화는 있지만, 인간 군상을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본다.


1. 타인을 착취하는 인간

2. 타인에 대한 착취를 방관하는 인간

3. 자신에 대한 금전적 손익계산을 기준으로 타인을 돕는 인간

4. 자신의 손해를 감안하고 타인을 돕는 인간

5.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즉, 아무런 대가 없이 타인을 돕는 인간


설핏 보기에 4번과 5번 항은 그리 구별될만한 사항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무주상보시를 행한다는 것도 금전이나 노동력, 또는 시간(기회비용) 등의 손실을 감안한다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구태여 분류를 한 이유는 무주상보시는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보다 투명한 이타주의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오른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한다고나 할까.


무주상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내가 남을 위하여 베풀었다.’는 생각이 있는 보시는 진정한 보시라고 볼 수 없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인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4번과 5번 항을 따로 분류를 한 이유는 4번 항의 경우 선한 일을 행했다는 공명심, 혹은 그에 따르는 칭송을 구하기 위함이거나, 그보다는 덜하더라도 행위에 따르는 부수적인 자아도취적 만족감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이타심을 부정하는 소위 '심리적 이기주의'의 관점에서는 타인을 돕는 행위도 결국은 자기만족적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철학자 제임스 레이철스는 <도덕 철학의 기초>라는 저서 중 '심리적 이기주의'를 다룬 장에서 링컨의 일화를 소개한다.


언젠가 링컨 대통령이 역마차를 타고 가다가 함께 있던 동행에게 모든 인간은 이기심 때문에 선행을 베푼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친구가 링컨의 의견에 반론을 펼치는 사이 마차는 진흙 구덩이 위에 놓인 통나무 다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는 도중, 그들은 구덩이 옆 둑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암퇘지를 발견했다. 새끼들이 진흙 구덩이에 빠져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다리를 지나 마차가 계속 달리기 시작하자 링컨은 갑자기 소리쳤다. "마부 양반, 잠시만 멈춥시다."

마차가 서자 링컨은 마차에서 내려 다시 아까의 다리로 뛰어갔다. 그는 진흙 속에서 새끼 돼지들을 꺼내 둑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마차로 다시 돌아오자 친구는 "이봐, 에이브, 방금 자네의 그런 행위가 어딜 봐서 이기적인가?"라고 물었다. 링컨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여보게 에드, 방금 자네가 본 것이야말로 이기심의 전형이라네. 만일 내가 저 암퇘지와 새끼들을 내버려 둔 채 지나쳤다면 나는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네. 내 행위는 내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것이었음을 모르겠는가?"


링컨에 따르면, 자신의 행위는 일면 이타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기실 그것은 자신의 심리적 평안을 얻기 위한 이기적 행위라는 것이다.


이타주의자를 할퀴면 피 흘리는 위선자를 보게 될 것이다.

-마이클 기셀린


그렇다면 링컨의 견해는 옳은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타 존재의 고통을 보고 괴로워하는 것 자체가 이타심의 증거 아닌가? 이타주의자를 할퀴면 보게 되는 것은 위선자가 아니라 피 흘리는 공감 능력 소유자가 아닌가?

따라서 링컨의 견해는 위에서 언급한 공명심이나 칭송에 기인하는, 혹은 착한 일을 했다는 자아도취적 이기주의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고로 '심리적 이기주의'의 견해는 잘못되었다, 고 제임스 레이철스는 일축한다.

다시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돌아가자.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펄롱의 심경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아이를 데리고 나오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을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펄롱의 행위는, 설령 '심리적 이기주의'의 견해가 일면 옳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에 해당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펄롱의 행위는 이러한 행복을 미리 예상하고 한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외려 자신의 행위가 야기할 결과에 대해 불안해 하지 않았던가? 고로 그의 행복감은 사후적 감정이다. 그는 단지 지금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즉 아이를 구제해야만 한다는 감정적/윤리적 선택을 했을 뿐이다. 여기에 펄롱의 위대함이 있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라면 아마도 심리적 이기주의 자체를 공박했을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의 오류는 명백하다. 기쁨은 선한 감정이나 정념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내가 친구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거기서 오는 기쁨 때문이 아니다."





다시 한번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란, 지금 당장 했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야기된 심리적 짐덩어리를 일생동안 짊어지는 상태일 것이다.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는 저서 <러셀 교수님, 인생의 의미가 뭔가요?>에서 다음의 일화를 소개한다.


토머스 바르나르도 박사 이야기는 최근까지 영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인도주의자였던 그는 1870년 런던에서 처음 보육원을 열어 빈민가를 직접 걸으며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찾아다녔다. 한 번은 집이 꽉 차 열한 살짜리 소년을 돌려보냈는데, 이틀 뒤 그 소년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 사건 이후 바르나르도는 "어떤 극빈 아동도 입소가 거부되지 않습니다"라는 푯말을 문밖에 걸어놓고 이 원칙에 따라 시설을 운영했다.


바르나르도의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줄리언 바지니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 바르나르도는 카르페 디엠 정신(오늘을 붙잡아라)의 귀감이다. 그를 움직인 것은 커다란 악을 막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매일을 헛되이 보내는 것에 대한 거부였다. 극빈 아동의 입소를 절대로 거부하지 않겠다는 결정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기 위해 더 큰 능력을 가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확신을 보여준다. 오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 도움은 오늘 주어져야 한다.


한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약에 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 일단 내가 원하는 집을 사고 남은 돈은 고아들을 위해 기부할 텐데." 그러나 지금은 안다. 성경 말씀대로 '은과 금, 나 없어도' 지금 가진 것으로 당장 돕지 않는다면 미래에 수억 원의 돈이 생겨도 그러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최악의 일-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 다시 말해 '지금 행하지 않음'으로써 야기되는 회한의 감정이 정신적 낙인으로 남아있는 일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때로는 회피를 선택함에 따른 회한에의 후유증은 오래 남는다.



대략 15년 전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나는 전처가 하는 일-유기 동물이나 학대받는 동물을 구조하는 일-을 간접적으로 돕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학대 신고를 받고 찾아간 곳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농가였는데, 마을과도 동떨어져 있어서 다소 고립의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그 집에서 약 50미터 떨어진 곳에 견사가 하나 있었고 그 안에는 (신고에 의하면) 새끼 분양을 위한, 철저히 생식에의 목적을 위해 사육되고 있는 소형견이 홀로 있었는데, 그곳의 참혹한 환경은 잊지 못한다. 대변은 언제 치웠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었고, 식수는 대체 언제 갈아 준 것인지 시퍼렇게 이끼가 끼어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소형견은 피부병에 걸린 탓인지 털이 듬성듬성 빠져서 품종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런 환경을 목도하다 보면 문득 토마스 홉스의 말이 생각난다. "끊임없는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불결하고, 잔인하며, 짧다." 인생이 그러하다면 개는 오죽할까.


그 개를 구조하기 위해 집주인을 찾았다. 몇 차례나 문을 두드렸으나 인적은 없었다. 외출 중인 것 같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불쌍한 개를 두고 이런 대화가 오갔던 것 같다. 어떡하지? 그냥 데리고 갈까? 아니, 그건 절도야. 그런가? 하지만 CCTV도 없는데 걸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럼 그럴까? 설령 걸린다고 해도 기껏해야 개값 물어준 다음 핀잔 몇 마디 듣고 훈방 조치 되고 말 것 같은데? 그럼 데리고 갈까? 아니, 잠깐.... 아무래도 절도는 옳지 않은 것 같아.

이런 것도 윤리적 딜레마에 관한 문제 측에나 낄 수 있을까? 어쨌거나 당시의 나는 그 개를 그냥 내버려 두고 왔다.


이보다 더 오래전의 일이다. 전처의 회사에서 키우던 개(시고르자브종. 여기서는 '멍순'이라고 칭하겠다)가 밤에 짖는 통에 잠을 못 이루겠다는 동네 주민의 민원이 들어왔다. 결국 회사 직원들은 멍순이를 아는 지인 분의 축사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그 축사와 지인 분이라는 사람의 집이 다소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는 것. 그 지인 분이라는 사람이 멍순이에게 물이나 밥을 제때에 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전처와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이나마 멍순이를 찾아가서 물과 밥을 충분히 놓아주고 돌아오곤 했다.

한번은 멍순이가 회사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 축사에서 회사까지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차로 가도 약 20분 정도는 걸리는 거리를, 멍순이는 놀라운 회귀 본능으로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멍순이는 다시 그 축사로 보내질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다시 멍순이를 찾아가곤 했다.


어느 날인가 축사에 찾아갔을 때 멍순이의 흉측한 몰골을 확인했다. 대체 무슨 피부병에 걸린 건지 털이 여기저기 뽑힌 통에 맨살이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병원에 데리고 가야 했지만 나도 그렇고 전처 또한 출근을 해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날에 다시 찾아와서 병원에 데려가기로 했다.

축사에 다시 찾아갔을 때 멍순이는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는 멀리 있어도 크게 이름을 부르면 반갑다는 듯이 달려오곤 했는데 그때는 기색도 없고 자취를 찾을 길이 없었다. 3일 후에 다시 찾아갔지만 여전히 멍순이는 보이지 않았고, 며칠 후 다시 찾아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디선가 차에 치여 죽었거나, 혹은 개장수에게 끌려갔거나, 아니면 동네 보신탕 애호가 놈들에게.... 아니, 아가 천사들이 멍순이를 여기보다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갔을 거야.

무지개다리를 건너서.


<프란다스의 개>


내가 아는 배관공 한 사람은 길가에 핀 꽃을 볼 때마다 차를 세우고 잠시 내려 꽃향기를 맡는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잠깐 섰다 가야 해. 내일은 저 꽃이 없을지도 모르거든."

-로먼 크르즈나릭, <인생은 짧다, 카르페 디엠> 중에서


처음으로 멍순이의 피부병을 확인한 그날에 만사를 제쳐두고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었어야 했다. 내일이라는 안일한 장치에 맡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혹은 경범죄 전과가 쌓이더라도 그 소형견 또한 데리고 나와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펄롱의 표현대로,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로 괴로워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뒤늦은 후회와 회한의 감정으로 세월을 물들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펄롱이 그런 훌륭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연유에는 아마도 그의 선척적 기질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의지할 데 없었던 어머니와 자신을 거두어 주고 보살펴 준 미시즈 윌슨의 애정과 친절, 그리고 가르침과 격려가 그의 선천적 기질이라는 맹아에 물을 더해 꽃을 피웠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시즈 윌슨이 만일 그와 그의 어머니를 거두지 않았다면 그들도 어쩌면 그 수녀원의 악명 높은 세탁소에서 일생을 보내야만 했을 수도 있었다는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봄으로써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었고, 이는 전적으로 미시즈 윌슨의 미덕에 기인한다.

그런 것들은 결코 사소한 것들이 아니고, 원서의 표기대로라면 그저 '작은 것'일뿐이겠지만 이 작은 것들이 모여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지금'의 결단으로 누군가를 구원한다.


작가 한강은 노벨상 수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아름다운가"라고. 지속되는 사소한 무관심과 외면이 모여 세상의 폭력을 구축하거나 일조하고 사소한 것들, 아니 작은 것들이 모임으로써,그리고 지금 당장 행동함으로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작가 클레어 키건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https://youtu.be/wQvyM2e0oc0?si=pnYvfv5kGXYc0ohu



사족 :

작가 수전 손택은 '손발이 무참히 잘려나가 죽은 돼지 몸뚱이처럼 보이는' 폭침 현장의 사진을 본 버지니아 울프에 관해 이렇게 쓴다.

"울프가 보기에 이 사진들을 보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거나, 몸서리치지 않는다거나, 이런 참사나 대량 학살을 가져온 전쟁을 없애려 애쓰지 않는 것이야말로 도덕적 괴물의 반응이다.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괴물이 아니라, 교육받은 계급의 일원이라고. 우리가 겪은 실패는 상상력의 실패, 공감의 실패라고. 우리는 이런 현실을 마음 깊숙히 담아두는 것에 실패해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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