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기억들
허약체질
어릴 때 나는 허약한 체질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을 때면 엄마는 나에게 늘 밥물을 입에 두어 스푼 떠 먹여주셨다.
나는 그래야지만 비로소 눈을 깜빡 거리며 겨우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허름한 집
그보다 더 아주 어릴 적에 아버지는 엄마와 셋 딸을 데리고 비단장수이신 할머니댁에서 분가하셨다.
사연인 즉 할머니의 시집살이에 못 견뎌하신 어머니 때문이셨다.
이때부터 우리 집은 셋방살이로 어렵게 살았다.
이를 불쌍히 여기신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할머니 몰래 집터를 사게 되었고 그곳에서 허름하게 집을 지어 부모님은 딸 셋을 데리고 새로운 삶을 사셔야만 했다.
김 씨 집안의 3대 아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세 아이의 가장이 되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열심히 사셨다.
그리고 나와는 3살 터울인 아들을 낳으셨다.
엄마의 간절한 소원이 성취되었다.
할머니 앞에 이제는 당당할 수 있었기에 예전의 죄인과 같은 엄마의 운명은 김 씨 집안에 대를 이을 3대 아들 때문에 180도 바뀌었다.
할머니 이야기
사실 할머니는 과거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셨다고 한다.
당시에 할머니는 외동아들이신 아버지를 데리고 몇 가지 유산을 팔아 큰 목돈을 마련한 후 야반도주 하셨다고 한다.
후에 차 씨 성인 아들을 둔 홀아비와 재혼을 하시고 네 명의 자녀를 낳으셨다.
아버지의 홀로서기와 할머니
어찌 되었든 아버지의 홀로서기는 어릴 때부터 그리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현실이었다.
분가 후에 엄마는 귀한 아들을 낳고부터 당당해지셨다.
어린 내 눈에는 할머니 댁이 고래등처럼 커 보였다.
우리 식구가 할머니댁에 가는 날에는 잔치집에 초대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할머니집에 가면 언제나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고 처음 보는 바나나와 초콜릿 등을 먹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초콜릿, 과자, 사탕을 한 보따리 가져오셨는데 엄마가 무척 화를 내며 그것을 내다 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안 사실은 과자와 초콜릿 속에 벌레가 꿈틀대고 곰팡이가 나 있었다고 한다.
우리 집은 늘 할머니의 눈에 보시기에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아픈 손가락이셨을까?
부모님이 열심히 사신 덕으로 우리 집이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바뀌게 된 때가 있었다.
반달모양의 흉터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당시 어찌나 기쁜 나머지 눈을 감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놀던 내가 발을 잘못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오른쪽 눈썹 가장자리 아래 반달모양의 흉터가 생겼다.
피가 나는 곳을 지혈하기 위해 헝겊으로 감아주고 응급처치를 해주며 괜찮을 거야라고 하신 엄마의 말을 굳게 믿었기에 그때의 위기를 잘 넘겼던 것 같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된장을 헝겊 위에 발라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도 눈썹 아래에 1센치가량의 흉터가 있다.
학교에 대한 로망이 깨지던 날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연년생이었던 언니 둘이 국민학교에 다닐 때에 어찌나 학교에 가보고 싶던지 꿈에서도 학교에 다니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막상 1학년에 입학하고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대부분의 날들을 결석으로 채웠다.
학교에 가려면 산을 넘어야 한다.
빠른 걸음이라면 2,30분쯤 걸리는 거리다.
언니들은 항상 나를 뒷전에 남긴 채 자기네들끼리 빠른 발걸음으로 갔다.
한 번은 뒤따라가다가 넘어져 논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는 큰소리로 울면서 집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큰 동그라미 시험지
국민학교 1, 2학년때에는 친절하신 선생님의 배려와 인내하심 덕분에 방과 후 수업이라고 하는 나머지 공부를 했다.
또 한 번은 선생님께서 공부를 잘했다며 시험지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주셨다.
어찌나 기쁜 나머지 단숨에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는 동네사람들이 마실을 와 계셨다.
"엄마, 나 큰 동그라미 맞았어요!"
시험지를 꺼내 엄마에게 보여드렸을 때 기대로 가득 차셨던 엄마의 눈이 당황해하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허약했던 탓일까?
나는 늘 학교를 결석하곤 했고 내가 국민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남동생이 학교를 입학하자 엄마는 늘 동생을 학교에 데려다주곤 하셨다.
말벌과 된장
초등학교 5학년때의 일이다.
늘 오고 가던 학교 가는 길에 말벌집이 있는 게 아닌가?
친구들과 숨을 죽이며 조심스레 말벌집을 지나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필 무시무시한 말벌이 내게 달라붙어 머리를 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픈 머리를 움켜쥐고 산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울면서 집으로 향했고, 그때에도 엄마가 된장을 가지고 와서 벌에 쏘인 머리 위에 발라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나의 어린 시절이 생생하다.
남동생과 사계절
엄마는 늘 나에게 남동생을 잘 돌봐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동생은 늘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먹는 것, 입는 것, 장난감 모두가 신식이었다.
언니의 옷을 되물려 입고 자라던 내게는 동생이 마치 왕자와 같은 존재였다.
우리 집 앞마당을 바라보면 앞산이 보인다.
봄이면 진달래로 만발하여 분홍으로 가득한 산을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이라면 학교 입학전이겠지만 나는 늘 남동생을 데리고 논둑을 뛰어다니기도 하고 봄이면 산에 올라가 진달래를 따 먹기도 했다.
여름이면 동생을 데리고 냇가에서 고기도 잡고 헤엄도 치고 진흙 속에 숨은 방게를 잡고 놀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을이면 밤을 따기도 하고 주으러 다녔다. 겨울이면 얼어붙은 논에 들어가 썰매를 타며 놀았다.
오줌을 싸면
어느 날 엄마가 많이 화가 나셨다.
아침에 나와 내 동생이 쌍으로 이부자리에 오줌을 쌌기 때문이다.
엄마는 두 개의 키를 우리 머리에 씌우면서 소금을 얻어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봉당빗자루로 한바탕 혼이 났던 터라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동생과 나란히 옆집으로 향했다.
옆집에 들러 키를 내어주니 옆집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웃으시며 굵은소금을 한 줌씩 우리가 가져온 키에 담아주셨다.
도대체 오줌을 싸면 왜 동네방네 다니며 키에다 소금을 얻으러 다녀야 하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엉켜있던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나의 어린시절 그때의 기억들이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