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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옥정 Nov 17. 2024

               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알 수 없는 연민인지 분노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할머니는 당신 영혼까지 탈탈 털어서 큰아들에게 바쳤다. 엄마는 중소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전혀 할 줄도 모르는 농사일을 죽도록 하면서도 아버지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그런 엄마도 싫고 그 엄마에게 독한 시집살이를 시키던 할머니도 정말 미웠다.


 할머니는 종갓집 팔 남매의 장남인 아버지를 시골에서 도시로 유학을 보냈다. 다른 자식들은 모두 희생시키면서 아버지만 대학을 보냈다. 졸업 후 아버지는 할머니 기대에 부응해서 반듯한 직장을 잘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보증을 서면서 직장도 잃게 되고 빚을 지게 되면서 고생길이 열렸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한 직장을 오랫동안 다녔던 적이 거의 없다. 여기저기 직장을 전전하기도 하고 가게나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힘든 상황이 반복되면서 결국은 고향을 찾게 되었다.


 고생하며 힘들게 농사를 지어 가르쳤던 아들이 할머니에게는 꿈이요 희망이며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 아들이 빈손에 처자식까지 거느리고 돌아왔으니, 지금 생각해봐도 할머니 마음이 어떠했을까 안타깝고 마음이 짠하면서 이해가 되기도 한다.


실패하고 들어온 아들 가족이 반갑고 좋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며느리인 친정엄마도 농사일을 전혀 몰라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농사일을 할 줄도 모르고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아버지에게는 얼굴 한 번 붉힌 일이 없었다. 엄마와 우리에게만 밥 먹는 것도 학교 가는 것, 심지어 그냥 앉아 있는 것까지도 야단을 치고 간섭을 하며 참 못살게 굴었다.


 그 와중에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농사일을 배워서 열심히 살았으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동네 이장을 한다면서 집안일은 돌보지도 않고 밖으로 돌면서 보증을 몇 번 더 서주게 되어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전답까지 모두 날리고 빚까지 또 지게 되었다.


아버지의 잘못으로 그 불똥은 우리에게 모두 튀었다. 할머니의 잔소리와 화는 우리로선 어떻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져만 갔다. 고스란히 벼락은 엄마와 우리가 맞게 됐다.


희망이 없었다. 그 시절에는 학교에 가면 기성회비를 내지 않는 얘들은 공부도 시키지 않고 집으로 매번 되돌려 보냈다. 책상에 앉지도 못하게 하고 수업시간에도 뒤에 세워놓기가 일수였다. 자식들은 학교를 전투하듯 힘들게 다녔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어떻게 학교는 가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애꿎은 엄마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아버지가 저질러 놓은 일들 수습하랴 자식들 학교 등록금에 입에 풀칠하는 것까지 지금 생각해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온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놓고도 식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엄마와 자식들이 할머니에게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오십 칠 세 되던 해에 간 경화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술을 국 대접으로 마시고 줄담배를 피웠다. 그때는 원망만 가득 하고 정말 미운 마음이 가득 했다. 내가 아버지 나이를 훌쩍 넘기다 보니 오죽이나 힘들었으면 국 대접으로 술을 마시고 줄담배를 피웠을까? 내가 느끼기에는 전혀 관심 없어 보였던 모든 일 들이 아버지 마음속에는 깊이 뿌리 박힌 한으로 남아 있지는 않았을까?


일찍 떠난 아버지와 끝까지 우리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떠난 할머니를 떠올려 본다. 평생을 시집살이에 해보지도 않고 살던 농사일을 하며 힘들게 살다 떠난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할머니를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면 얼굴만 붉히고 못 잡아먹어 안달만 하고 살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화해하고 이해하면서 상처를 보듬어 안고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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