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일기 57 vol.1 blocking Fine
빛을 알기에 / 세밑 앓이 /
며칠 멈췄던 장이 다시 운동하기 시작했다. 식사도 했고, 화장실도 다녀왔다. 살았다. 올해는 그래도 잘 넘어가나 싶었다. 한 해 그것이 어떤 것이든, 무탈히 보내는 것, 쉽지 않다. 점점 그렇다. 지난 것들을 정리하려 오래전 기록, 사진첩을 들여다봤다. 아름다웠다. 그때는 치열했을 테고, 또 그만큼 어느 부위가 멈추거나 힘겨웠을 테지만, 남겨진 기록 속 흔적들은, 그 안의 기운, 너무 예쁜 모습의, 보다 젊은 나였다. 해가 갈수록 알게 되는 것은, 해를 무탈히 보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지금이 아름답다는 평범한 진리를, 라일락 잎사귀 하나 철 없이 씹을 때처럼 진하게 몸이 기억한다.
아이가 많이 컸다. 이제 곧 학교에 간다. 훌쩍 자라 버린 아이가 제 삶 속으로 훌훌 들어가 버릴까 덜컥 겁이 난다. 단 한 번도 우리 손을 놓고 문 밖을 나서지 않은 아이다. 우리가 안 놓았지, 사실은, 훌훌 우리를 털어 낼까 봐. 놓아야 할 손임을 알면서도. 아빠로서의 내가 익숙하다. 제 어미 넘어져 다쳤는데 사촌들이 시끄럽게 떠들자 버럭 화를 내 제압해 버리는 모습에, 그리고 어미 품에 와락 안기는 아이 뒷모습에 눈이 시렸다. 그 아이의 전 생애를 우리와 함께 했다. 그렇기에 나눌 수 있는 즉각적인 반응들, 그 반응 깊숙한 곳에 나와 아내가 함께 있는 깊은 평안함과 익숙함.
세밑이 분주했다. 몸의 이상을 이겨내느라, 시간이 아이와 함께 훌쩍 지나버림에 놀라느라, 그 덕에 지나간 삶을 보니, 내 지금이 그래,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다시 인정하느라, 아빠로서의 내가 익숙함에 기쁘고 감사하느라, 놓을 손, 조금 더 오래 부여잡아볼 량으로 요리조리 머리를 굴려보느라, 분주했다. 아니, 아직 분주하다, 세밑이.
거두지는 않겠지만,
나를 둔 곳보다 나를 둘 곳에 나를 더 두어야겠다.
2013년 12월 31일
연출가 일기 vol. 1 blocking / Fine.