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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든타임 Aug 02. 2024

엄마 목소리 좀 낮추세요!

엄마의 신드롬에서 벗어나야 해

아들아!

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올 연초에 군에 입대한 큰 아들과 작년 9월 대학에 입학한 둘째 아들이다.

둘은 연년생이다.   큰아들이 두 살, 작은 아들이 1살 되던 해에 우리 가족은 한국을 떠나 타국에서 살았다. 이민은 아니다. 두 아들들이 12년을 외국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재외국민 12년 특례로 대학을 지원할 수 있었다.  큰 아들은 21년 9월에 한국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둘째아들은 22년 9월 대학에 입학하였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 군대 간 큰 아들이 18개월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올해 7월 8일에 제대를 했다. 큰아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만 2살 때 부모를 따라 외국서 살았기에 한국문화보다 외국문화에 익숙하였다. 서투른 언어로 인해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던 터라 아들의 제대는 영광스러운 "면류관"이었다. 


듬직하게 군생활을 마쳤으니 얼마나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아들이 군복무하는 동안 나는 늘 애타는 시간들을 보냈다. 무사 제대소식을 듣고 나는 눈물을 닦았다. 감사였다. 그리고 감동이었다. 


복받치는 기쁨도 한순간일 뿐 한 달도 못되어서 둘째 아들의 군입대소식을 들었다. 

올해 8월 26일 둘째 아들은 논산훈련소에 가야만 한다. 

우선 머리를 깎아야 한다. 

그리고 요즘 군인들에게 장병내일준비적금을 들어야 하니 제날짜에 맞추라는 말도 알려주어야겠다. 

핸드폰의 인터넷 사용 용량도 넉넉한 것으로 신청하도록 하고 군인용으로 가입하라고 일러주어야지......  

이게 엄마의 마음이겠지.

큰아들에게 얻은 정보이니 틀림이 없다. 

내마음이 여유로운 사실이다.  

만 한 살인 12개월 생일이 지나자마자 부모와 함께 해외에서 거주한 둘째 아들이지만 큰아들만큼 잘할 수 있을 거야. 나자신을 위로해 본다. 


 지난번 귀국했을 때  오랜만에 두 아들들을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났다. 아들들을 만난다는 들뜬 맘에서였을까, 세상이 다 나를 반가이 맞아주는 것 만 같다. 

오랜만에 만난 두 아들을 허그하고 싶었다. 

휴가를 나온 큰 아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머리에는 군모자를 쓰고 군인복장으로 군화를 신고 늠름하게 서 있었다.  나도모르게 코끝이 찡해왔다.  그 옆에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서 있는 둘째 아들이 보인다. 

"어이, 아들들!" 

트렁크를 한 손에 끌고 멀찍이서부터 아들들을 부르자 첫째가 나에게 뛰어온다. 그뒤에 둘째가 따라온다. 

기쁨도 잠시일 뿐, "엄마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는 거 같아요."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내게 말한다.

아들들이 커가면서 엄마에 대한 기준이 있었나 보다. 

그들이 사춘기라서 그런 것만은 아닌 듯싶은 게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여 아들들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목소리 좀 낮추세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어요."

공공장소에서 엄마의 소리가 크게 들렸는지 아들들이 내게 속삭이며 말해주었다.

문득 어릴 때 아버지와 엄마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창피해!

나도 한때 아버지와 엄마가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 부끄러움을 넘어 상처가 되어 살아온 시간들이 있다. 

할머니가 운영하던 작은 구멍가게(오늘날의 미니슈퍼)와 비단가게는 차 씨인 자녀들에게 물려주었기에 아버지의 직업이 순간 사라졌다. 중학교를 졸업하신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를 포기한 채 할머니를 도왔던 수고가 더 이상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이복형제들이 성장하고 난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작은 논밭대기를 받아 농업에 종사하셨다. 농사일이라는 게 겨울에는 할 일이 없다. 아버지가 겨울철 비닐하우스를 하시기 전까지는 늘 그래왔다. 동네 또래 아저씨들과 늘 함께 모여서 화투를 치는 것이 아버지의 삶에 유일한 레크리에이션이었다. 


아버지가 마흔이 되던 어느 날이다. 아버지의 절친이신 재일이네 아버지가 암병으로 돌아가시던 날 아버지와 그의 친구들은 재일이 아버지를 묘지에 파묻으면서 화투도 함께 묻어주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원길이 아저씨마저 암병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때에도 아버지와 친구들은 그를 화투와 함께 묻어주었다고 한다.

마흔의 나이이다. 목표와 방향을 잃어버린 채 아버지는 몹시 방황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친구를 잃은 충격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화투를 좋아하던 아버지의 친구들이 하나하나 세상을 떠나가자 아버지는 심적으로 많이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셨다.  어려운 시절을 동고동락하던 동네친구들을 잃은 허전함을 달래기라도 하듯 아버지의 놀음은 동네놀음판에서 읍내 놀음판으로 이어갔다. 엄마와 자주 언성을 높이는 날들이 빈번해졌고 우리 남매들에게 엄청난 불안감과 슬픔의 연속이었다.  


동생 성어가 국민학교 3학년,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둘째 언니가 중학교 2학년, 큰언니가 중학교 3학년때이다.

눈이 소복이 쌓이던  겨울방학 때였던 걸로 기억된다. 삼일째 집에 들어오지 않으시는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의 심기는 무척 화가 나 계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으러 8킬로나 되는 읍내길을 걸어가서 화투판을 뒤엎으셨고 부부싸움은 집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부부싸움이라고 할 것 없이 엄마의 일방적인 언성이 우리 자녀들에게는 늘 아버지의 잘못 보다 엄마의 잘못으로만 여겼다.  


장녀였던 엄마는 어릴 때부터 외할아버지가 약주를 하실 때 늘 옆에서 시중을 들면서 외할아버지로부터 약주 마시는 것을 배우셨다고 한다. 비록 약주를 잘하지 못하시지만 엄마는 약주를 드신 후에야 꼭꼭 감추어 두었던 자신의 감정을 쏟아놓으셨다. 시집살이하여 분가할 때에도 그간 쌓였던 감정을 봇물처럼 쏟아내셨던 것처럼 늘 아버지가 속을 썩일 때마다 술을 드셨고 그 술기운으로 아버지에게 화를 퍼부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세 자매는 가족의 불화가 엄마의 원인이라고 생각했고 아버지를 늘 불쌍하다고 여겼다. 나중에 철이 들고 엄마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되면서 엄마에게 큰 연민을 갖게 되었다. 

삼일 연속 외박을 한 아버지에게 벼루고 벼루신 디데이가 그날이었다.  조용한 아버지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난 엄마가 농약병을 들고 죽겠다고 난리를 치셨다. 


아버지가 많이 놀라셨을까?  아버지의 강한 힘으로 엄마의 화를 안정시켰고 다시는 외박하지 않고 놀음도 하지 않겠다고 싹싹 빌며 각서까지 쓰시던 아버지가 잠바 주머니에서 놀음하여 따온 돈들을 엄마손에 안겨주시던 그날 우리 사 남매도 엄마를 붙잡고 울던 때가 희미하게 기억된다.  

엄마는 아버지가 손에 안겨준 그 돈을 보시고 과연 좋아하셨을까? 


두 분이 연애하여 결혼까지 하였고 사 남매를 키우면서 희로애락의 많은 인생이야기가 왜 없었겠는가?  지금까지도 서로 사랑의 표현을 아낌없이 주고받으시는 부모님을 바라보면서 부모가 되고 난 후 자녀들에게 비추어진 나의 모습을 돌아보며 아들들이 내게 한말을 생각해 본다.  

"엄마, 제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들들은 엄마가 창피한 걸까? 

어릴 적 나의 부모님과는 달리 나는 남편과 부부싸움으로 인하여 아들들에게 상처를 남겨준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아이들은 엄마인 내게서 어떤 불편함을 가지고 있는 걸까?


이제는 괜찮아!

40년 전의 그때 그 사건 이후 부모님의 싸움은 그때뿐이었나 보다.  칼로 물 베기라는 옛말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결국 우리 사 남매에게 큰 상처로 남았고 어린 시절 슬픔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그때의 사건은 회색으로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슬픔을 안겨주었다. 두 언니와 남동생은 그때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안식과 오락이었을 법한 놀음은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그토록 외할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와 야반도주하여 가정을 이룬 엄마를 슬프게 하고 자녀들을 불안케 했다.  

회색빛의 뭉클한 슬픔보따리가 나의 감정을 하나하나 꺼내놓는다. 그렇다. 그때 나는 언제나 엄마가 집을 떠날까 봐 불안했다. 


밤이 되어 잠이 들 때 즈음에는 엄마가 사라질 까봐 두 언니, 남동생 그리고 나는 엄마를 사방으로 포위하여 엄마를 꼭 안고 잠을 청했다. 오른쪽 품에 남동생이 왼쪽 품에 셋째인 나 오른쪽 다리로는 둘째 언니 왼쪽 다리로는 큰언니가 엄마를 꼭꼭 둘러 싸맸다. 

혹시라도 엄마가 사라지면 어떡하나 싶어서다. 가끔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놓칠세라 울며 따라가는 꿈을 꾼 그때가 생각난다.  지금 나는 오십 대 중반인 나에게 말하고 있다. 

이제는 괜찮아. 


오랜만에 만난 아들들에게서 낯선 냄새가 났다. 각자 열심히 살다 보니 각자의 영역에 적응하며 지내는 가 싶다. 부모와 떨어져 생활한 지 큰아들은 3년, 둘째 아들은 2년이 되어간다. 

온실 속에서 부모와 함께 이룬 가족 공동체가 정답이라고 생각해 오던 아들들이 이제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정보들을 습득하면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제 아들들은 가족 안에서 부모의 주도하에 살아오던 패턴을 벗고 있다. 

엄마인 나는 늘 언제나 내 손안에 아들들이 자라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고 아들들은 고등학교까지 그렇게 살아왔었다.  나는 이제 아이들을 떠나보내야 한다. 아니 벌써 떠나보냈어야 했다. 


진심으로 각자의 삶 속에서 성장하고 건강한 청년들로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이 되기를 응원해야지.

엄마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이 창피하리만큼 아들들은 이제 자신들의 체면도 차릴 줄 안다. 

나의 마음 한편에는 그들이 좋아하고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가족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들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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