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 Anatomy_4 : 멍- 잘 때리기

비통합의 경험

by 권리연

비통합의 경험은 노력하지 않아도 나로서 존재하게 한다.


- 심리상담가 김은옥님의 [엄마가 철학할 때], p 109 -

비통합 경험은 아이가 엄마를 신뢰해서 방어 없이 내적, 외적 자극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상태다.


처음 듣는 단어. 비통합.

도대체 무슨 얘기지?

책을 더 읽어본다.


엄마의 무릎과 배 위에서 편안히 휴식을 취하는 상태를 말한다.


엄마를 전적으로 믿어서 편안하게 쉬는 상태라고?


모든 사람은 힘든 순간에 어느 정도 퇴행하게 되어 있다.

어려움에 잘 대처하기 위해서 반드시 쉬어 가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단 것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잠을 자는 것도 쉬어 가는 퇴행이다.

놀이나 노래, 농담 등을 하면서 긴장을 푸는 것도 해당된다.

개인에게 있어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져 있는 시간은 나름 귀한 시간이다.

하지만 이미 비통합 경험에 실패한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 일어날 일을 통제해야만 안도감을 느낀다.

비통합 경험은 편하게 존재하는 상태다.

이건 엄마가 아이에게 맞춰야 가능하다.

생소한 심리 용어 ‘비통합의 경험’ 이란,

결국 아이와 엄마와의 신뢰가 제대로 형성되어 과거, 현재, 미래에 있을 어떤 일에도 크게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상태라고, 스스로 해석했다.


즉, 심플하게 멍-때릴 수 있는 상태.


살면서 정말 해보고 싶은 경험 중에 하나였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아무 생각 없이 멍-을 때릴 수 있는 걸까?

늘 궁금했다.

물멍, 불멍을 때리면서도 내 머리속은 언제나 복잡했다.

그렇다면 비통합 경험은 왜 중요할까?

부모가 아이의 내면 욕구를 무시하고 순종하게 만들면, 아이가 엄마와 환경에 자신을 맞추게 되는데, 이 상태를 조숙, 혹은 부모화됐다고 정의한다.

이런 조숙 상태는 엄마의 욕구와 요구를 내면화하고 그것에 자신을 맞춘 ‘거짓 자기’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조숙한 아이는 강박적으로 뭔가를 한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모든 일을 제대로 이뤄지게 하려는 강박 태도가 지나친 사람은 쉴 수 없는 사람이고,

이미 자기 정상성을 잃은 사람이기도 하다.

이들은 과도한 역할을 수행하며 사느라 항상 긴장하기에, 삶의 에너지가 쉽게 방전되어 탈진과 분노를 겪는다. 그래서 조금만 피곤해도 단절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 행동으로 옮긴다.


어? 정말 딱 내 얘긴데?

그렇다면 나는 비통합의 경험을 하지 못했단 얘긴가?

그래서 TCI (기질성격) 검사에서 강박적 기질인 나온 건가?


기질 : 강박성/ 성격 : 독창적인


강박형 기질


자극추구가 낮고, 위험회피 높고, 사회적 민감성 낮은... 강박형 기질.

* 강박적 기질의 특징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원칙주의자에 완벽주의자

-> 고로, 융통성이 결여되고 일의 효율이 떨어지며 숲을 보지 못한다.


2.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검소하며 절제력이 높다.

-> 고로 대인관계가 쉽지 않고 차갑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기질은 타고 나거나 양육 초기에 형성되는 것으로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다행이 난 후천적으로 성격형성이 잘 됐다.

부모님이 잘 키우신 건지, 내가 혼자 잘 큰 건진 몰라도.^^


독창적인 성격 : 자율성, 연대감, 자기초월 점수가 높다.


강박적 기질인 난 내 감정을 무시하고 [Must]와 [Should]를 우선시 하면서 살아왔다.

나를 살피기보다는 타인을 살피는 데 더 몰두했기에 내 감정과 욕구보다는 대타자, 사회의 욕구를 내 것이라 착각하고 살아가면서 정작 나를 돌보지 못하는 소모적인 삶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후천적 성격으로 안 그런 척 나를 잘 포장하고 살아왔다.)


휴식, 쉼을 몰랐다.

어떻게 쉴 수 있는지 방법을 몰랐다.


일례로, 고등학생 때, 초등 교사였던 아빠는 항상 나한테 말씀하셨다.


진짜 공부를 잘 하는 건, 놀 거 다 놀면서 잘 하는 게 진짠데,
우리 딸은 놀 줄 모르는 것 같네. 쉴 줄 몰라. 그건 진짜가 아니야...


그 말씀을 듣던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솔직히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 놀 줄 모르고 쉴 줄 모르고 달려서 전교권인데...
그럼 노느라 시험 망치라고?
아님 잠을 더 줄여 놀기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하란 얘긴가?

잘 놀고 공부 잘 하는 학생, 딸이 되는 법을 몰랐기에, 난 결국 내 IQ를 탓했다.

내가 머리가 나빠서 못 놀고 공부만 해야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구나.

때문에 매사 쉼 없는 노력은 내 행동양식의 디폴트가 되었다.

목표를 향해 정말 숨차게 달렸다.

10대엔 공부에, 20대엔 연애와 취업에, 30대엔 시집살이에, 40대엔 뒤늦은 자아실현에...

목표가 없는 날이 하루도 없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잘 놀 줄도 알아야 한다는 대타자의 말씀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 놀면서도 불안해 했다.

그렇게 살다가...




2024년. 작년.

번아웃이 왔다.


2017년 독립운동.

2018년~2023년, 1년에 하나씩 5편의 드라마 계약 및 작업과 1편의 영화 각색, 그리고 1편의 시리즈 애니메이션 기획 및 작업을 하면서...

5편의 드라마 작업이 한 결 같이 엎어지고 대본료까지 떼이면서 번아웃이 온 것이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타의로 멈춰졌다. 엎어졌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가자고 마음먹었지만, 문제는 어떻게 쉬는 줄을 모른다는 거였다.

2월부터 5월까지 침대와 한 몸이 되어... 가족과 주변 지인들에게 우는 소리를 했다.


나 병 걸렸나 봐...

-무슨 병?

.....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병...


어떻게 쉬는 줄 몰랐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그냥 누워만 있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라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고, 배도 안 고팠고, 오직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계속 잠만 잤다.

눈을 뜨면 해가 떴고, 그러다 또 어렵게 눈을 뜨면 어느새 깜깜했다.

어두운 블라인드가 쳐진 내 침실은 언제나 밤이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될 텐데... 이렇게 목표 없이 살면 큰 일 나는데...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니야. 지금은 목표가 없는 게 아니라,,, 쉬는 게 목표인 거야!


쉬는 게 목표여야 쉴 수 있는 나.

가여웠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한 때 누가 툭 치기만 해도, 쳐다만 봐도 울었던 시기를 지나면서 눈물이란 걸 흘리지 않았었는데,,,

오직 타인을 위해서만 눈물 흘리리라 다짐했었는데...

또, 내가 가여워 눈물이 흘렀다.

그러면서 억지로, 타의로 쉼의 미학을 깨달아야 하는 시간의 터널을 지났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제작사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각색한 영화가 개봉을 한다고.

완전히 잊고 있던 일이었다.


처음 제작사 대표가 [동화지만 청불입니다] 각색을 의뢰했을 때, 난 대표에게 물었다.


제가 이걸 할 수 있을 것 같으세요?


할 수 없을 이유는 분명했다.

심플하게 장르를 규정하자면, 소위 ‘섹시 코미디’라는 것이었는데...

난 섹스에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했다.

제작사 대표는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딱히 못 할 이유가 없다며...

(참고로 대표는 심플하고 엄청난 근성과 집념의 사나이다.)


딱히 못 할 이유가 없기에 시작한 작업.

또 역시나 열심히 했다.

섹스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쌓았고, 인생에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야한 유튜브를 구독하고, 마녀 사냥 같은 프로그램 패널들의 대화를 외다 싶이 보면서...

또, Chat GPT를 활용해 가면서...


그렇게 또 해냈다.

그러면서 왜 나는 글을 쓰는 걸까?

작년에 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오는 것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답 없는 고민을 이어갔다.

누군가 못 쓰게 하니까 오기로 쓰는 걸까?

그렇다면 결혼하기 전엔 왜 글을 썼을까?

처음 글을 쓰고 싶단 생각은 왜 하게 됐을까?

어쩌면 단비의 고민과 맞닿아 있는 줄도 모른다.


[아버지 때문에 동화작가가 되려했던 단비와 딸이 좋아하니까 동화를 안 쓰곤 못 배겼던 아빠.]


대타자의 요구에 얽매어 살아온 인생들이다.

대타자의 요구가 사랑이었던 의무였든,,, 그 무엇이었든 간에.

어쩌면 내 진짜 욕구와는 거리가 먼...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더 이상 ‘거짓 자기’를 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나 여기 있어요...! 살아 있어요...! 주체적으로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라는 몸부림을 치고 싶었던 것 같다.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어쩌면 영화 속 단비에게서 내 모습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언감생심 그 영화를 집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단비가 방심위 윤리위원회에서 공무원 생활을 스스로 청산하고 나와, 정석에게 했던 말이 있다.


[동화지만 청불입니다] 시나리오 중에서...

2024. 작년 한 해를 지나며,,,

난 이제 겨우 멍-때리는 걸 할 수 있게 됐다.


2025. 올해부터는,

그냥... 재밌는 거.

꼴리는 거.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걸... 하고 싶다.


그게 무엇인지는 이것저것 막 풀어내면서 또 깨달아야 할 것 같다.





나의 [Self Anatomy]의 여정을 함께 해주시는 유재인 선생님께서 데뷔 선물을 주셨다.


눈, noon, 유재인 作


[눈, noon]

이란 제목의 그림.

쌤은 상담사이기 전에 화가이기도 하시다.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작년 한해 눈을 뜨지 못했던 시간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을 그물 안에서 오롯이 존재하는 단단한 눈.

힘든 내 눈을 대신해 줄 것 같다.

선물 감사합니다.


빛을 응시할 수 있길 바라며...


https://blog.naver.com/kikidle/22370588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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